이름 |
미야자키 마사히로([ruby(宮崎正裕, ruby=みやざき まさひろ)]) Masahiro Miyazaki |
국적 | 일본 |
출생 |
1963년
2월 5일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츠루미구 |
학력 | 토카이대학 부속 사가미고등학교 |
직업 | 카나가와현 경찰 경시[1] |
단수 | 범사 8단[2] |
1. 개요
헤이세이의 초인
전일본검도선수권 대회 6회 우승. 역사상 최다 최고의 전적.
전적만 감안한다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역대 최강의 검사.
전일본검도선수권 대회 6회 우승. 역사상 최다 최고의 전적.
전적만 감안한다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역대 최강의 검사.
오른쪽이 미야자키 마사히로, 왼쪽은 동생 후미히로 |
2. 생애
- 1963년(쇼와 38년) 2월 5일: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츠루미구에서 탄생.
- 1969년(쇼와 44년) 4월:요코하마시립 下野谷 초등학교에 입학.1학년부터 현무관사카가미 도장(요코하마시 츠루미구)에서 검도를 시작한다.
- 1975년(쇼와 50년) 4월:요코하마시립 寛政 중학교에 입학.
- 1978년(쇼와 53년) 4월:카나가와현내의 검도 강호교인 토카이대학 부속 相模 고등학교에 진학.
(1학년부터 레귤러가 되어, 3학년때 인터하이현 예선으로 개인·단체 모두 우승해 인터하이 출장.국민 체육 대회등에도 출장)
- 1981년(쇼와 56년) 4월:카나가와현 경찰에 봉직.현재에 이른다.
- 1985년(쇼와 60년):전국 경찰 검도 선수권 대회에 첫출장 해, 준우승.
- 1988년(쇼와 63년):세계 검도 선수권 대회에 첫출장.우승(중견).
- 1990년(헤이세이 2년) 11월:전일본 검도 선수권 대회에서 첫출장, 첫 우승.
- 1991년(헤이세이 3년):전국 경찰 검도 선수권 대회에서 첫 우승.
- 1991년(헤이세이 3년):세계 검도 선수권 대회에 2번째의 출장.우승(중견).
- 1991년(헤이세이 3년) 11월:전일본 검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전인미답의 2 연패를 달성.
- 1993년(헤이세이 5년) 11월:전일본 검도 선수권 대회에서 3번째의 우승.
- 1994년(헤이세이 6년):세계 검도 선수권 대회에 3번째의 출장.우승(중견).
- 1995년(헤이세이 7년):전국 경찰 검도 선수권 대회에서 2번째의 우승.
- 1996년(헤이세이 8년):전국 경찰 검도 선수권 대회(5단 이상의 부)에서 3번째의 우승.(2 연패)
- 1996년(헤이세이 8년) 11월:전일본 검도 선수권 대회에서 전인미답의 4번째의 우승을 완수한다.
- 1997년(헤이세이 9년) 3월:세계 검도 선수권 대회에 4번째의 출장.개인전 첫 우승·단체전 우승(부장).
- 1997년(헤이세이 9년) 7월:문부성 스포츠 공로자 표창.
- 1997년(헤이세이 9년):전국 경찰 검도 선수권 대회(5단 이상의 부)에서 4번째의 우승.(3 연패)
- 1997년(헤이세이 9년) 11월:전일본 검도 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
- 1997년(헤이세이 9년):제46회 「카나가와 스포츠상」수상.
(검도 경기자의 동상 수상은, 1960년(쇼와 35년) 제9회의 나카무라 타로 이래, 37년만의 2명째)
- 1998년(헤이세이 10년) 11월:전일본 검도 선수권 대회에서, 5번째의 우승.
- 1999년(헤이세이 11년) 11월:전일본 검도 선수권 대회에서, 6번째의 우승. 2번째의 2 연패를 달성.
- 1999년(헤이세이 11년):전국 경찰 검도 선수권 대회(5단 이상의 부)에서 5번째의 우승.
- 1999년(헤이세이 11년) 12월:제49회 「일본 스포츠상(특별상)」수상.
(올림픽 출장 선수 이외의 동상 수상은 사상최초)
- 2000년(헤이세이 12년) 11월:전일본 검도 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
- 2000년(헤이세이 12년):전국 경찰 검도 선수권 대회(5단 이상의 부)에서 6번째의 우승.
- 2008년(헤이세이 20년) 1월:카나가와현 경찰 특별방법과훈련 검도부 감독으로 취임.[3]
- 2009년(헤이세이 21년) 5월 2일:8단 심사에 첫도전에서 합격. 교사8단.
