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쿠바 비야 클라라에서 태어났으며, 야구선수였던 아버지 아르날도 에르난데스(Arnaldo Hernandez)와 형
올랜도 에르난데스를 따라 야구를 시작했다.
쿠바 청소년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던 리반 에르난데스는 1992~1993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쿠바의 2년 연속 우승에 기여하며 이름을 알렸고,
쿠바 프로야구 리그에서도 선발 투수로 나온 거의 모든 경기를 완투하는 등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런 에르난데스의 활약을 지켜보던 이가 바로 조 쿠바스(Joe Cubas)라는 에이전트[1]였고, 에르난데스는 1994년
베네수엘라에서 그와 만나
멕시코를 경유해
망명하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5년, 에르난데스는 쿠바를 떠나 미국으로의 망명에 성공한다.[2]
그렇게 미국으로 건너온 에르난데스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쇼케이스를 가진 뒤 유수의 구단들과 협상했고, 최종적으로
플로리다 말린스 유니폼을 입으며 메이저 생활을 시작한다.
그에 대한 구단과 야구계의 기대는 대단해서, 1996년 '베이스볼 아메리카(BA)'에서 선정한 마이너 리그 유망주 순위에서 8위에 오르는 등 그가 차세대 에이스로 성장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에르난데스는 더블 A에서 ERA 4.34, 트리플 A에서는 ERA 5.14를 기록하며 다소 애매한 모습을 보였고, 메이저에는 시즌 말미에야 간신히 콜업돼 1경기 불펜으로 던진 후 다시 마이너로 내려왔다.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한 모습에 BA는 그의 유망주 랭킹을 8위에서 100위까지 하락시켰고, 에르난데스는 다음 시즌부터는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겠다고 다짐하며 1997년을 준비한다.
그렇게 맞이한 1997년, 지난해 5점대였던 트리플 A에서의 ERA를 3.98까지 낮추는 데 성공한 에르난데스는 다시 메이저 리그의 부름을 받았고, 6월 15일
뉴욕 양키스와의
더블헤더 2차전에 선발 투수로 나와 5이닝 3실점의 무난한 투구를 하며 첫 선발 등판을 마친다. 그럭저럭 합격점을 받은 에르난데스는 다음 선발 등판인 6월 29일
몬트리올 엑스포스와의 경기에서 5이닝 2실점 투구로 데뷔 첫 승이자 선발승을 거둔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는 호투를 이어가는데, 8월까지 12경기에 선발 등판해 첫 2경기 포함 9승 무패, ERA 2.75라는 갓 로테이션에 진입한 신인치고는 상당한 성적을 거둔다. 비록 9월에는 승리 없이 3패만을 거두며 잠시 주춤했지만, 시즌 최종 성적은 17경기(17선발) 9승 3패, ERA 3.18로 유망주 시절의 기대치를 어느 정도 채워주며 같은 팀의 좌완 영건
토니 사운더스[3]와 함께 영건 듀오를 구성했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아직 드러난 것이 아니었다. 소속팀 말린스는 시즌을 92승 70패(NL 동부지구 2위)로 마치며 와일드카드를 획득,
1997 내셔널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
배리 본즈가 버티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3연승으로 가볍게 제압하며 NLCS에 진출한다. 이어지는
1997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만난 팀은 시즌 101승 61패를 거두며 동부지구를 제패했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당시 브레이브스에는 20승 에이스
데니 네이글을 필두로 한
존 스몰츠,
톰 글래빈,
그렉 매덕스의 최강 선발진이 있었다. 그럼에도 말린스는 2승 2패로 선전하며 시리즈를 대등하게 끌고 갔고, 시리즈의 분수령이 될 5차전을 앞두고
짐 릴랜드 감독은 에르난데스를 5차전 선발로 등판시키는 초강수를 띄운다. 2차전 선발이었던 알렉스 페르난데스는 어깨 회전근 부상으로 이탈했고, 에이스
케빈 브라운 또한 바이러스 감염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던 터라 NLDS 2차전에서 구원 등판해 4이닝 1실점, NLCS 3차전에서 구원승을 따내며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던 에르난데스를 선택한 것. 하지만 상대는 다름아닌 '마스터'
그렉 매덕스. 매치업에서만 보더라도 대부분의 팬들은 브레이브스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NLCS 5차전에서 9이닝 동안 15탈삼진을 잡아내며 완투승을 거두는 리반 에르난데스
매덕스는 많은 이들의 예상대로 7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다. 하지만 에르난데스는 매덕스보다 더 호투하며 말린스에게 5차전 승리를 안긴다. 이날 에르난데스의 성적은 9이닝 143구 3피안타 1실점 15탈삼진 완투승.[4] 최종 스코어가 1:2였음을 감안하면 에르난데스의 호투는 더욱 값진 것이었다. 다만 이날 주심이었던 에릭 그렉의 스트라이크 존이 에르난데스에게는 거의 던지면 스트라이크였을 정도로 심각한 태평양 존이었기에 다소 평가절하되기도 한다.[5]
어쨌든 5차전을 이기면서 기세가 오른 말린스는 6차전에서 에이스
케빈 브라운이 출격하고 타선이 1회부터
톰 글래빈을 두들기며 시리즈 4승째를 거둬 월드 시리즈에 진출한다. 당연히 NLCS MVP는 시리즈의 흐름을 바꾸는 완투승을 거둔 에르난데스의 것이었다.
