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어머니는 로이힐린의 조카였다. 하이델베르크와 튀빙겐 대학에서 수학하고 1518년에 비텐베르크 대학의 그리스어 교수가 되었다. 이 대학에서 르네상스 정신을 가르치면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떠올랐다. 곧 루터의 교리에 매혹되었고, 루터의 가르침을 보다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형태로 가다듬었다. 1519년 라이프치히 논쟁에 가담했고, 1521년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유폐되어 있는 동안 종교개혁 운동의 새로운 지도자로 활약했다. 그는 스파이어 의회에도 참석했으나, 츠빙글리의 성찬식 교리에는 반대했다. 아우크스부르크 의회에서도 주도적 인물로 활약했다. 타협적인 성품을 갖고 있어서 그에게 거는 평화와 통일의 희망이 아주 높았다. 1537년 슈말칼덴 조약에 서명하면서, 가톨릭교회가 개혁을 단행한다면 교황제를 받아들이겠다는 양보 조항을 내놓았다. 만년에는 작센 교회를 거의 감독제 형태로 전환시키는데 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