- 2010년(헤이세이 22년) 11월 3일:NHK 스포츠의 전일본 검도 선수권 해설자를 맡는다.
- 2015년 : 제16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 일본여자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3. 선수 경력
한번 우승하기도 어렵다는 전일본선수권 본선에 12년 연속( 1990년~ 2001년) 진출하였다.[4] 우승 6회·준우승 2회(2연패 2회( 1996년~ 2000년)의 5년간, 결승에 계속 진출했다.)의 위업을 완수했다. 또한 세계선수권 단체전 우승 4회, 개인전 우승 1회, 전국 경찰 검도 대회 우승 2회, 전국 경찰 검도 선수권 대회 우승 6회·준우승 1회·제3위 3회(안, 3 연패 1회·2 연패 1회), 국민 체육 대회(검도 경기) 단체 우승 1회·제3위 2회, 전일본 선발 검도7단 선수권 대회 우승 5회·준우승 3회 등, 전후의 검도 역사상 최고·최다의 전적을 남겼다. 때문에 헤이세이의 검호」· 「헤이세이의 초인」 ·「검도계의 철인」·「노력의 천재 검사」등으로 불린다.많은 일류 검사들이 20대부터 시작해 전일본검도선수권대회에 평균적으로 10년 정도 도전한다. 그런 그들이 우승하는 건 한두번 있을까 말까한데, 미야자키는 12번 본선출장해서 6번우승을 거머쥔 그야말로 먼치킨.[5][6] 그가 은퇴한 2001년까지 남겼던 6회우승기록은 2016년, 현재까지도 깨어지지 않았다.[7]
미야자키가 첫 출장 첫 우승을 완수한 당시의 전일본검도선수권대회는 현재와 달리 단에 의한 출장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미야자키는 6단을 취득할 때까지 출장할 수 없었다. 첫번째로 우승한 해의 다음 해에도 우승해 「전일본검도선수권은 연패할 수 없다」라는 징크스를 최초로 깬 것으로도 유명하다. [8]
수많은 실적을 올려도 결코 자만하지 않고,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로 임하는 자세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전일본선수권 가나가와현 예선에는 2001년을 마지막으로 참가하지 않고, 선수와 코치를 겸임하고 있었다. 2003년 10월에 전국 경찰 검도 선수권 대회에서 3 회전 탈락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해 이후는 코치에 전념. 현재는 사범으로서도 수많은 지도 실적을 올리고 있다. 아우는 미야자키 후미히로(현재 카나가와현 경찰 경찰관)이다.[9] 라이벌은 이시다 토시야(현재 오사카부 경찰 경찰관·오사카부 경찰 특별방법과훈련 검도 사범).[10]
4. 특징
지금까지의 일본을 대표하던 선수와는 다른 자신만의 검도를 한다. 타고난 스피드와 파워, 유연성을 바탕으로 화려하면서도 노도와 같은 파상적인 공격으로 상대를 유린한다. 그의 검도는 한때 일본 검도계에서 차가운 질책의 대상이 되기도했다. 그것은 그의 검풍이 風格과 正道을 중시하던 일본검도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한때 그의 검도스타일에 대해서 변칙적이다 품위가 전혀없다 등의 말도 많았으나[11]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그의 '강함'과 다른 요소까지도 인정을 받는 분위기로 흘러 '미야자키류'의 검도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스타일상의 호불호가 심한 선수. 검도 시합의 실전적인 검도를 추구한다면 미야자키를 선호할것이고 품위와 자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검도가라면 미야자키는 선호할만 한 검도스타일이 아닌것.
한국 한정으로 1990년대 그의 검도의 영향을 받아 수많은 아마추어 도장에 또다른 미야자키들이 양산되었다. 주로 3-40대 초중반의 검도인들 사이에서 나타난 일종의 허세. 하지만 수련자 개인의 허세로 끝난다면 좋겠지만 대부분 그의 검도가 기본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그만의 스타일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의 겉모습만 흉내내는 바람에 검도 스타일이 무척이나 "변칙 혹은 이기기만 하면 된다" 스러워진 것이 문제다. 미야자키 이후로도 기본기를 충실히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검도가들을 어설프게 따라하는 풍토는 여전하다.
