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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1 18:08:20

명교(김용)

1. 개요2. 상세
2.1. 계율
2.1.1. 삼대령2.1.2. 오소령2.1.3. 그 외 계율
2.2. 좌우광명사자(左右光明使者)2.3. 사대호교법왕(四大護敎法王)2.4. 오산인(五散人)2.5. 오행기(五行旗)2.6. 천응기(天鷹旗)2.7. 사문(四門)2.8. 그 외 신도2.9. 기타

1. 개요

明敎.
섬기는 신은 명존(明尊)으로 곧 마니이다. 의천도룡기에 등장하는 마니교와 백련교를 모델로 한 가공의 종교이다.[1]

2. 상세

교도들은 대운광명교를 줄여서 명교(明敎)라고 지칭하였다. 후에 비밀교단이 되고 모든 행사가 신비에 싸여 기괴한 모습을 보이자, 일반 사람들이 마니교의 마(摩)를 마(魔)자로 바꿔 부른 탓에 마교(魔敎)로 와전된다.

당나라 무종 때 조정이 명교 교도를 주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명교는 국법으로 금지된 비밀 교단이 되었다.

북송 때 교주 방랍(方臘), 남송때 교주 왕종석(王宗石), 여교주 여오파(余五婆), 교주 장삼창(張三槍) 등이 조정 관부에 대항하여 의거를 일으켰다.

북송 휘종 황제가 구음진경의 저자 황상에게 명교를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었다. 명을 받든 황상이 명교를 토벌하려다 처음에 명교의 실력에 밀려 패배하게 된다. 분을 못 이긴 황상은 직접 명교의 사자와 법왕 등에게 도전해서 죽였는데 이 자들중에 무림문파 인물들이 섞여 있었다. 황상에게 원한을 품은 무림문파들은 무림의 법도대로 황상을 처리하여 집단으로 공격한다. 황상은 중과부적으로 도망가게 되고, 무림인들은 황상의 가족들을 모두 죽여버린다. 일가족이 살해당한 황상은 명교에 직접 복수하기 위해 오랜세월 무공을 수련해서 노년의 나이에 명교에 복수하려 나서나 원수들은 거의 죽어버려 남은건 당시 10대 소녀가 이미 노파가 되어버렸다. 인생무상을 느낀 황상은 이제 자신의 수명도 얼마 남지 않음을 느껴 그동안 수련한 무공을 집대성한 구음진경을 저술하고 세상을 뜬다. 그리고 이를 노리는 무림인들끼리 쟁탈전이 일어나 화산논검부터 신조협려까지 구음진경은 무림을 뒤흔드는 기서가 되었다. 거의 백년간 무림의 평지풍파에 명교가 만악의 근원인 셈이다. 다만 이때에는 무림의 명문정파[2] 제자들도 명교에 입단했다고 하니, 의천도룡기 시절처럼 으르렁거리는 사이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화령(聖火令)을 신물로 삼아 대대로 교주에게 전해져왔는데, 31대 석(石) 교주가 성화령을 잃어버린 탓에 32대, 33대 교주는 실력으로 권력을 유지할 뿐이었다. 또한 교주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무공인 건곤대나이가 있다.

본산 광명정(光明頂)은 서역에 있으며 일곱 개의 산봉우리와 열세 군데의 절벽으로 막혀 있어서 천험의 요새이다. 성화봉에는 명교에서 신성시 하는 성화(聖火)를 태우고 있다.

32대 의(衣) 교주는 양정천에게 건곤대나이 신공을 익혀 성과가 있다면 페르시아로 가서 성화령을 모셔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페르시아의 명교 총교단은 중원 명교에 원나라에 투항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거기에 따르지 않고 저항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33대 교주 양정천(陽頂天)이 죽은 이래로 교주를 세우지 못하여, 서로 내분을 일으켰으며 그 때문에 조직이 분열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분열되어 내부통제가 되지 않아 조직원들이 각지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특히 사손이 개인적인 이유로 무림 이곳저곳에서 살인을 일삼고 다닌 탓에 명교의 이미지는 추락, 거의 무림 전체에게서 멸시받는 진짜 마교가 되어버렸다. 분열된 조직으로 천응교와 미륵종(彌勒宗)이 있다.

