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colcolor=#fff> 로사 린톤-오만 Rotha Lintorn-Orm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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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로사 베릴 린톤 린톤오만 Rotha Beryl Lintorn Lintorn-Orman |
출생 | 1895년 2월 7일 |
영국 잉글랜드 런던 켄싱턴 | |
사망 | 1935년 3월 10일 (향년 40세) |
카나리아 제도 산타브리기다 호텔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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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블랑쉬 린톤-오만 (어머니) 찰스 에드워드 오만 (아버지) |
직업 | 정치인 |
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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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정치인. 영국 파시스트당의 창립자이다. 오스왈드 모슬리의 아성에 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2. 생애
2.1. 유년기
로사 린톤-오만은 1895년 영국 본머스의 해안 마을에서 중산층 이상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가문의 유일한 상속녀로 태어났기에 그녀의 린톤-오만의 할아버지가 죽자 가문의 막대한 부를 물려받게 된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또래 여성들과는 다른 취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숲을 모험하거나 물고기 낚시를 하거나 그외 등등 매우 활동적인 편이였다. 마침 그녀의 어머니가 걸스카우트 운동을 시작한 최초의 여성 지도자 중 한 명이였기에 그녀를 걸스카우트로 보내기로 한다.그녀는 친구 네스타 모드 애쉬워스와 함께 1909 크리스털 팰리스 스카우트 랠리에 가입한다. 스카우트의 결속력과 규율, 그리고 전근대의 존경받는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추구하지 않는 활기찬 삶에 대한 강조는 그녀의 마음에 딱 맞았고 열네살의 나이에 걸스카우트의 지도자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2.2. 제1차 세계 대전
그러던 와중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그녀는 육군 현역병에 지원하나 당시에는 남성만 현역병으로 지원하던 상황인지라 구급차 운전사로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처음에는 여성 자원 예비군에 복무했지만 1916년 세르비아 전선으로 파견되어 테살로니키 대화재 당시에서의 영웅적 구출작전으로 자선의 십자가 상을 두 번이나 받게 된다. 그러다 1917년 말라리아에 걸려 본국으로 송환되었다가 치료 중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런던에 있는 적십자 본부에서 자동차 학교의 사령관이 되었고 , 적십자사의 모든 구급차 운전사 교육을 담당하였다.그러나 전장을 종횡무진 누비다 갑자기 민간인의 삶으로 돌아온 그녀는 너무나 외로웠다.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군 복무도 끝났고, 참호에서 돌아온 남성들은 그녀가 잠시 공적인 지위를 누렸던 기회를 빼앗아 갔다. 그렇게 그녀는 별다른 방향 없이 떠돌아다니며 술을 마시고 마약을 남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서머싯의 낙농장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지만, 머리를 과감하게 짧게 자르고 셔츠와 넥타이를 매고 재킷 깃에 메달을 자랑스럽게 달고 다니며 계속해서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했다.
동시대 사람들은 그녀의 중성적인 모습을 매우 이상하게 여겨 매니시한 여성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지만, 그녀는 주류의 평가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에게 민간인의 삶이란 뻔하고 목적도 없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지루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하품이었고 그녀는 이 지루한 일상이 끝날 때까지 5년 동안 기다렸다.
2.3. 영국 파시스트당 창당
그렇게 노잼 그 자체의 일상을 보내던 와중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에 대한 소식과 러시아 내전의 볼셰비키 승리 소식이 그녀의 귀로 들려왔다. 이 상황에서 노동당의 총선 승리 소식이 결정타가 되었다. 그녀는 노동당이 계급갈등과 국제주의를 옹호하는 경향이 너무 강하다고 느꼈고 1923년 그녀는 우익 저널인 The Patriot에 반공주의자를 구하는 광고를 실었다.어느날의 봄에 정원을 가꾸고 있던 그녀는 영국이 외국인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파괴되고 있으며, 자유민주주의의 허울을 부술 준비가 된 용감한 애국자들의 결단력 있는 행동으로만 이 사태를 막을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일종의 중세 영국 민병대로 여겼던 극보수적 준군사 조직인 영국 파시스트당을 창당했다.
