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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F. 케네디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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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44C9> 일생 | 생애 ( 1968년 미국 대선 ·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 ||
평가 | 평가 | |||
가족 | 아버지 조셉 패트릭 케네디 · 배우자 에설 케네디 · 장남 조 케네디 2세 · 차남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 형 조셉 P. 케네디 주니어 · 형 존 F. 케네디 · 남동생 테드 케네디 · 손자 조 케네디 3세, 코너 케네디 · 조카 존 F. 케네디 주니어 | |||
역대 선거 |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예비선거) | |||
관련 인물 | 존 F. 케네디 · 마릴린 먼로 · 지미 호파 · 마틴 루터 킹 · 조지프 매카시 · 존 에드거 후버 · 린든 B. 존슨 · 테드 케네디 · 랄프 야버러 · 조지 맥거번 · 에이브러햄 리비코프 · 밴스 하트케 · 케네스 오도넬 · 아서 슐레진저 · 니콜라스 카젠바흐 · 아치볼드 콕스 · 샘 지앙카나 · 카를로스 마르셀로 · 휴버트 험프리 · 유진 매카시 | |||
사건사고 | 로버트 F. 케네디 암살 사건 | |||
자유주의 · 케네디 가문 · 존 F. 케네디 · 테드 케네디 | }}}}}}}}} |
1. 개요
미국의 정치인 로버트 F. 케네디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다루는 문서이다.형 존 F. 케네디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미국 진보정치의 아이콘으로 종종 부각되며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사망 직후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그의 이미지가 다소 신화처럼 부풀려져있다는 입장 역시 대두되고있다.
2. 미국 법무부의 권한을 세우다
로버트 케네디는 법무장관으로 임명될 때 큰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법정에 출석해 변호 활동을 해본 적이 없었으며 법조 경력이 거의 없었던 35세의 무경력 청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때문에 케네디 가문의 족벌 정치 인사라는 비난도 받았지만, 로버트 케네디는 오늘날 역대 최고의 미국 법무장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한국의 법무부와 달리 미국 법무부는 하는 일이 많지 않은 부서로 손꼽힌다. 미국은 연방제 국가이기 때문에 교육이나 사법 문제 등은 대부분 주나 카운티 단위에서 해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1] 로버트 케네디가 법무장관으로 임명된 것도 어디까지나 연방 법무부의 권한을 이용하기보다는 Attorney General, 즉 대통령의 수석 변호인으로서 존 에드거 후버로부터 케네디를 지키는 역할을 맡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로버트 케네디는 법무장관으로 지내면서 오늘날까지 미국 법무부의 역할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업적과 관례를 세웠다.
2.1. 조직범죄와의 전쟁
많은 역사가들이 거론하다시피 토머스 E. 듀이나 피오렐로 라과디아처럼 일부 지역 정계 단위에서 마피아 문제를 처리한 정치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연방 법무부에서 조직 범죄, 마피아, 노동조합 부정부패 등의 문제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사람은 로버트 케네디 이전까지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심지어 1957년 노동조합의 부패를 위해 설치된 상원 메클레런 위원회의 위원들도 대부분 노동조합 비리 문제에 관심이 없었기에 신예 직원이었던 로버트 케네디에게 많은 권한을 주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이러한 미국 정치인들의 조직범죄에 대한 무관심에 비판의식을 갖고 1957년 메클레런 위원회 활동부터 1964년 법무장관 사임때까지 열정적으로 "조직 범죄와의 전쟁"을 벌였다.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1920년대 금주시대를 마피아의 최대 전성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마피아의 진짜 전성기는 1950~70년대였다. 이 시기에는 많은 정치인들이 마피아 문제에 쉬쉬했고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마저 마피아와 유착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로버트 케네디는 1957년 메클레런 위원회의 의사담당 진행자로서 지미 호파와 같은 노동조합 리더들을 청문회장에서 공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의 증언을 토대로 샘 지앙카나, 나르코 트라피칸테, 카를로스 마르셀로와 같은 미국의 마피아 보스를 직접적으로 기소하고자 했다. 이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는데 케네디 가문 자체도 마피아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고, 많은 정치인들이 마피아와의 연루 사실 때문에 공격을 주저했기 때문이다. 로버트 케네디의 이러한 열정적인 활동은 침묵에 빠져있는 미국 정치계에 경종을 울리고 미국인들에게 마피아와 노동조합, 정보기관의 유착관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 중대한 일로 평가받는다.