이어지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1997년 월드 시리즈에서
짐 릴랜드 감독은 1차전 선발로 다시 에르난데스를 등판시킨다. 상대는 역시 녹록지 않은 ‘불독’
오렐 허샤이저. 더구나 허샤이저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이던 1988년 NLCS와 월드 시리즈 MVP를 동시에 수상했을 정도로 '빅 게임 피처'로서 명성이 높았고, 인디언스는
짐 토미,
데이비드 저스티스,
매니 라미레즈,
맷 윌리엄스,
샌디 알로마 주니어 등이 불을 뿜는 활화산 타선을 자랑했다. NLCS보다도 훨씬 빡빡해진 상황 속에서도 에르난데스는 5⅔이닝 3실점으로 나름 잘 던졌고, 타선이 7점을 지원해주며 월드 시리즈 첫 선발승을 가져간다. 이후 NLCS 때처럼 시리즈 2승 2패 상황에서 다시 허샤이저와 맞대결하게 된 5차전에서는 비록 6실점[6](5자책점)을 기록했지만 무려 142개의 공을 뿌리면서 8이닝을 던졌고, 이번에도 타선이 8점을 내준 덕에 월드 시리즈에서만 2승째를 따냈다. 그리고 팀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에드가 렌테리아의 끝내기 안타로 승리하며 월드 시리즈 우승. NLCS에 이어 월드 시리즈 MVP도 에르난데스의 몫이었다.[7]
이런 포스트시즌에서의 에르난데스의 활약은 야구계 뿐 아니라 외교계까지 들끓게 만들었는데, 말린스의 연고지였던
마이애미의 쿠바 이민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쿠바 국내 여론까지 에르난데스의 활약에 고무되면서 쿠바 정부도 말린스 구단과 주정부의 끈질긴 요청, 동료 선수들의 탄원서까지 날아오자 3주의 논의를 거쳐 이례적으로 에르난데스의 어머니에게 일시 출국을 허가해주기까지 했다.[8]
출처
1999년에도 달라지지 않아 136이닝 5승 9패, ERA 4.76 97탈삼진에 그쳤다. 물론 당시의 리그가 타고투저 성향이 강했기에 어찌 보면 준수한 성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린스의 홈구장이었던
프로 플레이어 스타디움은 투수 친화 구장에 속했다.[9] 거기다 말린스는 스몰마켓 팀이었음에도 1997년 우승을 위해 선수들을 마구 질렀다가 연봉 문제로 결국 탈이 나 고액 연봉자들을 이곳저곳에 팔아치우는 상태였고, 에르난데스 또한 그 대상자였다. 때문에 말린스는 성적도 애매했고 연봉도 많이 받았던[10] 에르난데스를
제이슨 그릴리와
네이트 범프를 대가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트레이드한다.
