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00:37:25

모농가 광산 참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파일:모농가 광산 참사.jpg

1. 개요2. 사고 이전3. 사고 내용4. 사고 이후

1. 개요

Monongah mine disaster

1907년 12월 6일,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메리온 카운티의 모농가에서 일어난 광산 폭발사고.

2. 사고 이전

19세기 후반, 그동안 미국에서 많은 석탄 생산량을 자랑해왔던 웨스트버지니아 주는 다른 주에서도 석탄 생산량이 월등히 높아지자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이에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광산들도 더 빨리, 더 많이 석탄을 캐기로 했고, 그러면서 점차 안전규정도 무시하게 됐다. 환풍구를 관리 안해 광산 내부에 분진과 가스가 쌓이고, 광산을 지탱하는 나무 기둥은 썩어서 부러질 때 까지 방치하기도 했다.

모농가는 당시 페어몬트 석탄 회사(Fairmont Coal Company)소유의 광산으로 먹고 살았는데, 사실 단순 먹고 사는 정도가 아니고, 마을 자체가 페어몬트 석탄 회사가 설립한 마을이었다. 마을 내의 대부분의 성인 남성이 광부였다. 페어몬트 석탄 회사 매니저가 모농가 시장으로 겸직할 정도였다. 광산은 가스등이 아닌 전등으로 내부를 밝히고, 기계로 작업을 하는 등 당시로썬 최신 기술을 썼다.

모농가의 광산 중에선 6번 광산과 8번 광산의 석탄 생산량이 굉장히 좋았다. 그만큼 광부들도 많이 몰린 곳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만큼 이동을 편하게 하고, 돈도 아낄 겸 두 광산을 연결하는 터널을 뚫었다. 이러면 사실상 큰 광산 하나가 되다보니 환풍기를 덜 설치해도 됐다. 하지만 덜 설치하는 만큼 유독가스가 쌓이는 속도가 빠르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유럽 전역과, 웨스트버지니아 주를 제외한 미국 모든 지역에선 광산과 광산을 연결하는 통로릏 뚫는게 불법이었다. 페어몬트 석탄 회사는 이 사실을 알고도 환풍구를 새로 설치하거나 하지 않았다. 석탄 가루를 가라앉히기 위한 물 호스도 적었다.

3. 사고 내용

사고 당일, 기록상 광부 420명이 광산 내에서 일하고 있었다. 기록상으로만 이렇고, 실제로는 더 많았다는 의견도 있다. 이 외에 광부들의 가족들도 광산 주변에 모여있었다.

오전 10시 28분, 6번 광산과 8번 광산을 연결하는 통로 인근에서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로 땅이 흔들려 인근 말들이 넘어지고, 마을 유리창이 깨질 정도였다. 이윽고 폭발이 다시 일어나며 광산 입구가 무너지고 환풍기가 고장났다. 환풍기가 고장나자 광산 내부엔 일산화탄소 질소가 급격히 쌓이기 시작했다. 광부들은 어떻게든 살려고 옷을 벗고 입 주변에 둘렀다. 하지만 단순 유독가스가 쌓이는 것 외에 산소마저 급격히 줄어드는 상황이라 소용없었다.

구조대가 출동했지만 안에 유독가스가 너무 많아 함부로 들어갔다간 구조대들도 죽을 상황이었다. 구조대들은 들어가서 최대 15분만 있다가 나와야 했다. 6번 광산의 환풍기를 간신히 고치는데 성공했으나 가스가 빠지는데 시간이 걸려 구조는 계속 지연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구조되는 수는 적고, 시신을 수습하는 일이 더 잦아졌다. 시신은 인근 모농가 은행에만 임시로 안치하다, 은행이 꽉 차버리자 길거리에 관을 놓고 안치하기에 이른다.

사고로 최소 362명이 사망했다. 기록에 따라 더 오르기도 한다. 사망자 중 171명은 이탈리아에서 온 이민자들이었고, 그 외에 러시아, 그리스, 헝가리 그리고 오스트리아 출신 이민자들도 있었다. 216명의 여인은 사고로 남편을 잃었고, 아이 475명은 아버지를 잃었다. 이 중 31명은 유복자가 됐다. 대다수의 사망 원인은 유독가스에 의한 질식사였다. 1907년에만 미국인 중 3,242명이 광산 사고로 목숨을 잃었는데, 이 중 대략 9분의 1이 이 사고 피해자인 셈이다.

사고는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목숨을 앗아간 광산 사고로 남았다.

폭발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전기 합선이라는 설, 한 광부가 램프를 떨어뜨려 깨지는 바람에 일어났다는 설이 있다.

4. 사고 이후

앤드루 카네기는 사고 당시 구조대원과 유가족들에게 자금을 지원해줬다. 적십자에서도 사고 소식을 듣고 도우러 왔다. 또 사고 소식을 듣고 여러곳에서 모금이 모여 무려 156,000달러가 모였다.

1910년, 정부에선 광산 관련 안전 규정을 개로 만들었다. 수많은 광산 사고들을 분석해 사고 원인을 줄이고 예방책을 내놓았다. 광산에선 광부들에게 구조 방법과 대피 방법 등을 반드시 교육하게 했다.

사고 이후 모농가는 급격히 쇠퇴했다. 2023년 기준, 모농가의 인구는 1000명도 안된다.

사고 현장 인근엔 사망자를 기리는 추모비 #, 그리고 사고로 가족을 잃은 이들을 기리는 비석 #이 세워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