법무장관으로서 로버트 케네디가 보인 행보는 더욱 찬란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법무장관으로 취임하자마자 모든 마피아와의 전쟁을 벌였고, 미국 국적이 없었던 많은 마피아 보스들을 미국 국외로 추방시켜 일시적으로 마피아를 흔들리게 했다. 한밤중에 남부 마피아 보스 카를로스 마르셀로를 긴급 연행해 헬기에 태우고 중남미 정글 한복판에 떨어트린 것은 유명한 일화. 마피아들은 테드 케네디에게 편지를 보내 "네 형이 계속 마피아와의 전쟁을 하면 케네디 가문이 선거에 나설때마다 죽여버리겠다"라고 쓰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케네디는 법무장관을 지내면서 마피아와 노동조합의 유착 관계를 파헤치고 조직범죄를 척결하는 35명의 젊은 정예 변호인단을 꾸려 법무부 차원에서 마피아와 전쟁을 효과적으로 다루었고, 그의 법무장관 재임 기간동안 조직범죄 유죄율은 200% 증가했다. 그는 조직범죄 및 공갈 처리 부서(OCRS)를 설치해 조직범죄에 구체적으로 표적을 삼고 기소하는 개별 부서를 만들었다. 1961년의 주간도청법(Interstate Wire Act)은 불법도박을 적발하기 위해 주를 넘나드는 정부의 도청을 허가하도록 했는데, 이는 마피아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불법도박 산업에 큰 타격을 입혔다. 1963년에는 팀스터스의 회장 지미 호파를 기소해 감옥에 집어 넣으면서 부패한 노동조합 리더들에게도 정의의 심판을 내렸다.
비록 로버트 케네디가 1964년 법무장관을 사임하며 마피아와의 전쟁은 종식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미국 정치인으로서는 가장 적극적으로 조직범죄를 근절하려 노력한 인물이라고 평가받는다.
2.2. 흑인 민권운동에 대한 헌신
일부 논란이 있긴 하지만 로버트 케네디는 미국 흑인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백인이었다. 1968년 민주당 대선후보 예비선거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흑인의 90~95%에 가까운 지지를 받았는데 이정도로 흑인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제시 잭슨이나 버락 오바마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1968년 4월 마틴 루터 킹의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백인 정치인(매카시, 험프리, LBJ, 록펠러)은 야유나 무시를 당했지만 로버트 케네디만큼은 흑인에게 박수갈채와 환호를 받았다. 킹의 동지 중 하나이자 후일 UN대사를 지내게 되는 앤드루 영 목사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로버트 케네디 회의론자였으나 케네디에 대한 흑인들의 압도적인 신뢰, 킹 목사를 위한 케네디의 연설을 듣고 케네디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틀었다. 케네디가 죽자 많은 흑인들은 비통한 감정에 빠졌다. 오늘날에도 로버트 케네디는 세대나 지역을 가리지 않고 미국 흑인들에게 거의 신화에 가까운데, 2023년 11월 여론조사에서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의 출마를 지지하는 흑인의 비율이 25%에 달해 전국 평균인 6~9%를 크게 상회하였다.로버트 케네디가 처음부터 흑인 민권운동가와 흑인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19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흑인 민권운동과 케네디의 관계는 냉랭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흑인 민권운동가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는 명목으로 몇몇 흑인 민권운동가를 초청해 함께 오찬을 가졌지만, 이 자리에서 권위적으로 자신의 흑인 민권운동에 대한 업적만 강조하고 민주당 투표를 촉구하며 흑인 민권운동가들의 반감을 샀다. 흑인 민권운동의 지도자들은 그가 아일랜드계 차별과 흑인 차별이 다른데도 둘을 억지로 엮고 있으며 흑인 게토화 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는 그때 이후로 분명히 변했다. 케네디는 수많은 빈곤 퇴치 법안을 입법했고, 흑인 민권운동에 묵묵하고도 꾸준히 참석해 흑인 민권운동가들의 지지를 점진적으로 확보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법무장관 시절 도청 허가한 것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사죄했다. 킹 목사마저 말년에는 "나는 로버트 케네디가 처음부터 흑인 민권을 지지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선을 위한 믿음이 있다"라고 측근들에게 말하며 케네디에 대한 신뢰감을 드러냈다.
실제 로버트 케네디가 법무장관으로서 보여준 흑인 민권운동에 대한 기여는 찬란했다. 법무장관 시절 로버트 케네디는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에 맞서 흑인 민권을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하였으며, 남부 주의 주정부가 흑인 민권운동 시민가들을 체포하려는 것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였다. 법무장관 시절의 케네디는 미국 남부 민권 그룹인 프리덤 라이더스(Freedom Riders)를 지원했으며 민권을 옹호하는 연방 판사를 임명했다.