2000년 240이닝을 던지면서 커리어 최다승인 17승과 165탈삼진을 기록했고, ERA 또한 3.75로 낮추면서 커리어 첫 3점대 ERA를 기록[11]하며 자이언츠의 에이스 노릇을 했다. 또한 자이언츠가 지구 우승을 거두며 진출한
2000 내셔널 리그 디비전 시리즈에서도
뉴욕 메츠를 상대로 1차전에서 7⅔이닝 1실점 5탈삼진으로 호투하며 승리를 거둔다.[12]
2002년에는 ERA는 다소 내려가긴 했으나(5.24 → 4.38) 팀 타선이 전년도보다 약해진 탓에 12승 16패로 리그 패전 1위의 멍에를 썼다. 그 와중에도 이닝 이팅 능력을 발휘하며 두 시즌 모두 200이닝을 넘겼다. 팀은 와일드카드를 획득해 2년 만에 다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2002 내셔널 리그 디비전 시리즈와
2002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를 연달아 통과하며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다. 에르난데스도 NLDS와 NLCS에서 각각 8⅓이닝 3실점, 6⅓이닝 2실점으로 잘 던지며 1승을 거둔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2002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최악의 피칭을 하는데, 3차전에서는 3~4회에 난타를 당하면서 3⅔이닝 6실점으로 무너져 패전을 당했고, 운명의 7차전에서는 2회까지 꾸역꾸역 막다가 3회에 아웃카운트 하나 못 잡고
개럿 앤더슨에게 싹쓸이 2루타를 맞으며 2이닝 4실점으로 또 털렸다. 월드 시리즈 최종 성적은 2경기 2패 5⅔이닝 10실점 ERA 14.29로 5년 전 포스트시즌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성적이었다. 6차전
배리 본즈의 수비 실책이 워낙 팬들의 인상에 남아 있어서 그렇지, 시리즈를 말아먹은 주범은 사실상 에르난데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에르난데스에게 제대로 데인 자이언츠 구단은
몬트리올 엑스포스로 그를 트레이드하며 이별을 택한다. 트레이드 대가는 투수 짐 브로워와
매트 블랭크.
엑스포스로 이적한 에르난데스는 2003년을 2000년에 버금가는 커리어하이 시즌으로 보내며 자신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그리고 자신을 버린 자이언츠의 선택이 잘못됐음을 알린다. 233⅓이닝 동안 15승 10패, ERA 3.20에 178탈삼진의 호성적을 올리며 엑스포스가 5할 승률을 사수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13] 이 시즌 기록한 8번의 완투는 리그 1위이자 1998년의 9완투 이후 가장 많은 수치였으며, 덤으로 투구 이닝 또한 1위에 오르며 고무팔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이 때 이복형
올랜도 에르난데스가
뉴욕 양키스에서 트레이드되어 오면서 잠시 한솥밥을 먹었으나 올랜도가 어깨 회전근 부상으로 재활에 들어가면서 메이저에 콜업되지는 못했고, 2004 시즌 시작 전에 다시 양키스로 복귀함에 따라 형제가 나란히 같은 팀의 마운드에 서지는 못했다.
이듬해인 2004년에도 절륜한 이닝 이팅 능력을 과시하며 255이닝에 9완투로 데뷔 이후 최다 완투/이닝을 소화[14]했고, ERA도 3.60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생애 첫 올스타전에 출장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15] 타격 부문에서도 .247의 타율에 10타점을 기록하며 투수 부문
실버 슬러거를 수상한 것은 덤. 엑스포스가 마지막 승리를 거둔 경기에서의 선발 투수이기도 했다.[16]
그러던 2006년 8월 7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투수 개럿 모크와 맷 치코를 내셔널스로 보내고 에르난데스를 영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서부지구 선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 2경기 차 뒤져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공동 2위였던 디백스는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 선발진을 보강하려고 트레이드 매물을 살피던 중이었는데, 그 레이더망에 에르난데스가 포착된 것.
4년 간 정든 내셔널스를 떠나 디백스로 향한 에르난데스는 잔여 시즌동안 경기당 평균 7이닝을 소화하며 4승 5패 ERA 3.91을 기록, 디백스의 영입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정작 디백스는
DTD를 시전하며 지구 4위로 시즌 마무리.
이듬해인 2007년에는 ERA는 좀 높았지만(4.93) 11승을 거두면서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 디백스의 지구 우승에 힘을 보탠다. 이후 열린 포스트시즌에서는 2승 무패로 앞선
시카고 컵스와의
2007 내셔널 리그 디비전 시리즈 3차전에서 6이닝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며 자신의 손으로 팀을 NLCS에 올려놓지만,
2007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5⅔이닝 4실점으로 다소 흔들리며 패전을 안았고 팀도 '락토버'
콜로라도 로키스에게 스윕으로 무너지며 탈락했다. 그리고 이것이 에르난데스의 마지막 포스트시즌.
