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리차르드 페르디난드 쿠레마 (Richard Ferdinand Kuremaa) |
생년월일 | 1912년 1월 12일 |
사망년월일 | 1991년 1월 10일 (향년 78세) |
국적 |
에스토니아 제1공화국 → 에스토니아 SSR → 에스토니아 |
출신지 | 탈린 |
포지션 | 포워드 |
신체조건 | 180cm |
소속팀 |
헤르메스 탈린 (1930) 푸흐케쿠도 탈린 (1931-1932) 칼레프 탈린 (1932) 탈리나 JK (1933-1935) 테르비스 패르누 (1936) 에스토니아 탈린 (1937-1939) 올륌피아 타르투 (1939-1940) |
국가대표 | 42경기 / 19골 (1933-1940) |
1. 개요
에스토니아의 전 축구 선수.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1930년부터 쿠레마는 에스토니아 축구 챔피언십에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창설 초기의 에스토니아 축구 챔피언십은 토너먼트제였고 이 기간동안 쿠레마는 우승을 차지하진 못했지만 골을 넣으며 꾸준히 활약했다.1933년부터 리그제로 바뀐 이후에도 쿠레마의 활약은 계속되었지만 쿠레마의 소속팀은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1936 시즌에는 16골로 리그 득점 2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1937년에서야 쿠레마는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첫 리그 우승의 감격을 맛보았고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리그가 중단될 때까지 쿠레마는 2개의 팀에서 3차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40년까지 쿠레마는 리그에서 총 66골을 넣어 리그 통산 득점 1위에 올랐다.
2.1.2. 국가대표
1933년 6월 11일. 쿠레마는 스웨덴과의 이탈리아 월드컵 지역예선 경기에서 대표팀에 데뷔했다. 하지만 스웨덴은 에스토니아가 상대하기에 너무 강한 팀이었고 에스토니아는 2대6으로 참패했다. 1대4로 뒤지던 상황에서 쿠레마가 후반 16분에 한 골을 넣었지만 대세를 뒤집을 순 없었다.쿠레마는 4년 뒤에도 프랑스 월드컵 지역예선에도 참가했지만 이번에도 독일과 스웨덴의 벽에 가로막혀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쿠레마는 핀란드와의 원정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어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에스토니아는 이 승리를 통해 조 3위로 지역예선을 마무리지으며 한 가닥 자존심을 살릴 수 있었다.
쿠레마는 대표팀에서 43경기에서 19골을 넣었다.
2.2.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에스토니아는 소련의 침공으로 1918년의 독립 이후 다시 소련의 영토가 되었다. 이 상황에서 에스토니아인들은 친소와 반소로 갈려 있었고 쿠레마는 소련에 대항해 싸우다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쿠레마는 석방되었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이후 재판에서 반역죄로 사형을 언도받았지만 10년형으로 감형받고 노릴스크 노동교화소에서 복역했다.
1952년, 쿠레마는 예정보다 일찍 석방되었고 에스토니아에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1930년대 에스토니아 최고의 축구 선수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에스토니아가 약체였기 때문에 월드컵 본선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4. 수상
4.1. 클럽
- 에스토니아 축구 챔피언십 우승 3회: 1937-38, 1938-39(이상 에스토니아 탈린), 1939-40(올륌피아 타르투)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