투표권에 대한 로버트 케네디의 보호도 두드러졌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마지막 3년간 연방 법무부는 흑인 투표권을 제한하고자 한 남부 주정부에 대해 단 한건의 소송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는 3년 남짓 법무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미시시피주 정부를 상대로만 24건의 투표권 제한 불복 소송을 제기하였고, 이 주의 상원의원인 제임스 이스트랜드 상원 법사위원장을 압박하며 1965년 투표권법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1964년에는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 에버렛 더크슨 상원의원과 함께 1964년 연방 민권법을 제정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로버트 케네디의 또다른 업적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연방 법무부의 권한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면서 주정부의 반발을 억누르고 후대에 법무부가 지나친 권한을 휘두르지 않게 하는 절묘한 관례를 세운 것이었다. 1963년 앨라배마 대학교 흑인 입학 거부 사태 때 조지 월리스는 연방 정부에 맞서는 "주의 권리"를 내세우기 위해 현장에 출두한 니콜라스 카젠바흐 법무차관에게 공격적으로 대하고 연방군에게 자신을 연행하던가 죽이라고 도발하였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는 바로 그점이 남부가 원하는 것임을 간파하고 연방군에게 무력을 사용하지 말고 월리스 지사를 연행하지도 말라고 명령하였다. 1963년 앨라배마 사태가 연방군 대 주방위군의 전쟁으로 번지지 않은 것에는 로버트 케네디의 역할이 컸다. 이 외에도 케네디는 연방 법무부의 개입을 최후의 수단으로만 사용했고 대게는 설득의 기술을 사용했다. 나름대로의 유연성을 보인 셈.
법무장관 사퇴 이후에는 후술하다시피 흑인 빈곤층 거주 지역을 방문하고 게토를 돕기 위한 푸드스탬프 자격 요건 완화 등의 핵심적인 입법안을 발의했다. 로버트 케네디에 대한 흑인의 지지는 이렇듯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2.3. 이 외의 업적
로버트 케네디는 법무장관으로서 연방검사를 감사하는 기관인 형사사법국(Office of Criminal Justice)을 설치해 법무부의 권한을 더욱 강화하였다. 또한, 로버트 케네디는 연방 대법원의 심리에서 기본권을 옹호하는 관례를 확립했다고 평가받는다. 로버트 케네디는 법무부의 초당적인 역할 역시 강화했는데, 그의 부패 기소로 최소한 2명의 민주당 의원이 의석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로버트 케네디는 "스타 장관"으로서 미국을 벗어나 전세계적으로 "범죄와 맞서 싸우는 젊은 법무장관"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 딱딱하고 굳은 법무부의 이미지를 개선했다.존 애쉬크로프트, 메릭 갈랜드 등 여러 법무장관이 로버트 케네디의 이런 "기념비적인" 업적을 칭찬했으며, 오늘날 법무부 건물도 로버트 F. 케네디 법무부청사(Robert F. Kennedy Department of Justice Building)이니 그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3. 정치인으로서의 평가
3.1. 빈곤층의 대변자
로버트 케네디가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또다른 이유는 빈곤층에 대한 헌신적인 입법 경력이다. 로버트 케네디는 법무장관이나 상원위원회 활동 도중에는 빈곤층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법무장관에서 사퇴하고 뉴욕주의 상원의원이 된 이후 갑자기 빈곤 문제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는데, 이는 그가 콜로라도, 중서부 게토, 미시시피 델타 유역 등을 여행하면서 받은 개인적인 충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1965년~1968년 사이 로버트 케네디는 미국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자신의 정치적 의제 설정에 아이디어를 얻었는데, 특히 당시 80% 가까운 거주민이 빈곤층이었던 미시시피 델타 유역(흑인 밀집 지역)의 방문은 그의 삶을 바꿨다. 케네디는 텅 빈 찬장과 냉장고, 영양 실조로 배가 부풀어오른 아이들,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를 보고 분노와 슬픔이 섞인 표정을 지었으며 그날 밤 가족들에게 "우리가 특권을 부여받았다는 점을 반드시 알아야한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케네디의 빈곤층에 대한 관심은 말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존슨 대통령의 1964년 경제기회법으로 설치된 지역사회 빈곤 퇴치 프로그램인 공동체 행동 프로그램(Community Action Programmes; CAPs)은 LBJ의 "위대한 사회"의 일환으로 잘 알려져있지만, 사실 존슨은 이 프로그램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도리어 사전트 슈라이버와 로버트 케네디의 공헌 정도가 적지 않다. 로버트 케네디는 연방 프로그램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해 도시 게토와 흑인 빈곤층 문제를 지역 단위에서 해결하도록 조정하고자 했다. 푸드스탬프 자격 요건 완화와 제도 정착 역시 로버트 케네디의 업적이다.
