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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1 15:44:36

루이 드 라발

파일:루이 드 라발.jpg
이름 루이 드 라발
Louis de Laval
출생 1411년
프랑스 왕국 라발
사망 1489년 8월 21일
프랑스 왕국 라발
아버지 장 드 몽포르
어머니 안 드 라발
형제자매 기 14세, 앙드레, 잔, 카트린
직위 샤티용과 프리난두르의 영주, 로에아크 남작, 왕실 고문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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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과 맞섰으며,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충실한 신하였다.

2. 행적

1411년경 프랑스 왕국 라발에서 케르고를레, 라 로슈-베르나르 남작, 라 브레테세, 로에아크, 몽장 등지의 영주였던 장 드 몽포르와 라발의 영주인 기 12세 드 라발의 외동딸인 안 드 라발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기 14세, 앙드레가 있었고, 누이로 잔[1], 카트린[2]이 있었다.

아버지 장 드 몽포르는 기수 기사로서 프랑스군에 복무했고,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 간의 내전 때 아르마냑파를 돕기 위해 7명의 기사와 180명의 종자를 포함한 600명의 군대를 지휘했다. 1412년 장인이 사망하자 자신을 기 13세 드 라발이라고 칭했다. 1412년 7월 부르주 평화협약이 체결되면서 아르마냑파와 부르고뉴파의 내전이 중지되자, 그는 예루살렘에 순례해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기도하기로 하고, 배를 타고 팔레스타인으로 가서 목적을 달성한 뒤 로도스로 갔다가 그곳에 창궐한 전염병에 걸려 1414년 8월 12일에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집으로 보낸 서신에서 아내에게 자신의 영지를 지키고 통치할 전권을 맡기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안 드 라발이 브르타뉴, 앙주, 메인, 노르망디, 프랑스, 피카르디, 플란데런, 에노, 아르투아 등지에 넓게 펼쳐진 남편의 영지를 전적으로 관리했고, 아직 미성년자였던 장 드 몽포르의 아이들 역시 안의 후견을 받았다. 이에 장 드 몽포르의 아버지인 몽포르 영주 라울 드 몽포르가 자신이야말로 아이들을 양육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수년 간의 법정 소송 끝에,1417년 파리 의회에서 고인의 뜻대로 하기로 확정했다.

루이는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의 궁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1430년 장 5세와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 간의 협상이 벌어졌을 때 조르주 1세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트레무아유 가문 영지에 일시적으로 인질로 보내졌다. 1431년 7월 장 5세에 의해 주곤의 수비대장이 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기록 상에서 전해지지 않던 그는 1441년 형 앙드레가 퐁투아즈 공방전을 진두지휘할 때 동행했다. 1442년 프랑스 국왕 샤를 7세 도팽 루이 타르타 원정에 가담했으며, 같은 해 11월 2일부터 1443년 8월 14일까지 벌어진 디에프 공방전에도 참여해, 디에프의 성채에 처음으로 진입한 전사 중 한 사람이었다.

1443년 도팽 루이가 아버지의 명령을 받들어 장 4세 다르마냐크를 징벌하러 원정을 떠났을 때 동행했다. 1445년 도팽 루이를 모욕한 자메 뒤 틸레의 재판에서 루이를 변호하고 자메를 비판하는 증언을 하였으며, 1446년 루이가 샤를 7세의 정부인 아녜스 소렐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밀 때 가담했다. 그러나 이 음모는 곧 발각되었고, 도팽 루이는 도피네로 피신했다. 이때 루이 드 라발도 도피네로 함께 갔다. 이후 도팽 루이의 시종장이 된 그는 도팽 루이가 성적으로 방탕한 아버지 샤를 7세를 규탄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옹호하고자 대귀족들을 설득하는 걸 도왔다.

1456년, 샤를 7세는 아들 루이가 도피네에서 자신에게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앙투안 드 샤반에게 아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루이 드 라발은 도팽 루이와 함께 부르고뉴 공국의 궁정으로 피신했다.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는 루이 드 라발의 뛰어난 학식을 크게 호평하며 극진히 대우했다. 이후 샤를 7세는 루이의 형제 앙드레의 설득을 받아들여 1457년 1월에 생프리에스트에서 루이 드 라발을 사면하며 그가 도피네의 총독이 될 거라고 선언했다.

