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000><colcolor=#fff,#dddddd> 메리 앨런 Mary Allen OB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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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메리 소피아 앨런 Mary Sophia Allen |
출생 | 1878년 3월 12일 |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카디프 | |
사망 | 1964년 12월 16일 (향년 86세) |
영국 잉글랜드 크로이던 버드허스트 요양원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아버지 토마스 아이작 앨런 형제자매 9명 |
종교 | 개신교 -> 로마 가톨릭[출처] |
직업 | 여성운동가, 경찰, 정치인, 동물보호자 |
소속 | WSPU, 영국 파시스트 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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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여성운동가이자 파시스트 및 경찰. 반해부론자이기도 하다.2. 생애
2.1. 초년기
메리 앨런은 1878년 3월 12일 첼트넘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의 총책임자였다. 일링의 프린세스 헬레나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그녀는 애니 케니를 만나 WSPU에 가입하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참정권 운동을 그만두던지 집을 떠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였고, 최종적으로 그녀는 집을 떠나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계속해서 금전적으로 그녀를 지원했다.2.2. 참정권 운동
메리 앨런은 창문에 돌을 집어던지는 전술을 개발한 인물이다. 1909년 6월 30일,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은 다우닝가로 행진하여 총리의 집 창문에 돌은 던졌고 이 일로 27명의 여성 운동가가 체포되어 홀로웨이 교도소로 이송되게 된다.메리는 1909년, 하원 대표단에 참여했고, 그곳에서 체포되어 홀로웨이에서 한 달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풀려난 후 그녀는 Cardiff 에서 WSPU 조직자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두 번째 대표단에서 내무부 창문을 깨고 다시 체포되어 투옥되었지만, 형사 수감자 신분이 아닌 정치적 수감자 신분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을 한 후 조기에 풀려났다. 메리 앨런은 에멀린 페식-로렌스에게 단식 투쟁 메달을 최초로 수여받게 된다.
그녀는 윈스턴 처칠이 방문했을 때 브리스톨 자유주의 클럽의 창문을 깨뜨린 혐의로 브리스톨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그녀의 동료 수감자 메리언 월러스-던롭은 내무부 장관 글래드스톤 씨에게 정치적 범죄로 기소된 사람에게 어울리는 1구획에 배치해 달라 요청했고 그 전까지는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 선언했다. 단식이 91시간동안 계속되자 던롭이 죽어서 순교자가 되는걸 막기 위해 풀려났으나 모든 수감자들을 풀어주고 싶지 않았던 영국 정부는 강제로 음식을 주입하기로 결정, 메리 앨런은 2주간 징역형을 선고받고 다시 단식 투쟁을 했지만 이번에는 강제적으로 음식 주유를 당하는 바람에 소화기능에 영구적인 장애가 생기고 만다. 의사와 WSPU 지도부는 그녀가 더 이상 전투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고 그 대신 그녀는 이스트본, 헤이스팅스, 세인트레너드, 그리고 1914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조직자 역할을 맡아 일했다.
2.3. 여경으로써의 삶
오른쪽이 메리 앨런 왼쪽은 마가렛 데이머 도슨이다. |
1915년 2월, 마가렛 데이머 도슨은 조직 이름을 여성 경찰 서비스(WPS)로 개칭하고 런던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생긴 난민 복지를 도맡았다. 그해 말, 메리 앨런은 그랜섬과 헐에서 군부대 주둔으로 인해 생긴 문제를 해결하러 떠났다. 지역 주민들은 병사의 술주정과 매춘의 증가에 대해 불만이 컸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이후 메리 앨런은 네빌 맥레디에게 여성 경찰 서비스 회원 357명울 부대에 영구적으로 포함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회원들이 너무 교육받았고 그로 인해 남성 경찰들을 짜증나게 할 것이라며 거절했다. 그러나 도슨과 앨런은 모두 전쟁 중에 국가에 기여한 공로로 OBE 훈장을 받았다. 그녀는 Dawson이 1919년 은퇴했을 때 사령관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런던 경시청에서는 여성 경찰 서비스를 해체하려 했지만 앨런 양이 이를 반대했다. 1921년 다머 도슨이 사망하고 메리 앨런이 개명된 여성 보조 서비스의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1922년, 웨스트민스터 교구에서 독립 자유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하자 그해에 그녀는 여성 경찰을 훈련시키기 위해 독일 쾰른으로 이사했다. 1926년, 영국 총파업이 일어나자 영국으로 귀국, 도로 교통 서비스를 계속 운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27년부터 제복을 입고 전 세계를 여행하며 해외에서 영국 경찰의 수장으로 받아들여졌고, 국내에서도 영국 수도권 경찰의 수장으로 오해받자, 국내 경찰과 정부 당국은 크게 당혹스러워 했다.
2.4. 파시즘 활동
1930년대에 히틀러를 칭찬하고 나치 독일 을 자주 방문하며 1933년, 공산주의와 영국적 삶의 방식에 대한 위협에 맞서 싸우기 위해 여성 예비군 창설을 주장했다. 1934년, 아돌프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를 직접 만난 후 그의 지지자가 되었다. 헤르만 괴링과의 토론에서 그녀는 경찰 여성은 제복을 입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매우 기뻤했고 심지어 여성 보조 서비스 에서 공식 업무를 수행할 때조차도 그녀는 나치 스타일의 잭 부츠를 신었다. 또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지지하며 오스왈드 모슬리 경과 교류했다. 그녀는 또한 그녀의 친구인 노라 엘람과 함께 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여성 책임자였고 Right Club의 회원이었다. 이런 그녀의 극우적 성향은 일부 회원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다가오면서 히틀러와 괴링을 지지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은 그녀가 1940년에 국방 규정 18B에 따라 수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켰고 실제로 수용되지는 않았지만 그해 7월 11일, 여성 보조 서비스에 대한 활동 정지를 명령받았다.1925년 《선구적 경찰관》 , 1934년 《교차로의 여인》 , 1936년 《푸른 옷의 여인》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메리 앨런은 1964년 12월 16일 뇌혈전증과 뇌동맥경화증으로 크로이던의 버드허스트 로드 4번지에 있는 버드허스트 요양원에서 사망했다.
3. 여담
- 레즈비언이었지만 대외에 딱히 그 사실을 알리고 다니진 않았다. 1920년대 초에 전 WPS 장교인 헬렌 타가트 양과 관계를 가졌다는 증언이 있다.
- 노라 엘람과 친구 사이였고 둘다 비슷한 삶을 살았는데 WPSU 회원으로서 서프러제트에 뛰어들었다가 둘다 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회원이 되어 파시즘에 헌신하다가 전쟁 이후 반해부론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둘은 매우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