그러나 케네디가 전통적인 뉴딜 진보주의에 입각해서만 빈곤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민간의 노력을 무엇보다 중시했다. 로버트 케네디는 민간 회사를 게토와 흑인 거주지에 끌여들여야 진정으로 빈곤 문제를 퇴치할 수 있다고 여겼다. 대표적으로 케네디는 사기업이 빈곤층에게 100달러 이하의 월세로 방 3개짜리 아파트를 빈곤층에게 제공하면서 연간 2%의 세금 공제를 받는 사업을 제안하였다. 또 최소한 15%의 흑인 거주민을 포함하도록 하는 63만 가구 규모의 민간 주택단지 건설도 지지하였다. 1968년 대선 때도 케네디는 베트남 전쟁으로 지출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추가적인 정부 지출이 인플레이션을 야기할 것이라 주장하며 민간 기업이 빈곤을 해결하려고 할 때 더욱 효과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런 점에서 케네디가 최초의 신보수주의적 해결법을 옹호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2]
이러한 입법 경력 외에도 로버트 케네디가 빈곤 퇴치를 위해 직접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린든 B. 존슨의 "빈곤과의 전쟁"보다도 더 큰 관심과 존경을 불러일으켰다. 각 주 정부는 케네디가 방문한 도시와 마을의 허름한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며 비판받자 발빠르게 대응에 나서고자 했으며, 미시시피 상원의원 존 C. 스테니스마저도 로버트 케네디의 노력에 뻘줌하며 자신은 흑인 빈곤 퇴치를 위해 누구보다도 노력했다고 변명할 수 밖에 없었다. 많은 빈곤층은 케네디의 노력을 존경했는데, 로버트 케네디가 역사상 처음으로 빈곤층을 집집마다 정기적으로 방문해 형편을 직접 물어본 정치가였기 때문이다. 1968년 예비선거에서 빈곤층 게토 지역은 로버트 케네디에게 거의 100%에 가까운 표를 던졌다.
슬프게도 로버트 케네디의 사망 이후, 대부분의 주류 미국인들은 흑인 게토화와 빈곤층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로널드 레이건 시대를 거치며 빈부격차가 급등하자 로버트 케네디의 이러한 빈곤 문제에 대한 관심은 더욱이 높게 평가되었다.
3.2.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입장
저는 베트남 전쟁에서 섣불리 철군하거나 항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2년간 저는 우리군이 베트남에서 승리도, 평화도, 미국의 이익도 가져오지 못하고 오직 청년 세대의 피만을 보고 있다는 점이 우려됩니다. 또한, 저는 미국이
광범위한 부패가 퍼져있어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국가를 위해 미국이 억지로 싸워 더 많은 미국 청년들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점이 우려됩니다. 저는 용감하게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미군 장병들께 우리가 열렬하게 "명예로운 평화"[3]를 추구할 방도를 찾고 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로버트 F. 케네디의 1968년 대선 홍보용 책자 中
로버트 F. 케네디의 1968년 대선 홍보용 책자 中
저는 베트남 전쟁이 더욱 장기화된다면 더욱 많은 미국 청년세대가 목숨을 잃게 될 것이 걱정됩니다. 저희는 우리의 보물을 더 많이 잃게 될 것이고 전쟁의 사방에 널려있는 비통함과 증오로 인해 수십만의 베트남인이 더 학살될 것입니다. 타키투스가 로마에 대해 말한 것처럼, 베트남인들은 "그들은 사막을 만들고 그것을 평화라고 불렀다"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바라는 미국의 모습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 동남아시아 뿐만 아니라, 고국 미국에서도 이 나라를 위해 우리를 인도할 새로운 생명, 새로운 빛을 맞이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저에게 도움을 주신다면 저도 당신을 도울 것임을 맹세드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미국이 도래할 것임도 말입니다!