34대 교주는 장무기. 장무기는 교주 자리를 사임한 이후, 양소, 범요, 팽영옥에게 교주 임무를 잠정적으로 대행하게 하고 후임 교주는 나중에 유능하고 어진 인재를 가려서 추대하게 했다.

명문 정파의 무림인은 물론이고, 녹림이나 사파의 무리들에게도 멸시받고 있다. 하지만 소림사에서 여러 군웅들이 장무기의 지시에 따라 몽골 2만 정예군에게 승리를 거둔 이후, 명교는 중원의 영웅호걸지사를 영도하는 우두머리가 되어 한족의 중흥 대업을 이룩하게 된다. 주원장이 딴마음을 먹고 간교한 술책과 모략으로 황제 자리에 올랐으나 명교 교주의 지위를 도모하려던 뜻만큼은 끝내 이루지 못했으며, 그를 도와 천하 강산을 되찾게 해준 세력이 명교 출신이라 주원장은 국호를 '명(明)'이라 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건국 이후 명교가 백성을 감싸돌며 저항하자, 명나라 관부에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을 당했다. 그리고 후대의 수령들은 무능하여 명교 세력은 끝내 쇠퇴의 길을 걸었다.

33대 교주 양정천 시절의 명교는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는데, 군사적 훈련을 받고 단합이 잘 되어 있는 수하 병력은 그렇다치고 좌우광명사자와 사대호교법왕은 하나같이 막강한 고수들로 이 여섯 명의 위용은 무당칠협보다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지 않다.[3] 교주인 양정천의 실력 역시 당대에 장삼봉을 제외하면 상대가 없다고 할 정도로 고강했으며,[4] 좌우광명사자와 사대호교법왕 휘하의 오행기와 오산인 모두 상당한 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양정천 사후 사분오열한 명교에 비하면 저 때야말로 명교 세력의 절정기였다고 부를 만하다.

2.1. 계율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며 중생이 평등하게 살게 해주는 데 있다. 금은 재물이 생기면 가난한 중생을 구제하는데 사용한다.

옷깃에 붉은 불꽃 무늬를 수놓는 풍습이 있으며, 인사를 할 때도 양손을 모아 불꽃 형상을 만든다.

2.1.1. 삼대령

  1. 명교 신도는 누구를 막론하고 벼슬아치나 군주 노릇을 하지 못한다. 크건 작건 어떤 벼슬도 맡아서는 안되고, 군주가 되어서도 안된다. 조정에서 하사하는 토지, 금은보화도 받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오직 초야에 묻힌 자만이 백성을 위하여 관부에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며, 누구든 벼슬아치나 군주가 되면 민초를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이민족의 군주나 제왕을 상대로 저항할 때, 왕후 장상을 잠정적으로 쓸 수는 있지만 대업이 이루어진 후에는 은퇴하여 평민이 되어야 한다.
  1. 백성을 학대하거나 해쳐서는 안 된다. 식량과 재물은 백성들이 우선 먹도록 하고, 신도는 나중에 먹는다. 모자라면 백성을 먼저 먹이고 신도는 굶는다. 신도와 백성 간에 분쟁이 일어났을 경우, 백성에게 상해를 입히면 신도의 죄가 더 무겁고 쌍방 모두에게 허물이 있으면 신도를 우선적으로 벌한다.
  1. 신도들끼리 서로 다투거나 싸워서는 안된다. 서로 욕을 하면서 말싸움을 해도 금령을 범한 것은 아니지만, 누구든지 상대방을 구타 할 경우에는 즉시 금령을 위반하는 것이다. 신체와 인명을 살상하면 더욱 죄가 무겁다. 분쟁이 있을 경우, 상급 기관에 넘겨 시비를 가리고 판결이 내려지면 명에 복종하여 우호관계를 회복한다.

