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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제7대 황제
무함마드 아잠 샤 قطب الدین محمد اعظ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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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4A5D23><colcolor=#fff,#fff> 이름 |
쿠트브 웃 딘 무함마드 아잠 قطب الدین محمد اعظم |
출생 | 1653년 6월 28일 |
무굴 제국 부르한푸르[1] | |
사망 | 1707년 6월 20일 (향년 53세) |
무굴 제국 자주[2] | |
재위 기간 | 무굴 제국 황제 |
1707년 3월 14일 ~ 1707년 6월 20일 (3개월) | |
대관식 | 1707년 3월 14일 |
전임자 | 아우랑제브 (제6대) |
후임자 | 바하두르 샤 1세 (제8대, 이복형) |
부모 |
아버지 :
아우랑제브 황제 (1618 ~ 1707) 어머니 : 딜라스 바누 베굼 (1622 ~ 1657)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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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굴 제국의 제7대 황제.아버지 아우랑제브에 의해 후계자로 봉해졌고, 1707년 3월에 아우랑제브가 죽자 황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복형 바하두르 샤 1세가 이에 불복해 반란을 일으켰고 그해 6월에 자주 전투에서 전사하며 즉위한 지 겨우 3개월 만에 죽은 비운의 황제로 남았다. 이 때문에 초대 바부르 때부터 이어져온 제위 부자승계가 무함마드 아잠 샤의 대에서 끊겼다.
2. 생애
무함마드 아잠 샤는 1653년 6월 28일 부르한푸르에서 황제 아우랑제브와 그의 첫째 아내인 딜라스 바누 베굼 황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딜라스 바누 베굼 황후는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 황족 출신의 고귀한 출신이었고, 덕분에 무함마드 아잠 샤는 부계 쪽으로는 티무르 제국의 혈통을, 모계 쪽으로는 페르시아 황제의 혈통이라는 어마어마한 핏줄을 타고났다. 무함마드 아잠 샤는 스스로 이 점에 대해서 엄청나게 자랑스러워했다. 특히 그의 이복형제들은 모두 그보다는 하층민의 핏줄을 타고 났다. 샤 알람, 즉 훗날의 바하두르 샤 1세, 무함마드 칸 바크쉬 등은 힌두교도 어머니를 두고 있었고, 아무래도 혈통을 중시했던 무굴 제국에서 페르시아와 티무르의 혈통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상당한 이점이었다.아잠 샤는 자랄 수록 타고난 지혜 덕분에 뭇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아우랑제브는 제 아들 중에 유난히 명석한 후손이 탄생했다는 데에 기뻐하며 그에게 막대한 지원을 해주었고, 나중에는 아잠 샤를 거의 동료 급으로 여기면서 국정에 참여시키기도 하는 등 거의 반쯤 후계자로 지정해놓았다. 1685년에는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5만 명의 대군을 데리고 비자푸르의 시칸다르 샤를 공격했지만 워낙 거센 저항에 실패하고야 말았다. 이에 격분한 아우랑제브는 1686년 9월에 직접 대군을 이끌고 비자푸르에 친림했고, 도착한 지 8일 만에 비자푸르를 함락해버렸다.
비자푸르 함락에는 실패했지만 아우랑제브는 여전히 그를 중용했다. 1678년부터 1701년까지는 베라르, 말와, 벵골 지방을 총괄하는 부왕으로 재임했고 1679년 2월에는 캄룹 지방을 정복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는 지금의 방글라데시인 벵골 동부 지방의 다카에 랄바그 요새를 짓는 등 나름 선정을 펼쳤고, 1701년에는 벵골에서 이임하여 구자라트 지방의 나와브로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1707년, 임종이 가까워짐을 직감한 아우랑제브는 미리 후계자로 점찍어둔 무함마드 아잠 샤에게 제위를 넘긴다는 내용의 편지를 쓰고 세상을 떠난다. 아잠 샤는 아버지의 시신을 매장하고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했다. 하지만 그의 제위를 형제들은 인정하지 않았고,[3] 결국 샤 알람 왕자가 1707년 6월 8일 자주 전투에서 그를 전사시켜버리면서 겨우 3개월 만에 사망했다.[4] 이후 샤 알람 왕자는 바하두르 샤 1세로 즉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