그러나 미야자키의 스타일을 쉬이 따라할 수도 없는 이유는 변칙적이긴 하지만 남들은 제대로 흉내도 못내는 그 자신 나름대로의 독특한 풋워크, 기본기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류 라는 평가를 받는 부분이 이런부분. 철저한 미야자키 본인의 센스에 의지한 경기운용 및 기술들이 많았기 때문이며 다른 검도선수및 아마추어 검도 일반인은 쉽게 따라하지도 못하는 수준이다. 그의 기본기가 부족하냐라고 하면 검도인들은 그의 기본기는 훌륭하다는게 중론. 다만 시합을 위해 그의 스타일이 그자신만의 변칙스타일로 발전해 왔다.
5. 평가
현대검도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검도 스타일은 자세와 품위를 엄격히 하며 검도시합이 죽도를 사용하는 시합이였다. 진짜 진검을 사용한다는 상정하에 혹은 생각을 가지고 검도시합을 펼쳐온경우가 많았다. 90년대초 이런 시합 스타일에 완전 반대되는 다시말하면 "이기면 장땡" 식의 스타일로 시합을 풀어나간 것이 미야자키인 것이다. 어찌보면 얍쌉한 스타일로 시합에 임했기 때문이다. 진검을 상정한 "검도" 검술이 아닌 죽도를 사용하는 시합 "죽도술"의 개념의 연장선으로 진검이라면 당연히 사용할수없는 방법으로 시합을 풀어나갔으며 당연하지만 미야자키가 사용한 와이퍼 같은 기술 (머리손목 허리를 동시에 막지만 역허리가 완전 오픈되는 자세)들은 서로 진검을 쓴다는 상황이면 시도도할수 없는 기술들이다. 어떻게 보면 검도를 스포츠적으로 해석한 사람이다.결국 현대검도는 미야자키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시합죽도술로 더더욱 발전되어가고 있으며 실제로 스포츠화 되어 머리,손목,허리 점수내기 죽도게임에 가까워진것도 사실. 결과적으로는 이런 흐름의 선구자라 할수도 있겠다.
하지만 결국 그가 아직까지도 검도인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며 회자되고 있는 것은 그 누구도 그의 역대전적 비슷한 기록을 아직도 내지도 못하고 있음(그의 기록이 아직도 넘사벽) 과 동시에 그리고 압도적인 실력으로 모든 당대 최고의 검사들을 제압하여 그의 검도 스타일이 아직까지도 해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검도선수로써 그의 라이벌로 거론되는 사람들은 이시다 토시야, 에이가 나오키, 에이가 히데유기 정도 뿐이다. 에이가나오키는 미야자키가 약 37세 때 그리고 본인은 33세때 결승전에서 맞붙었으며 결국 미야자키의 시대가 이제는 끝났음을 전세계에알리듯이 우승하며 막긴하였으나 전성기때 미야자키는 크게 천적이랄 사람이 없었던 수준이다. 하지만 후에 계속해서 미야자키는 에이가 나오키와 대전하지만 에이가 나오키는 미야자키스타일을 완벽히 습득한듯 후에는 그의 유일한 천적에 가까운 모습으로 미야자키와의 전적에서 우위를 점한다.
그의 기술은 완벽한 기본기, 정통검도의 체계적 기술을 완벽하게 소화한 후 완성시킨 것이다. 그의 검도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많은 일본의 검도인들도 미야자키의 7단 승단시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승단시험장에서의 미야자키의 칼은 정통검도의 교본처럼 바르고 風格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후에 결국 그는 8단 심사를 단번에 통과하는 쾌거를 이룬다.[12]
2011 전일본선수권부터 전년도 대회우승자는 바로 예선을 거치지 않고 본선진출이라는 특혜가 없어짐에 따라 미야자키의 전적은 더더욱 넘사벽이 될 전망이다.[13]
6. 전적 및 영상
약력전일본검도선수권대회 제38, 39, 41, 44, 46, 47회 우승 (6회) 역대 최다 우승.