1461년 3월, 샤를 7세는 루이 드 라발을 프랑스 왕국의 속국이 되었던 제노바 공화국의 제7대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리구리아 해안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제노바 의회를 소집해 보조금과 장거리 전쟁을 위한 함대를 제공하라고 요청했다. 제노바 의회가 거부하자,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강제 집행했다. 이에 격분한 제노바의 주요 가문인 아도르노 가문과 프레고시 가문이 연합을 결성해 그에게 공동으로 대항했고, 그는 카스텔레토 요새에서 고립된 채 항전해야 했다. 그는 본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고, 결국 사보나로 철수해서 그곳을 지켰다. 1464년 초 루이 11세가 제노바와 평화 협약을 맺고 사보나를 돌려준 뒤 프랑스로 귀환했다.

1465년 루이 11세의 왕권 강화 정책에 반발한 대귀족들이 공익 연맹을 결성하고 반기를 들었다. 루이 11세에 의해 프랑스 원수 직위에서 물러나야 했던 형제 앙드레는 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지만, 그는 루이 11세에게 끝까지 충성했다. 공익연맹과 프랑스 국왕간의 화해가 이뤄진 뒤인 1465년 샹파뉴 보안관 겸 총독에 선임되어 1472년까지 직위를 수행했다. 1465년 루이 11세가 성 미셸 기사단을 창설했을 때, 그는 앙드레와 함께 최초의 기사 15명의 일원이 되었다. 1470년 루이 11세의 지시에 따라 부르주 대학교를 설립했으며, 새로운 대학에 부여된 특허 비준을 거부한 파리 의회와 국왕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 1470년 10월에는 잉글랜드 여왕 앙주의 마르그리트를 파리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한편, 그는 1466년 사냥과 수자원을 관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물과 숲의 그랜드마스터' 에 선임되어 죽을 때까지 역임했다.

1483년 투렌의 총독에 선임되었으며, 1485년 루이 11세가 사망한 뒤 어린 샤를 8세를 대신해 섭정하던 안 드 보주의 치세에 오를레앙 공작 루이 2세 도를레앙,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2세, 로렌 공작 르네 2세, 알브레 영주 알렝 달브레, 오랑주 공작 장 4세 드 샬롱아를레 등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른바 '광기 전쟁'이 벌어졌을 때 프랑스 왕실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488년 친정을 시작한 샤를 8세에게 원로 귀족으로서 각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샤를 8세에게 브르타뉴 공국의 상속녀인 안 드 브르타뉴와 결혼할 것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루이 드 라발은 당대의 유명한 독서광이었다. 그는 자신의 목사인 세바스티앙 마메로를 시켜 수많은 작품을 작곡하거나 번역하게 했다. 대표적인 번역서로는 13세기 폴란드 도미니코회 수도자이자 연대기 작가인 오파바의 마친이 집필한 <Chronicon pontificum et imperatorum(교황과 황제의 연대기)>를 들 수 있는데, 루이 드 라발은 마친의 저서를 번역할 뿐만 아니라 이를 이어갈 것을 의뢰했다. 이에 세바스티앙 마메로는 1458년에 마친의 연대기 번역과 그 후의 사건을 추가로 다룬 <Cronicques martiniennes(마르티니안 연대기)>를 출간했다. 또한 루이는 여러 자료를 자유롭게 활용해 카롤루스 대제 시대부터 1462년까지 가톨릭 이슬람교 사이의 십자군 전쟁을 다룬 연대기를 집필하게 했다. 이 연대기는 1473 ~ 1474년에 <Passages d'outremer(해외항로)>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루이 드 라발은 이 밖에도 13세기 시토회 수도원의 수도자이자 연대기 작가인 보베의 빈센트가 집필한 백과사전 <Speculum Maius(거대한 거울)>을 번역하게 했으며, 장 프루아사르의 연대기를 자신의 도서관에 보관하도록 했다. 그의 도서관에서 보관된 사본들 중 현존하는 사본은 9개로,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었다. 1480년경, 프랑스 화가 장 콜롱브는 자신을 후원하는 루이를 위해 성무일도 저서인 <시간의 책>을 편찬하고 거기에 그림을 삽입했다. 현재 <Heures de Louis de Laval(루이 드 라발의 시간>으로 알려진 이 저서에서, 루이의 문장 삽화 3개와 초상화 3개가 포함되었다.

루이 드 라발은 1489년 8월 21일 라발에서 사망한 뒤 형제 기 14세와 앙드레가 묻혀 있던 생투갈 교회에 안장되었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기에 자녀가 없었다.


[1] 1405 ~ 1468, 부르봉-방돔 공작 루이 1세 드 부르봉-방돔의 부인 [2] 1412 ~ 1450, 브로세 자작 기 3세 드 쇼비니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