하지만 영국이 무슨 볼셰비즘의 환상적인 번식지도 아니고 서머싯의 한적한 마을에서 도예를 하던 중 갑자기 좌파의 위협을 느껴서 파시스트가 되었다는 사실은 조금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다. 물론 그녀는 명백한 반공주의자였지만 사실 그녀가 더 두려워했던 건 버킹엄 궁전 위에 펄럭이는 소련 국기보다도 영원히 자기 집 앞마당 정원사로서 여생을 보내야 하는 평범한 삶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치세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어머니 블랜치의 자금 지원을 받은 린톤-오만의 당은 주로 파업 중단과 극우 연설자 및 선동가들의 대중 출현이었을 뿐 정작 무솔리니의 친위대의 대표적 행동이었던 언론인 협박이나 민주적 선거 방해등은 거의 대부분 저지르지 않았다. 특히 국제 유대인 음모에 대해 적절히 대처하지 않았다며 모슬리를 포함, 다른 모든 영국 극단주의자들을 비난했던 반유대주의자 아놀드 리스가 운영하는 제국 파시스트 연맹에 밀리기 시작했다. 린톤-오만으로썬 무슨 짓을 해도 나치가 독가스를 사용해 지구상의 모든 유대인을 살해하려고 시도하기 몇 년 전부터 독가스 사용을 노골적으로 주장한 아놀드 리스와 같은 파시스트를 극단성에서 능가할 수 없었다. 좌파에 반대하고 혼란을 야기하는 것 외에는 뚜렷한 목표가 없었던 BF는 허둥댈 뿐이었다. 1926년 총파업 당시에 5천여명을 동원하며 정점을 찍고는 온건파는 일반적인 보수 단체로, 닐 프랜시스 호킨스로 대표되는 강경파는 모슬리의 영국 파시스트 연합이나 제국 파시스트 연맹으로 떠나가 버리면서 당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또한 당대에 한창 잘나가던 오스왈드 모슬리를 과거 노동당 활동 이력과 함께 공산주의자 냄새가 난다며 적대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모슬리의 화려한 유명세의 무게에 짓눌려 BF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BF를 새로운 조직으로 통합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린톤-오만은 모슬리의 검은셔츠단이 여성에게 BF에서 누렸던 것과 같은 명성과 자유를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무의미한 저항을 계속했다. 갈등은 필연적으로 격렬해졌고, 모슬리의 깡패 수십 명이 BF 본부에 들이닥쳐 사무실을 부수고 4명이 머리에 타격을 입는 부상을 입으면서 린톤-오만은 사실상 자포자기하게 된다. 모슬리는 이러한 상황의 영국 파시스트당을 두고는 "세 명의 노부인과 두 명의 사무실 직원"이라며 조롱했다.
2.4. 사망
이러한 사건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그녀의 건강을 급격히 악화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1932년 여름, 영국 파시스트당의 자체 신문은 그녀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보도했고 이듬해 메트로폴리탄 경찰은 그녀의 어머니가 린톤-오만이 마약, “술에 취한 난교와 바람직하지 않은 관행”으로 타락하고 돈을 훔치는 BF의 교묘한 회원들에 의해 타락하고 있다고 두려워했다고 전했다.
실제로도 린톤-오만은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했고 그 이후 1933년에 병에 걸려 영국 파시스트당에서 제외되었다. 1934년, 정보기관은 그녀가 심각한 알코올 관련 질병으로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추정했고 그렇게 그녀의 조직이 거의 소멸한 상태에서 1935년 카나리아 제도 산타브리기다 호텔에서 알코올 관련 질병으로 쓸쓸하게 사망하게 된다.
3. 평가
4. 여담
- 그녀의 활동은 여성운동과도 어느정도 관련이 있다. 물론 그녀가 페미니스트였냐면 그건 또 아니다. 그녀의 대의는 완전한 시민권과 투표권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국가를 위해 봉사할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었기에 여성의 권리 신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 오스왈드 모슬리와의 관계가 무척 안좋았던것과는 다르게 모슬리의 아들, 니콜라스 모슬리와의 사이는 꽤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