시즌 종료 후 자유계약 선수로 풀린 에르난데스는 1년 500만 달러에
미네소타 트윈스와 계약한다. 시즌에 들어가서는 어찌어찌 10승은 거두었지만, ERA는 전년도보다도 높은 5.48에 달했고, 팔꿈치 수술을 받고 돌아온
프란시스코 리리아노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구단이 8월 1일 그를
지명할당하며 짧았던 트윈스에서의 생활을 마친다.
부진했던 성적 탓에 해를 넘겨 2009년 2월까지도 팀을 찾지 못했던 에르난데스는
뉴욕 메츠와 마이너 계약을 맺으며 기사회생한다. 5선발 경쟁에서 승리하며 메츠의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한 그는 2008년보다는 나은 모습을 보이며 약간의 반등에 성공한다. 2009년 5월 26일에는
시티 필드의 첫 완투승을 거둔 선수로 이름을 남기는 등 6월까지 5승 3패 ERA 4.04로 순항한다. 하지만 7월 첫 2경기에서 도합 7이닝 15실점으로 흔들렸고, 이내 다시 2연승을 달리며 회복하나 싶더니 8월 3경기에서 14⅓이닝 ERA 11.30에 3패만을 기록하는 좋지 못한 피칭을 보였다. 메츠는 부진한 모습의 노장 에르난데스를 계속 안고 가려 하지 않았고, 마침 부상에서 복귀한
빌리 와그너를 로스터에 등록하기 위해 8월 20일 에르난데스를 방출한다.
메츠에서 방출된 에르난데스는 전성기를 보냈던
워싱턴 내셔널스와 계약을 맺으며 워싱턴 D.C.로 돌아온다. 심리적 안정감을 찾은 그는 이적 후 8경기 중 6경기에서 QS를 거두며 2승 4패, ERA 5.36을 마크[17]했고, 2010년에도 내셔널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으며 인연을 이어간다. 다만 시즌 최종 성적은 9승 12패로 마감하며 2000년부터 이어온 연속 두 자리수 승수 기록을 9년에서 멈춰야 했다.
그리고 2010년, 에르난데스는 다시 부활하며 모두를 놀라게 한다. 2007년 이후 3년 만에 200이닝 이상을 소화하며 10승 12패, ERA 3.66으로 다시 팀의 에이스로 거듭난 것. 여기에 2010년 4월 17일에는
밀워키 브루어스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며 2004년 7월 30일
플로리다 말린스전 이후 약 5년 9개월만에 완봉을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이미 전성기가 다 지난 35세의 노장이 거둔 성적이었기에 더욱 빛났던 시즌. 내셔널스 구단도 이런 에르난데스의 활약을 높이 사 2011년까지 연장계약을 체결한다.
2011년에도 에르난데스는 29경기에 모두 선발 등판해 175⅓이닝을 소화하며 건재함을 과시했고, 6월 15일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다시 완봉승을 거두며 2년 연속 완봉을 기록했다. 이외에도 8월 30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는 통산 50,000 투구라는 전인미답의 기록을 달성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8승 13패 ERA 4.47.
2011년 시즌 종료 후 또 자유계약 선수로 풀리며 자유의 몸이 된 에르난데스는 2012년 1월 31일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가 시범경기에서 영 신통치 않은 모습을 보이며(5경기 16이닝 23피안타 6볼넷, ERA 5.63) 3월 29일 방출됐으나, 방출 하루만인 3월 30일 연봉 75만 달러에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계약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간다. 지금껏 선발로만 뛰어왔던 에르난데스지만 나이를 받아들이고 데뷔 후 처음으로 중간계투로 전향했고, 5월 5일에는 데뷔 첫 세이브를 기록하는 등 2점대 ERA를 유지하며 불펜으로서도 괜찮은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지막 2경기에서 굉장히 부진한 피칭을 선보이며[18] 신임을 잃었고, 6월 19일 브레이브스에서 방출된다.
