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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6 22:33:55

모하맛 하타

<colbgcolor=#C13130,#ffffff><colcolor=#ffffff,#dddddd> 인도네시아 공화국 제1대 부통령
모하맛 하타
Mohammad Hatta
파일:440px-VP_Hatta.jpg
출생 1902년 8월 12일
네덜란드령 동인도 서수마트라 부키팅기 포르트더콕
사망 1980년 3월 14일 (향년 77세)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재임기간 제1대 인도네시아 공화국 부통령
1945년 8월 18일 ~ 1956년 12월 1일
국적
[[인도네시아|]][[틀:국기|]][[틀:국기|]]
학력 에라스뮈스 대학교
종교 이슬람교
직업 정치인
소속

[[무소속(정치)|
무소속
]]
서명
파일:Signature_of_Mohammad_Hatta.png
1. 개요2. 출생과 교육3. 정치 활동
3.1. 학생 시절3.2. 귀국과 독립 활동3.3. 부통령 활동과 은퇴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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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하맛 하타는 인도네시아의 정치인, 경제학자, 저술가다. 네덜란드에서 유학한 토착민 엘리트 출신으로 유학 시절부터 인도네시아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

식민지 시대 말기부터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시기까지 의회민주주의를 옹호한 자유주의자, 실력양성론자 하타는 대중 동원적 좌익 민족주의 수카르노, 반권위주의적 사회민주주의자 수탄 샤리르(Sutan Sjahrir), 그리고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 탄 말라카(Tan Malaka)와 함께 인도네시아 독립 운동에서 이론적, 실천적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독립 운동가 가운데 하나였다.

이원집정부제적 요소가 있는 의원내각제로 운영되었던 독립전쟁기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부에서는 인도네시아 사회당의 수탄 샤리르(1대), 아미르 샤리푸딘(2대)에 이은 무소속 3대 총리(1948년 1월 29일 ~ 1949년 12월 20일)를 맡아 독립파가 수세에 몰린 힘든 상황에서 국정을 이끌었다. 자바계가 다수이던 공화국 정부에서 하타는 수마트라의 미낭카바우계로서 마찬가지로 미낭카바우계인 수탄 샤리르 등과 함께 비자바계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와 같은 하타의 입지는 독립 이후까지 이어진다.

독립전쟁이 끝난 후 수립된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에서도 총리 겸 외무부 장관을 맡았다. 공화국 단일 국가 시대에는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어 1950년부터 1956년까지 재직했다. 인도네시아에서 하타는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며, 인도네시아 정부가 지정한 인도네시아 국가 영웅이기도 하다. 수카르노 하타 국제공항에도 수카르노와 함께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

2. 출생과 교육

하타는 서수마트라 부키팅기(Bukittingi)의 미낭카바우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생후 8개월 때 사망했기 때문에 하타는 어머니의 가족과 함께 자랐다. 어머니 가문은 부유해 하타의 공부를 지원할 수 있었고, 하타는 어려서부터 말레이어 외에도 네덜란드어를 배웠다. 학교에 다니면서 방과 후에는 짬짬이 코란도 배웠다.

3년제 말레이어 초등학교를 다니고 졸업했지만 중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7년제 네덜란드어 초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했다. 1913년에 네덜란드어 초등학교에 편입해 1916년 졸업했다. 하타는 이때 바타비아에 있는 고등시민학교(HBS, 5년제 중고등 통합학교) 입학 시험을 통과했지만, 가족들이 어린 하타가 멀리 떨어진 곳으로 혼자 가는 것을 만류해 일단 1917년 파당에 있는 중학교(MULO)에 진학했다. 그런 후 1919년에 바타비아의 고등시민학교로 옮겼고, 1921년에 졸업했다.[1]

성적이 뛰어났던 하타는 네덜란드로 유학을 갈 기회를 얻어 로테르담 에라스뮈스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1932년 당시 네덜란드 구학제상 예비박사(Doctorandus, 오늘날 영미권의 석사 학위에 대응함) 학위를 취득했다. 유학생 시절 하타는 정치 활동에 깊이 관여해 체포와 옥살이를 겪었으므로 학위 취득은 다소 늦었다. 이후 박사 과정에 진학해 학점을 채웠지만, 정치 활동으로 바빠져 박사 논문은 쓰지 못했다.

3. 정치 활동

3.1. 학생 시절

1920년대 하타는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는 인도네시아인 유학생 단체인 인도네시아 협회(Perhimpoenan Indonesia)의 총무(1922~1925)와 회장(1926~1930)을 맡았다. 하타는 회장 취임 연설에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지지하며 이를 얻기 위해 네덜란드 식민 정부와 협력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후 하타가 이끄는 인도네시아 협회는 학생 단체에서 인도네시아 독립을 지지하는 정치 단체로 변모했다. 하타는 이때 인도네시아 독립을 지지하는 《자유 인도네시아》(Indonesia Merdeka)라는 잡지의 편집장으로도 활동했다.

토착 엘리트 계층이었던 인도네시아인 유학생들이 보인 이와 같은 태도 변화에 네덜란드 당국은 경악했으며, 1927년 6월 하타와 인도네시아 협회의 다른 네 지도자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하타는 감옥에서 6개월 동안 갇힌 후 헤이그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이때 재판정에서 하타는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의 협력을 지지하지만 이는 양국이 대등한 파트너로 서로를 대할 때만 가능하며, 현재 인도네시아의 이익은 네덜란드의 이익과 상충하므로 식민지인인 자신은 네덜란드에 협조할 수 없다는 내용의 민족주의적 연설을 했다. '자유 인도네시아'(Indonesia Vrij)라는 이름의 이 연설로 하타는 정치범으로 옥살이를 했지만, 민족주의 지도자로서 하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네덜란드 모두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1929년 하타는 풀려났고, 1932년 7월 인도네시아(네덜란드령 동인도)로 귀국했다.