2.1.2. 오소령

  1. 신의를 지킨다. 입 밖에 낸 말은 반드시 지키고 신용을 잃어서는 안되며, 외부 인사들에게도 신의를 지켜야 한다.
  2. 신도들은 형제자매의 정으로 맺어져야 하며, 우애와 의리를 중시하고 생사를 가리지 않는다.
  3. 웃어른을 존경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재간에 우애하고, 친구간에 서로 돕는다.
  4. 부녀를 존중하며 경박하게 희롱하지 않는다.
  5. 명교를 목숨처럼 중히 여긴다. 웃어른의 명령은 힘써서 행하고, 배교자나 적과 내통한 자는 죽인다. 외부 인사들에게는 온화한 태도로 겸손하게 대하고, 함부로 실례를 범하여 본교의 적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2.1.3. 그 외 계율

장무기가 명하기 전부터 명교 제자들 역시 대체로 융통성있게 이 규율을 무시해 왔다. 작중 유일하게 이 규칙을 준수한 것은 상우춘 정도다.

2.2. 좌우광명사자(左右光明使者)

명교 교주를 보좌하는 최고 직책으로, 교단의 중대사는 모두 이들이 맡는다. 신도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이며, 신앙과 실력, 인품 등등 모든 면에서 교주 다음이라 할 수 있다.

2.3. 사대호교법왕(四大護敎法王)

외부로부터 명교를 수호하는 수장들이며, 동서남북 각 방면을 맡아 교주의 무력을 대행한다. 오행기와 더불어 명교의 힘의 상징이다.

2.4. 오산인(五散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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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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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판. 왼쪽부터 냉겸, 설부득, 팽화상, 장중.

모두 명사 열전에 수록된 인물이며, 설부득은 오대 양 나라 때 미륵불의 화신이라 일컫던 포대화상을 인용하여 등장시킨 인물이다.

장중은 무쇠로 만든 관을 쓰고 다니며, 음양학을 배워 점을 쳤다는 기인. 주전은 미치광이가 되어 허튼 소리를 지껄이며 거지가 되었다가, 주원장을 만나 그의 휘하가 되어 진우량을 토벌할 때 작전시기와 전술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헛소리로 군심을 어지럽히자 주원장이 죽이려 했으나, 불에 태워도 물에 빠지지도 않고 다시 주원장을 찾아왔으며 후에 선인이 되었다고 한다.

냉겸은 음률에 능통하여 명나라에서 태상시 협률량을 지낸 음악가다.

팽영옥은 명나라 말기 홍건군의 우두머리 중 한명이다.

참고로 설부득과 냉겸은 살인을 꺼리지만 나머지 오산인들은 아무 꺼리낌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자들이라고 한다.

의천도룡기 내에서는 명교에서 사대호교법왕 바로 밑의 직급에 해당하는 고위직의 간부들로, 주로 교단 내부의 일들을 처리한다. 전원이 좌우광명사자나 사대호교법왕보다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상당히 강한 무공을 가진 고수들이다. 무공보다는 책략과 병법, 경리, 방첩, 의전, 행정 등등 각각의 주특기가 뚜렷하여 명교가 위세를 회복할 때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다.

2.5. 오행기(五行旗)

각각 오행(五行)에서 따온 병기를 사용한다. 명교는 오랫동안 한족들을 중심으로 원나라 조정을 상대로 각지에서 반군활동을 하고 있으므로, 총본부에서도 전면전에 대비하여 전문 전투부대를 양성하였다. 관군 못지 않게 잘 훈련되어 있으며, 명교의 진정한 무서움을 가진 조직으로 무림의 문파라기보다는 사실상 군대에 가까운 조직이다.

몽골에 대한 항쟁을 시작하면서 전력이 확충되어 숫자만 2만여명에 달하게 되었고, 도사 영웅대회에서 소림사에 집결한 정예부대만도 각 대 당 500명에 달하게 되었다. 장무기가 교주가 되어 원나라와 전면전을 선언하자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조정의 군대도 제압하지 못하는 수준에 이른다.

