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문남일(文南一) |
생몰 | 1914년 6월 4일 ~ 1980년 7월 28일 |
출생지 | 전라남도 보성군 |
사망지 | 전라남도 보성군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문남일은 1914년 6월 4일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7년 3월 보성공립보통학교 6학년을 졸업한 뒤 일제 제국주의에 맞서기로 결심하고 1932년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 전단, 격문을 살포, 부착하는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는 <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일본제국 타도만세> 등의 전단을 인쇄했고, 5월 1일 오전 4시 동지들과 함께 보성경찰서를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으로 나누어 보성 일대에 전단 700매를 살포하고 격문 300매를 마을 곳곳에 붙였다.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32년 6월 6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6월 29일 장흥지청에서 출판법,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문남일은 출소 후 1933년 2월에 비밀결사 위친계(爲親稧)를 조직했다. 위친계는 양계, 양돈을 하면서 그 수입으로 공산주의 사상 잡지를 구입해 동지들끼리 돌려 읽으면서 수시로 항일 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다가 11월 상순 그가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위친계는 자연히 해체되었다.
한편, 문남일은 1933년 9월 하순에 보성에서 비밀결사 적색농민조합(赤色農民組合)을 결성하고 하부조직으로 '농민운동그룹'을 조직했다. 적색농민조합에는 군청 직원과 면서기들도 참여해 서로 활동 상황을 보고했으며, 농민에 대한 선전 자료로써 기관지 <농민시보(農民時報)>를 발행했다. 그러나 이 일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었고, 그는 1934년 4월 일본에서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동안 취조를 받았다. 이후 1934년 10월 12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제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어렵게 지내던 그는 8.15 해방을 맞이했지만, 이후에도 생활고에 시달리며 매일 힘겹게 살다가 1980년 7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에 문남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문남일의 아들 문해진 씨는 아버지가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은 뒤 보훈단체인 광복회에 들어가 국민의 애국심 고취를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일제에 맞서 불매운동이 벌어지는 것에 적극 지지하면서, 불매 운동에 반대 입장을 가진 시민들에게 역사관을 돌이켜볼 것을 당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