3.2. 귀국과 독립 활동

하타가 귀국한 당시 동인도의 인도네시아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한 인도네시아 국민당(PNI)은 지도자 수카르노의 투옥과 식민 정부의 당 해산으로 인해 분열해 있었다. 대다수였던 국민당 대중파는 사르토노(Sartono)를 따라 인도네시아당(Partindo)을 결성했지만, 하타는 수탄 샤리르(Sutan Sjahrir)와 함께 인도네시아 국민교육당(Pendidikan Nasional Indonesia, PNI Baru)을 결성했다. 1932년 수카르노가 풀려나자 인도네시아당과 국민교육당 중 어디를 선택할지가 문제가 되었다. 수카르노는 민족주의 독립운동의 통일 전선을 원했으므로 두 당을 다시 합치려고 시도했지만 의견 차이로 실패했다. 그 후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당으로 합류했고, 하타는 1930년대에 국민교육당 활동을 하면서 실력양성론을 펼치며 대중 동원에 집중하는 인도네시아당을 비판하며 일시적으로 수카르노의 정적이 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식민 정부 입장에서는 인도네시아당과 국민교육당 둘 모두 인도네시아 독립을 지향하는 반체제 정당이었다. 수카르노는 1933년 8월 다시 체포되어 12월 플로레스 섬으로 유배되었다. 1934년 2월에는 하타를 포함한 국민교육당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1935년 1월 하타와 수탄 샤리르는 악명 높은 서뉴기니 보벤디굴(Boven-Digoel) 정치범 수용소에 갇혔다. 1936년 1월 둘은 다시 말루쿠 제도의 반다네이라(Bandaneira)로, 1942년 2월 서부자바 수카부미(Sukabumi)로 옮겨졌다. 하타는 오랜 수감 생활 동안 경제, 철학, 역사 등에 관한 많은 책을 저술했고, 신문에 여러 기사를 실었으며 수감지에서 현지 어린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일본군이 동인도를 침공하고 점령하여 일본령 동인도 시기가 시작되자 수카르노, 하타, 샤리르는 일본군에 의해 풀려났다. 여기서 하라다 구마키치(Kumakichi Harada)가 이끄는 일본 군정은 저명한 수카르노와 하타에게 일본과 협력할 것을 요청했다. 둘은 수락했고, 차츰 전전의 노선 대립을 해소했다. 샤리르는 협력하지 않고 일본군에 대한 지하 저항 활동을 후원했다. 하타는 일본군에 표면상 협력하면서도 계속해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주장했다. 일본은 1944년 9월 패배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마침내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승인하기로 하고, 수카르노와 하타 등 현지 지도자들을 위촉해 독립 준비 기구를 조직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한 직후, 1945년 8월 17일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직후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독립전쟁이 시작된 후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부는 1945년 11월, 하타의 주도하에 정부 수반이 대통령에서 총리로 바뀌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타와 많은 독립 운동가들은 네덜란드식 의원 내각제를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하타는 공화국 정부에서 수카르노, 샤리르와 함께 외교적 해법을 모색하는 온건파의 중심 인물 중 하나였고, 무력에 보다 의존하기를 원하는 급진파를 달래려고 노력했다. 1948년 하타는 아미르 샤리푸딘(Amir Sjarifuddin)이 사임한 후 총리가 되었지만, 네덜란드에 의해 군사적 열세에 놓인 상태에서 인기 없는 결정들을 내려야 했다. 네덜란드 2차 공세 상황에서는 네덜란드에 의해 수카르노와 하타가 체포되었다. 협상으로 최종적으로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이 성립하자 하타는 다시 총리를 맡았다.

3.3. 부통령 활동과 은퇴

1950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이 소멸하고 인도네시아가 다시 단일 국가 체제가 되자 하타는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실권이 없는 의원 내각제 체제에서 부통령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이 시기에 하타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거나 저술 활동을 했다. 인도네시아 국정에 관해 하타의 핵심적인 기여는 인도네시아의 향후 외교에 관한 대원칙을 주도적으로 수립한 것이었다. 하타는 인도네시아가 냉전에서 미국 소련 중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고 인도네시아 자신의 이익에 집중해야 한다고, 그러나 동시에 세계 정치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독립적-능동적 외교라는 두 가지 대원칙은 제3세계로서 인도네시아 외교의 근간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인도네시아 외교의 근본 원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의회민주주의를 옹호했던 하타는 권위적으로 변하는 수카르노에게 실망하고 1956년 12월 1일 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그 뒤로 수카르노의 '교도민주주의' 독재가 시작되자 하타는 수카르노를 다시 한 번 가혹하게 비판했다.

4. 여담

수하르토는 그의 통치기에 그를 격하시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수카르노와 그가 가까이 하던 사람들만 격하되었다.

1998년부터 현재까지 최고액권 10만루피아권의 도안으로 수카르노와 함께 등장하고 있다.
[1] 하타가 다닌 바타비아의 빌럼 3세 고등시민학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있었던 20개 남짓한 고등시민학교 중 가장 역사가 긴 명문으로 꼽히는 곳(1860년에 개교함)이었다. 19세기에 개교한 수라바야와 스마랑의 고등시민학교도 다음 수준의 명문이었는데, 수카르노가 수라바야 고등시민학교를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