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fix]
1. 개요
문경은의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2. 프로 이전
원래는 센터로서 플레이하던 선수였다. 하지만 고교 시절 190cm에서 더 이상 키가 크지 않자 스몰 포워드로 전향했다.
스몰 포워드 전향 후 연세대에 입학[1], 연세대 재학 시절 1993-94 농구대잔치에서 이상민, 서장훈, 우지원, 김훈 등과 함께 연세대를 농구대잔치 사상 첫 대학교 우승팀으로 이끌었다.
문경은이 센터 출신이고 장신인 점을 활용해서 공격했다는 오해가 있는데, 문경은의 동시대 선수이자, 고교시절 센터하다가 신장의 문제로 대학 진학후 포워드로 변신한 선수는 양경민, 김영만, 우지원 등[2] 적지 않았다. 또한 이때부터 성인 농구계 평균 신장이 빠르게 상향세를 타서, 불과 몇년 전까지 183cm 이충희가 포워드로 뛰던 시절에서 진화해 대학농구 스몰 포워드 중 일급선수는 웬만하면 190을 넘겼기에 신장이 특별히 강점이 된 선수도 아니다.[3] 이렇게 당대의 라이벌들에 비해 신장으로 압도한 게 아니라, 후배 우지원과 비슷하게 정확한 슛팅력과 3점슛, 강심장을 바탕으로 한 클러치 득점력으로 스타가 되었다.
한편 당시 인기 탤런트이던 손창민과 닮았다고 하며 오빠부대를 이끌고 다니는 스타로 군림하였는데 중대 양경민, 김영만처럼 올라운드 포워드로 완전히 갈아타진 못해서, 저 둘과의 매치업에선 수비 열세를 드러냈다.
실업 농구팀인 삼성전자와 현대전자의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 끝에 결국 삼성전자로 진로를 택했는데, 유,무형의 엄청난 대우와 함께 알려진 계약금만 5억원을 받았다.[4][5] 삼성전자에 입단한 이유는 문경은 이전 최고의 슈터 김현준이 있기도 해서인데 삼성전자 입단 후 김현준과 쌍포를 이루며 팀을 농구대잔치 준우승으로 이끌었다.[6] 이때 문경은은 총득점 1위에 올랐고 이 시즌을 끝으로 전무후무한 6천 득점의 대기록을 작성하고 은퇴한 김현준은 자신의 기록을 깰 선수로 문경은을 지목하기도 했다. 한편 이 농구대잔치 8강전에서 삼성전자는 연세대와 경기를 했는데 서장훈을 비롯 연세대 선수들에게 가한 테러 수준의 몸싸움에 한 몫을 거들어서 욕도 많이 먹었다.[7]
그 후 상무에 입대, 대학 1년 후배인 이상민과 재회하고 조성원과 쌍포를 이루면서 상무를 1996-97 농구대잔치 우승 문턱까지 이끄는데 성공하나, 이름값에 못 미치는 활약으로 까이는 일도 자주 있었다.
3. 프로 시절
상무 제대 후 1997-98 시즌에 프로화된 삼성에 복귀, 평균 25점에 이르는 득점력을 과시하며 역시 문경은이란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팀은 플레이오프도 나가지 못한다.
1998-99 시즌에는 큰 활약을 보이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한다. 하지만 4강전에서 기아 엔터프라이즈에게 패하고 만다.
다음 시즌에도 평균 21점에 이르는 득점력을 선보였으나, 1999-2000 시즌에는 평균적인 외국인 선수들의 능력 향상에다 자기 관리 문제인지 뭔지 날렵하던 몸에 군살이 꽤나 붙은 모습까지 되면서 평균 득점은 17점 정도를 기록한다. 하지만 주희정의 활약이 팀에 더해지면서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는다.
2000-01 시즌, 빛을 발하는 주희정과 그 시즌 최고의 외국인 선수인 아티머스 맥클래리, 거기에 이규섭의 공수가 더해전 썬더스에서 평균 18점에 이르는 공격을 더하면서 문경은은 팀의 첫 우승의 주축이 되었다.
하지만 팀 내 비중 문제로 당시 삼성 썬더스의 감독이던 김동광과 갈등이 있었고, 때문에 2001-02 시즌을 앞두고 신세기 빅스(이후 SK 빅스, 현 전자랜드 엘리펀츠)의 우지원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어 빅스의 선수가 된다. 그리고 빅스에서는 조니 맥도웰과 콤비를 이루며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다음 시즌에는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지만, 빅스가 전자랜드에 인수된 2003-04 시즌에는 앨버트 화이트를 외곽슛으로 도와 주면서 다시 한 번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킨다.
2005-06 시즌에 김일두, 임효성을 상대로 서울 SK 나이츠에 현금 트레이드되었다. 체력적인 문제로 스팟 슈터 롤을 맡았어야 했는데 방성윤이 워낙 골골대는 터라 노익장을 발휘해야 했던 경기들이 많았다. 출전 시간이 길어지면 힘들어하는 모습이 역력했고 수비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이름값은 톡톡히 했다.
영구결번 선정 당시는 논란이 많았지만 SK 농구단에서 가장 오래 감독 생활을 하는 인물이 되었고 17-18시즌부터 성적도 호전되고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헤인즈 없이도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며 우승하면서 영구결번으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냈다.
4. 국제 대회
아시아선수권 등에서 일본 정도까지의 상대들과 대결할 때는 매서운 활약을 보여주는데, 중국전에서 자신보다 크면서 스피드도 비슷한 상대와 매치업되면 버로우란 표현의 예시라고 해도 될 만한 모습들만 보여줬다.