브레이브스에서 방출되며 다시 실업자가 된 에르난데스였지만, 방출 사흘만에
밀워키 브루어스와 자유계약을 맺으며 9번째 유니폼을 입는다. 그러나 브레이브스 시절 막판에 난타당한 충격이 컸는지 그의 경기는 실점을 하지 않는 날보다 실점을 하는 날이 더 많았고, 결국 브루어스에서의 최종 성적은 26경기 36⅓이닝 ERA 7.68로 좋지 못했고, 시즌 후 다시 자유계약 선수로 공시된다.
[1]
이후 미국으로 진출한 리반의 에이전트를 맡기도 했으며, 이복형 올랜도의 에이전트도 맡는 등 아예 쿠바 선수 전문 에이전트가 된다.
[2]
다만 이 망명 때문에 또 다른 유망주들이 망명할까 노심초사한 쿠바 정부가 이복형 올랜도를 체포하고 국가대표팀 자격 정지를 먹이는 등 올랜도의 야구 인생이 꽤나 꼬였다.
[3]
MLB 최악의 부상을 꼽으라면 항상 한 손에 꼽히는 투구 도중 팔꿈치가 골절된 선수로 유명하며, 결국 이 부상 이후 다시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지 못한 채 은퇴를 선언했다.
[4]
15탈삼진은 아직까지도
챔피언십 시리즈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성적이 더욱 놀라운 이유는 에르난데스는 삼진을 많이 잡는 유형의 투수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 (통산 K/9 5.58)
[5]
영상을 보면 스트라이크 존에 어이없어 하는 브레이브스 타자들의 모습이 계속 비친다. 특히 9회 마지막 타자인
프레드 맥그리프를 삼진으로 잡아낼 때 던진 마지막 공은 포수도 볼인 줄 알고 에르난데스에게 던져주려다 스트라이크 콜을 듣고는 잠깐 당황하다 그제서야 에르난데스에게 달려간다. 이후 그렉 주심은 다시는 포스트시즌에서 주심으로 출장하지 못했다고.
[6]
이것도 8회까지는 4실점으로 버텼으나 9회에도 올라왔다가 실책-안타로 주자를 2명 남겨놓고 내려간 뒤 후속 투수
롭 넨이 그 주자들을 다 불러들이면서 늘어난 것이다.
[7]
하지만 에르난데스의 월드 시리즈 성적은 2승을 거두긴 했지만 13⅔이닝 동안 볼넷 10개와 탈삼진 7개, ERA 5.27로 그다지 인상적이라고 할 순 없었다. 그러나 NLCS에서의 에르난데스의 활약이 워낙 대단했기에 기자단들에게 큰 인상을 주었고, 이것이 월드 시리즈 MVP 투표에까지 영향을 미쳐 에르난데스의 MVP 수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8]
에르난데스와 그의 어머니는 월드 시리즈 7차전 시작 직전 30분 간의 만남을 가졌다.
[9]
이 때문에 이 시절 에르난데스의 ERA+는 1998~1999년 2년 간 각각 85, 90에 그쳤다.
[10]
에르난데스의 1999년 연봉은 187만 5천 달러로 당시 팀 내 3위였다.
[11]
1997년에 ERA 3.18을 기록하긴 했으나 규정이닝 미달.
[12]
다만 팀은 이후 3연패하며 시리즈 탈락.
[13]
특히 7월에는 6경기 선발 등판해 3번의 완투를 곁들이며 50이닝 동안 4승 1패 ERA 1.80, 43탈삼진을 기록하며 NL 이달의 투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4]
당연히 리그 최다 이닝 1위에 올랐다.
[15]
다만 엑스포스의 전력이 많이 약해진 탓에 승수는 11승밖에 쌓지 못했고 패전은 리그 공동 2위(15패)였다.
[16]
이날 7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으나 불펜진의 방화로 승리와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참고로 엑스포스의 마지막 선발승을 거둔 투수는 다름아닌
김선우. 그 승리는 동시에 홈 경기 마지막 승리이기도 하다.
[17]
QS 횟수 대비 ERA가 다소 높은데, QS를 달성하지 못한 2경기 동안 15실점으로 거하게 털리는 바람에 높아졌다.
[18]
특히 마지막 경기가 제일 심했는데, 1⅔이닝 동안 7안타를 맞으며 5실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