일본경찰검도대회 개인전 우승(3회)
전적
전일본검도선수권대회(개인전)
1990년 제38회 우승[14]
1991년 제39회 우승[15]
1992년 제40회 3회전 패
1993년 제41회 우승[16]
1994년 제42회 준준결승 패
1995년 제43회 3회전 패
1996년 제44회 우승[17]
1997년 제45회 준우승[18]
1998년 제46회 우승[19]
1999년 제47회 우승[20]
2000년 제48회 준우승[21]
2001년 제49회 2회전 패
세계선수권(개인전)
1991년 제8회 준준결승 패(캐나다)
1997년 [[https://youtu.be/4yN3vKje5fg|제10회 우승(일본)[[[22]
전국경찰선수권대회(개인전)
1985년 2위
1990년 3위
1991년 우승
1992년 3위
1995년 우승
1996년 우승
1997년 우승
1999년 우승
2000년 우승
2001년 3위
(1985년 - 2003년까지 19년간 연속 출장.전국 경찰 검도 선수권 대회와 전일본 검도 선수권 대회를 같은 나이에 재패한 선수는, 나카무라 타로(카나가와현경)〈'55〉·나카무라 타케시(경시청)〈'70〉·미야자키 마사히로(카나가와현경)〈'91·'96·'99〉·우치무라 료이치(경시청)[23]〈'06〉·다카나베 스스무(카나가와현경)〈'10〉마셔)
국민 체육 대회(단체전·검도 경기)
- 1998년 우승
- 2003년 3위
- 2004년 3위
( 1987년- 2005년까지 19년 간 연속 출장)
전일본 선발 검도7단 선수권 대회: 우승 5회·준우승 3회
(2006년까지의 전적.전일본 선발 검도7단 선수권 대회는 2007년 이후로 중지되었다.)
7. 수상 기록
세계선수권 | ||
금메달 | 1988 서울 | 단체전 |
금메달 | 1991 토론토 | 단체전 |
금메달 | 1994 파리 | 단체전 |
금메달 | 1997 교토 | 단체전 |
금메달 | 1997 교토 | 개인전 |
8. 인물
- 중학교 1학년 때 초단의 승단 심사를 수험하지만 4번연속으로 떨어진다. 중학교 2학년 때 5번째의 도전에서 간신히 초단을 취득한다.(현무관사카가미 도장의 동기중에서 가장 늦었다) 어릴 때 승단심사를 떨어질때마다 그의 은사께서 아무런 말없이 우동을 사주셨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에서 변호사 시험보다 어렵다는 8단심사때 단 한번만에 패스..결국 최연소 8단이되었다. 말하자면 미야자키는 가장 쉽다는 1단을 4번이나 떨어지고 가장어렵다는 8단심사를 한번에 통과한 것이다.
- 중학교의 폐부 직전의 검도부에 소속해 부원 권유에 힘썼지만, 결국 부원은 2명 밖에 모이지 않고, 체육관도 사용하게 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교실에서 연습을 거듭했다고 한다.
- 토카이대학 부속사가미 고등학교에 진학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4시간의 연습을 거듭했다.편도 2시간의 통학에도 불구하고, 3년간 연습을 거르지 않았다.또 타인의 연습을 관찰하는 '숙지 연습'에 힘쓰고 약점이나 공격하는 방법을 분석해 노트에 기록하면서, 연구에도 열심히인 성격이었다.
- 츠쿠바대학 스포츠 의학 연구실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미야자키는 왼발 관절의 가동범위가 굉장히 넓기에 타돌속도(치고 들어가는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빠르다.
- 미야자키에 대한 찬사는 많이 존재한다., 마츠나가 마사미(前 전일본 검도 연맹 이사)의 말에 의하면 「미야자키의 전에 미야자키없고, 미야자키의 뒤에 미야자키 없음」이라고도 말해지고 있다.
- 「6회 우승한 것보다 5년 연속으로 결승전에 진출한 것이 자랑」이라고 한다.우승에 대해서는 「승부는 자신의 힘, 응원해 주는 사람, 선생님·선배, 자신을 둘러싸는 종합력에서 이긴다고 생각해 왔다」·「우승은 노리지 않으면 무리. 노려도 좀처럼 할 수 없지만, 노리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다」라고도 말하고 있다.
- 「연습에 임하는 방법」에 관하여 철저히 연구해, 「자신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의 좋은 점을 발견하는 것에 집중했다.」
- 미야자키는 강해지는 것의 조건에 대해 「우선 자신이 노력하는 것·환경을 타고 나는 것·좋은사에도 풍족한 것」의 3점을 들고 있다.또, 강해지는 사람에게 공통되는 인간적 자질에 대해서는 「노력한다, 자주(잘) 연습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강해지고 싶다」라고 하는 강한 기분을 가지면서, 솔직하게 주위의 사람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가진다」는 것이 그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현재의 미야자키의 포부는, 후배들에게 자신이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해서 자신 이상의 선수를 기르는 것으로 자신이 보은하는 것이라고 한다.
9. 기타
[1]
한국 경찰의 경정, 총경에 해당한다.
[2]
2023년 5월 6일, 만 60세의 나이로 범사가 되었다.
[3]
그의 지도 하에 쇼다이 켄지, 다카나베 스스무 등이 전일본검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며 지도력도 인정받는다.