그런 이유로 양민학살용이란 평가도 있었는데, 사실 중국을 만나면 활약이 반감되는 선수가 많긴 하지만 문경은은 국내 최고의 슈터로서 받는 기대가 있었기에 좀 더 그런 평가를 받았던 측면이 있다.[8]
서장훈, 허재, 이충희 등 한국 역대 베스트5급 선수들을 모두 포함해도 중국전에 간간히 활약을 하긴 했지만, 결국 중국에 밀려서 패배하는 게 보통이었다.[9] 허재, 이충희가 국제 대회 경기에서 그나마 가끔 대활약했을 뿐, 상당수의 경우 국제 대회에서 강호를 만나게 되면 허재, 이충희도 잠잠한 경우가 많았다.
94년 세계대회에 출전했을 당시 평균 19점에 70퍼센트의 2점 야투율을 기록하고 37퍼센트의 3점슛 성공률로 전체 출전 선수 중 3점 성공률 1위를 찍는 등 좋은 활약을 했다. 이집트를 상대로 한 두 번의 경기에선 30점과 33점을 기록하기까지 했다.
기록으로 말하자면 대한민국 역사상 독보적인 국제대회 기록을 남긴 선수라고 볼 수 있는데 어느정도였냐하면, 1993년 22세 이하 세계선수권 득점1위(29.4점), 1994년 세계선수권 득점 6위(19점), 3점 1위, 2002년 아시안게임 득점 3위(20.3점), 3점슛 1위 등 한국역사를 둘러봐도 워낙 오래전이라 전설 시 되는 신동파 이후로 국제무대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슈터라 할수있다. (
결론적으로 국내 선수 중 국제 대회에서 미친 듯한 3점 슛으로 경기의 흐름을 한순간에 돌릴 수 있는 실력을 가진 독보적인 3점 슈터였다.[10][11]
[1]
당시
광신상고의 전통에 따라 경희대에 입학할 예정이었지만 당시 연세대의 감독이었던
최희암의 러브콜을 받아 연세대에 입학하였다.
[2]
고등학교에서 짱먹던 선수만 뽑아 모은 대학들이 농구대잔치에 참가했으니, 자기 고등학교에선
센터라도 대학교 팀에 모아놓고 보면 더 큰 사람도 있으니까.
[3]
키가 190에서 190cm 초반 정도 밖에 안 되는 센터도 흔했고 슈터라면 보통 180cm대 키를 가지고 있던 시절에 190cm의 키를 가진 문경은은 그야말로 센터급 키를 가진 슈터나 마찬가지라는 오해가 있는데, 그건 바로 전 시대 이야기이고
1번,
2번에 자리하던 허재의 키가 188이었고,
마지막 승부 세대에선 서장훈을 제외하고도 2미터 센터, 190대 포워드는 흔했다. 당시 대학
스몰 포워드로 유명했던
김영만
양경민
추승균이 193이고,
우지원과
김훈은 문경은과 같은 190이니, 더 이상 스몰 포워드 포지션에서 문경은이 장신의 장점을 말하긴 힘들었다. 포지션은 파워 포워드지만 실질적으로 스몰 포워드 플레이를 하던
전희철이 197이었다. 그러니 장신을 이용한 폭발적인 득점 능력을 선보였다라는 식의 기존 기술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4]
실제로는 10억 원을 받았지만, 당시 국민 정서를 의식하여 절반으로 줄여서 발표했다고 훗날 밝혔다.
[5]
여담으로 이 때 삼성전자와 입단협상 중에 내건 조건 중 하나가 자신의 여동생을 삼성전자에 취업시켜주는 것이었다. 당시가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은 시기여서 망정이지, 2020년대에 이 사실이 알려졌다면 오빠찬스 소리 들으며 안티를 양산했을 것이다(...)
[6]
당시 농구대잔치 우승에 목말라 있었던 삼성전자의 김현준은 문경은의 입단으로 은퇴를 1년 더 미뤘었다. 하지만 당대 최강팀이었던 기아자동차에 막혀 우승을 하지 못하고 은퇴한다.
[7]
삼성전자 선수들은 이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는 김현준에게 우승을 선물해 주고 싶어했었고 그러다보니 눈에 뵈는 게 없었다.
[8]
동시기에 중국을 상대로 활약한 선수로는 97년 아시아선수권 2002년 아시안게임에서 운동능력을 활용한 컷인과 3점, 그리고 포스트업과 페이스업을 가리지 않고 한국의 주득점원 역할을 해준 전희철이 있다. 이규섭 또한 93년 청소년대표 시절 왕즈즈를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이며 아시아권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2003년 아시아선수권 결승에서도 높은 타점과 슛감을 이용 3점 5개 포함 28점을 기록한바 있다. 김승현도 임팩트 있던 2002년 아시안게임 막판뿐만 아니라 2003년 아시아선수권에서도 판빈에게 막히기 전까지 중국가드들을 밀어붙인 바 있다.
[9]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간간히 활약한 경우는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전희철의 경우 국제무대에 기준으로 사이즈가 떨어지는 김영만,
추승균, 문경은에 비해 현재 기준으로도 좋은 하드웨어와 운동능력을 지니고 있고 기술도 좋은 편이라 리난 후웨이동 등의 중국 장신포워드에 맞서 꿀리지 않고 오히려 다른 국가와의 경기보다 좋은 활약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10]
문경은이 아닌 김영만과 조성원이 국가대표로 뽑히기도 하였으나 국제대회에서 고전하였고 결국 문경은이 다시 대표팀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11]
후배들 중 방성윤이 가끔 그런 활약을 해줬고, 귀화 선수 문태종은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우승을 이끌 때 대활약을 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