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13 09:17:26

림형구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남한에 알려진 것에 따르면 1923년 함경남도 갑산에서 태어나 만경대혁명학원을 거쳐 김일성대학 특설반으로 진학, 모스크바 대학에 유학을 다녀왔다고 한다. 허나 리길송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920년대 초반생이 만경대에 들어갈 리가 없었으니 정말로 만경대 출신이라면 1930년대생일 것이다. 김광운의 연구에 따르면 해방 이전 갑산광산에서 노동자로 일했으며 그의 아버지는 김일성 빨치산 부대원으로 싸우다가 1939년 무산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후 김영주와 함께 소련으로 유학했으며 그와 사촌동서간이라고 한다.

1955년 민청 황해북도 위원장으로 등장하면서 모습을 드러냈으며 1956년 11월, 민청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지방당에서 사업하면서 1961년 11월, 황해북도당 선전부장에 임명, 1967년 3월, 황해북도 책임비서 임명이 확인되었다.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4기 중앙위원회에도 보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967년 12월, 최고인민회의 4기 1차 회의에서 대의원 자격심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후 1970년 8월, 신의주시 책임비서로 강등된 것이 확인되었으며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허나 직무에서 해임되었는지 1972년 12월, 5기 대의원 선거 명단에서 누락되었다. 그러다가 1973년 12월, 정무원 인민봉사위원장 임명이 확인되면서 중앙으로 올라간 것이 확인되었다. 1977년 12월, 최고인민회의 6기 1차 회의에서 인민봉사위원장에 유임되었으며 6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나 6기 대의원 명단이 공개되지 않아 확인은 불가능하다.

1980년 1월, 로태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는데 그 이전에 이미 승진했을 가능성이 높다. 1982년 4월 5일,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82년 4월, 최고인민회의 7기 1차 회의에서 인민봉사위원장으로 유임되었다. 그러다가 1985년 5월, 강원도 책임비서 겸 강원도 인민위원장으로 조동되었음이 확인되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5월의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2년 4월 1일,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아 이중수훈자가 되었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김일성 사후에도 잠시 유임되어 한동안 행사를 다녔으나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탈락했으며 최원익이 신임 강원도당 책임비서로 등장하면서 해임이 확인되었다. 전해지는 말로는 심화조 사건에 연루되어 참혹하게 죽었다고들 한다. 심화조 사건 당시 림형구의 아들로 자메이카 대사관 참사를 지냈던 림진수도 심화조 사건 당시에 체포되어 수용소에 끌려갔다고 태영호가 증언한 바가 있다. 다만 심화조 사건이 채문덕의 숙청으로 뒤집혔으니 복권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여담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