[4]
본선에 진출하는 것도 어렵다. 많은 일본선수들은 본선에 나가는 것만으로도 꿈이라고 할 정도이다. 검도선수권대회가 열리는 곳은 유명한 스포츠행사 등이 열리는 일본의
무도관이니 아무래도 상징적 의미도 크다.
[5]
10년가까이 자기 혼자 타이틀을 독점했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다. 더군다나 준우승 횟수까지 포함한다면..
[6]
미야자키 이전에 3회 우승을 달성한 치바 마사시, 그리고 헤이세이 시대에 3회 우승을 달성한 니시카와 키요노리 같은 명검사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우승횟수의 2배에 연패를 2번한 미야자키의 업적은 전무하고 앞으로도 깨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7]
미야자키가 유일하게 타이틀을 못 가진 대회가 중창기 대회(총리대신배)이다. 이 대회에서는 미야자키의 라이벌로 거론되었던 에이가 형제(히데유키, 나오키)가 나란히 타이틀을 가져갔다.
[8]
그도 그럴것이 연패를 하는것이 어려울 만큼 본선은 수준이 다들 높다. 더군다나 마사히로는 이 연패를 현역시절에 2번이나 달성하였다. 그리고 후에 그의 제자인 다카나베 스스무가 연패를 경험한 두번째 선수가 된다.
[9]
아우 역시 일본에서 정상급의 劍士이며, 전일본선수권 결승에서 형인 마사히로와 2번 맞붙어 두번째 만에 형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제10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 개인전 결승에서도 형과 맞붙었으나 연장전에서 형에게 패배하여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10]
일본에서 가장 호쾌한 검도를 하는 劍士 중 한 명으로 전일본검도선수권대회 2회 우승자이다. 제10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에서 일본대표팀 주장이었고, 개인전 3위를 기록하였다. 제16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에서 남자대표팀 감독을 역임하였다.
[11]
대표적으로 미야자키가 즐겨 쓴 '와이퍼'란 방어 기술로, 이는 아직도 시합에서 논란이 있다.
[12]
46세 나이에 최연소 8단이라는 기록까지 세웠다.
[13]
미야자키가 연패를 연달아 할 때는 이 특권의 어드밴티지를 어느 정도 받긴 받았다. 공교롭게도 그의 제자인 다카나베 스스무가 우승을 차지한 후에 이 어드밴티지가 없어졌는데, 다카나베는 본선에 진출하여 스승과 같이 연패를 이룩한다.
[14]
시라카와 마사히로에 결승에서 승리.
[15]
홋카이도의 에이가 히데유키에 결승에서 승리.
[16]
동생인 후미히로에 결승에서 승리하였다.
[17]
도쿄의 하라다 사토루에 결승에서 승리.
[18]
동생인 후미히로에게 패배하였다. 재밌는 것은 이 대회의 4강에 미야자키 형제(마사히로, 후미히로)와 에이가 형제(히데유키, 나오키)가 올랐는데, 첫 경기에서는 동생들의 대결이었고 두번째 경기는 형들의 대결이었는데, 모두 미야자키 형제의 승리
[19]
결승에서 오사카의 에토 요시히사에게 승리하였다. 에토는 47회 대회에서도 결승에 올랐으나 2번 연속으로 미야자키에 패해 준우승하였다.
[20]
미야자키의 우승 경력에서 오점으로 남는 대회. 준준결승전에서 일본의 또 다른 명검사 에이가 나오키와 경기하였다. 미야자키의 머리에 에이가는 받아 허리로 대응하였는데, 심판 3인은 지체없이 미야자키의 머리 득점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비디오 판독으로는 미야자키의 머리는 에이가의 머리에 닿지 않았고, 따라서 명백한 에이가의 득점이었다. 하지만 후에 에이가는 자신의 다큐에서 미야자키의 공세에 자신이 밀렸고, 미야자키는 자신을 던지는 劍'道'를 한 것임에 반해 자신은 칠 타이밍을 계산한 劍'術'을 펼쳤다며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였다.
[21]
결승에서 에이가 나오키에 패한다. 전년도 오심 논란의 주인공들이 결승에서 맞붙은 경기로 비상한 관심을 모았고, 결국은 에이가가 손목 득점으로 승리. 이 경기에서 에이가는 미야자키의 시대를 끝낸 검사로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22]
준결승에서 한국의 박상섭, 결승에서 동생인 후미히로를 꺾었다.
[23]
80년생 검사. 2014년 8월 현재 전일본검도선수권 우승 3회, 준우승 3회. 현역선수로서는 미야자키의 기록에 가장 근접해 있는 선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