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지 베르톨리니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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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 ||||
15대 |
루이지 베르톨리니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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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이탈리아의 前 축구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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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루이지 베르톨리니 Luigi Bertolin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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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4년
9월 13일[1] 이탈리아 왕국 부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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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7년
2월 11일 (향년 72세) 이탈리아 토리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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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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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78cm| 체중 72kg | |
직업 |
축구선수(레프트 하프백 / 은퇴) 축구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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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칼초 보르살리노 (1924~1925) 사보나 FC (1925~1926) 알레산드리아 칼초 (1926~1931) 유벤투스 FC (1931~1937) AC 티굴리아 (1937~1940) |
감독 |
AC 티굴리아 (1937~1940) SSD 에시르에일 칼초 1946 (1946~1947) 레지나 칼초 (1947~1948) 유벤투스 FC (1951) 브레시아 칼초 (1952) AC 쿠네오 1905 (1952~1953) ASD 체니시아 (1953~1955) ASD 키에리 (1965~19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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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26경기 ( 이탈리아 / 1929~19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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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65년부터 1966년까지 키에리 감독을 맡았다.2. 특징
- 시합 때 하얀 손수건을 머리에 두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이유가 공에 머리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3. 생애[2]
3.1. 어린 시절
베로나 출신 아버지와 바르도네키아 출신 어머니를 둔 베르톨리니는 알레산드리아에서 자라며 축구를 접했다. 그 시간에 예술과 기술을 공부하기도 했다. 베르톨리니는 한 때 삼촌의 가게에서 채소 장수로 그리고 전문 정비사로 일한 적이 있었고 지역 축구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3.2. 선수 경력
3.2.1. 클럽
3.2.1.1. 초기 선수 생활
1924년 병역을 마치고 친구에 의해 사보나라는 클럽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당시에는 스트라이커였다. 이 당시에도 나름 재능이 있었던 베르톨리니는 알레산드리아로 이적하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출전 명단에 자주 들지 못했다. 이 때 그는 생계를 위해 신문을 팔기도 하고 자전거 수리를 하기도 했다.그러다 당시 알레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카를로 카르카노에 의해 영양 불량 문제가 있음이 밝혀졌고 문제를 해결한 베르톨리니는 1926-27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주전 멤버에 포함되었다. 이 시기에 레프트 하프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하게 되었고 코니 컵 우승도 이뤘다. 베르톨리니는 이 무렵을 그의 인생에서 터닝 포인트라 회고하였다. 알레산드리아에서는 1930-31 시즌까지 활약하였다.
3.2.1.2. 유벤투스 FC
마리오 페나키아라는 사람에 의하면 베르톨리니는 알레산드리아에서 활동하면서 오랜 기간 유벤투스의 구애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카르카노가 1930년, 유벤투스의 감독으로 이적하면서 조반니 페라리만 이적시키자 베르톨리니는 큰 불만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1931년에 베르톨리니도 유벤투스의 줄무늬 유니폼을 입게 되었고, 여기에는 비르지니오 로세타의 비행기 여행에 대한 나쁜 태도도 한몫했다.베르톨리니는 루이스 몬티, 마리오 바를리엔과 함께 철의 중원을 구성하였고, 세리에 A 4연패를 추가하여 5연패의 대기록을 달성하였다.
3.2.2. 국가대표팀
베르톨리니는 1929년 12월 1일 산 시로에서 데뷔전을 가졌다. 상대는 포르투갈이었고, 여기에서 이탈리아는 6대1의 대승을 거두었다. 대표팀에서도 루이스 몬티, 아틸리오 페라리스, 마리오 피치올로 등과 함께 탄탄한 중원을 만들어냈고, 이탈리아의 첫 월드컵 우승에도 기여했다.[3]베르톨리니는 총 26경기에 참가하였다.
3.3. 감독 경력
베르톨리니는 1937년부터 라팔로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했다. 1937-38 시즌에 세리에 C로 팀을 이끌었으며, 그 이후에도 여러 팀을 돌아다녔다.유벤투스에서는 코치로 있다가 전임 감독 제시 카버의 사임으로 인해 새 감독으로 발탁되었다. 하지만 요식적 문제 때문에 곧 헝가리 레전드 샤로시 죄르지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3.4. 사망
베르톨리니는 72세의 나이에 동맥류로 사망했다. 그의 무덤은 토리노의 공동 묘지에 있다.4.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공중볼 다툼과 수비 능력이 좋은 하프백. 특히 탄력이 좋아서 웬만한 센터 포워들과의 헤딩 경쟁에서 밀리지 않았다.잉글랜드인들이 그를 참 좋아라한다. 강하고 단호하며 관대하기도 한 잉글랜드인 축구 선수다.
펠리체 보렐
펠리체 보렐
유벤투스의 5연패와 포초의 황금기에서의 키맨 중 한 사람
카를로 펠리페 치에사(이탈리아의 축구 전문 기자)
카를로 펠리페 치에사(이탈리아의 축구 전문 기자)
가공할만한 수비수로 꼭 머리에 공을 붙이고 다니는 느낌이었다.
카를로 펠리페 치에사(이탈리아의 축구 전문 기자)
카를로 펠리페 치에사(이탈리아의 축구 전문 기자)
길고 다소 단정치 못하지만 머리에 하얀 손수건을 쓰고 헤딩슛에서는 무적이었다. 이례적인 한 쌍의 다리로 그를 거대한 공간을 보증할 수 있었고 의지와 기술로 신체적인 구조의 약점을 커버했다.
카를로 모리온도
카를로 모리온도
5. 수상
5.1. 클럽
- 세리에 A 우승 4회: 1931-32, 1932-33, 1933-34, 1934-35( 유벤투스)
- 코파 코니 우승 1회: 1927(US 알레산드리아)
- 리구리안 지역리그 우승 1회: 1937-38(라팔로)
5.2. 국가대표
- FIFA 월드컵 우승 1회: 1934
- 중유럽 인터내셔날 컵 우승 1회: 1933-35
5.3. 감독
- 리구리안 지역리그 우승 1회: 1937-38(라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