소림사에서 그 위용을 보인 다음, 영웅대회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몽골 군대와도 싸워서 큰 공을 세웠다.

각 기 단위로 장기사(掌旗使)와 장기부사(掌旗副使)가 있다.

2.6. 천응기(天鷹旗)

장무기가 교주로 취임하면서, 은천정 천응교가 명교로 돌아와 명교와 합치게 된다. 천응기는 구(舊) 천응교 신도와 조직을 재편한 것이다. 장기사는 본래 천응교 천시당 당주였던 이천원이다. 상당한 규모를 자랑하던 천응교의 전 인원이 규합했기 때문에 그 숫자는 가장 많다. 이쪽도 오행기 못지 않게 잘 훈련된 부대로서 큰 활약을 한다.

2.7. 사문(四門)

양소의 직속 친위대. 각각 문주(門主)의 통솔 아래 놓여 있다.

2.8. 그 외 신도

주원장, 상우춘, 서달 등 원말명초의 한족 군벌 세력이 대부분 명교에 소속해 있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韓林兒)는 성곤의 부하이자 개방의 8대 장로로 가담해있던 진우량에게 잡혀 한산동을 회유하는 인질로 쓰일 뻔 하다가, 장무기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한동안 그를 따라다니기도 했다. 이후 역사대로 한산동이 전사하자 황제로 추대되어 국호를 송(宋)이라 삼고 용봉황제(龍鳳皇帝)의 자리에 올랐으나, 권력을 잡은 주원장의 음모에 암살당하고 만다. 장무기는 그가 억울한 죽음을 맞았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몽골족을 몰아낸다는 대업을 이루기 위해 주원장을 벌할 수 없는 것을 원통하게 여겨 후에 교주를 사임할 뜻이 강해지게 되었다.

2.9. 기타

한성수의 파문제자가 여기 나오는 설정을 그대로 썼다. 다만 작품 특성상 명교 소속 인간 중에 멀쩡하게 나오는 인간은 한놈도 없고 전부 속이 시커면 야심가들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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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 마니교가 명교라고 불렸다. [2] 원문에서는 '명문대(大)파'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명문 소리를 듣는 큰 방파들은 정파로 인정받기도 하니 명문정파와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3] 무당칠협은 머릿수가 하나 많고 서로 절친한 관계이자 사이도 끈끈하다는 강점이 있다면, 명교의 6대 고수들은 사이는 비교적 데면데면하지만 각자 실력이 무당칠협의 대사형인 송원교 수준으로 대등하게 뛰어나다는 강점이 있다. 사손의 회상에도 사대법왕은 각자의 장기가 있어 우열을 가리기 쉽지 않았고, 좌우광명사자인 양소와 범요 역시 사대법왕 동격, 이상으로 대접받는 고수들이었다. [4] 단 사대신승의 으뜸가는 실력자였던 공견대사와의 우열은 알 수 없다. 공견대사는 사손보다 명백하게 한 수 위의 고수였으며 사손의 생각에도 공견대사가 살심을 품었다면 사손은 첫 만남에서 분명히 결딴이 났을 것이었다. [5] 단역이지만 꽤나 강렬했던 인물로 낭아봉을 매우 잘 썼다. 무림 내에서 강하기로는 손꼽히는 아미파 장문 멸절사태와 대등하게 맞섰을 정도의 무공실력을 자랑했으며, 오히려 위력으로 멸절사태를 압도하였다. 멸절사태가 그런 장쟁을 죽일 수 있었던 건 의천검의 힘을 빌린 덕분이다. 때문에 예금기의 형제들은 광명전 전투때 의천검 없이 장무기와 겨뤄보라며 멸절사태를 디스했다.양정천 실종 후 교주자리를 놓고 벌어진 수뇌부의 권력다툼 때 오행기까지 끼어들었다는 얘기가 있는데 무공실력으로 가늠하면 이 장쟁이 끼어들었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