1968년 3월 18일 캔자스시티 연설 中[4]
최근 많은 대중이나 역사가들이 로버트 케네디를
베트남 전쟁의 초기 반대자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으나, 로버트 케네디가 베트남 전쟁에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다소 논쟁거리가 된다. 일단 로버트 케네디가 베트남 전쟁의 초기 반대자였다고 볼 수는 없다. 1964년 통킹만 결의안 때 그의 동생
테드 케네디가 찬성투표했고 로버트는 그때 의원은 아니었지만 존슨의 베트남 전쟁 수행을 지지하였다.[5][6] 베트남 전쟁과는 상관이 없는 얘기긴 하지만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테이프에서 로버트 케네디가 핵전쟁은 최대한 피하자고 주장했지만, 반공 강경파의 입장을 고수했다는 점이 밝혀진 바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로버트 케네디가
베트남 전쟁을 비롯한 공산권과의 갈등에서 평화주의자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연성이 부족한 주장이다.1968년 3월 18일 캔자스시티 연설 中[4]
1966년까지도 로버트 케네디는 계속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베트남 전쟁 수행을 지지하였다. 심지어 1968년 연초까지도 그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아주 명확한 입장을 밝히고 있지 않았다. 물론 로버트 케네디는 베트남 전쟁을 비판하긴 했지만, 결코 철수나 휴전을 지지하지 않았다. 로버트 케네디는 스스로도 인정했다시피, 린든 B. 존슨을 압박할 용도로만 베트남 전쟁을 비판했다. 케네디는 1968년 3월 31일 존슨이 3선 불출마를 선언한 날 밤 최측근과의 회의에서 "우리는 빠르게 논의를 베트남 전쟁에서 빈곤이나 흑인 민권 등으로 옮겨야한다"라고 발언했는데, 이는 케네디의 베트남 전쟁 반대에 대한 진실성을 다소 의심케하는 것이다. 즉 기회주의적인 면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유진 매카시가 진정한 초기 반대파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유진 매카시는 1967년 출마를 선언하면서 "베트남 전쟁 즉각 중단"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구정공세 직후 가장 큰 이익을 본 후보도 매카시였고, 대중의 시각과 달리 1968년 혁명의 주도자였던 신좌파 히피 반전 그룹은 로버트 케네디보다는 유진 매카시를 더 선호했다. 일각에서는 로버트 케네디가 베트남전쟁 "철수"를 지지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 당시 매카시도 급진적인 철수는 지지하지 않았다. 매카시는 소수 주둔군이 남아 남베트남 군을 지원하는 방식을 선호했으며 로버트 케네디는 그보다도 보수적인 방안을 지지했다. 로버트 케네디가 말한 해결책들을 모아서 본다면 휴버트 험프리나 리처드 닉슨과 다를것이 거의 없다. 즉 최소한 반전좌파라고 생각되기 힘들다.
로버트 케네디는 진정한 반전좌파 후보자였던 매카시와 차별화를 하기 위해 최대한 베트남 전쟁 논의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의 여러 연설이나 주장을 들어보면 실질적인 방안이나 대책이 있다기보다는 매우 추상적이면서 감동적인 수사에 의존하는 면이 강하다. 대신 케네디는 자신이 상원의원으로서 계속 대변해왔던 빈곤층 구제나 흑인 민권운동 경력을 대선 운동에 끌어들이려고 노력했고, 더 나아가 매카시가 베트남 전쟁을 너무 급진적으로 반대하고 있고 베트남 전쟁 반대 외에 마땅한 국내 정책이 없다는 이유로 그를 공격했다. 1968년 6월 6일 로버트 케네디가 죽을때까지 케네디는 단 한번도 베트남 전쟁 철수를 주장한 적이 없고, 그날까지도 매카시는 반전좌파의 후보로, 케네디는 보다 폭 넓은 "소외된 자들의 후보"로 스스로를 정체성화했다.
즉, 우리는 로버트 케네디의 진정한 입장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 알려진것만큼 반대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는 몇달에 한번 꼴로 계속 자신의 입장을 바꿨고, 주장 자체가 추상적이고 논의를 회피했던만큼 케네디가 대선 본선까지 올라갔다면 베트남 전쟁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을 지 알 수 없다.
이런 로버트 케네디가 "반전파"로 알려지게 된 것은, 유진 매카시에 대한 기억이 세대를 거치며 흐려졌고, 대신 로버트 케네디가 존슨이나 험프리 등에 반대했다는 사실만이 기억되고 있는 탓이 크다. 그의 측근인 조지 맥거번이 "베트남 전쟁 90일 내 즉각 중지 및 미군 전면 철수"라는 당시로서도 매우 좌파적인 대외 정책을 내세웠고, 이때 로버트 케네디나 맥거번을 지지했던 많은 젊은 20대들이 어엿한 정치인이 된 중년에 빌 클린턴 행정부때 입각하며[7] 카멜롯 신화를 확대 전파한 것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1968년에 다수가 베트남 전쟁 철수를 지지했다는[8] 잘못된 인식도 퍼지면서 로버트 케네디의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입장이 왜곡되고 있는 면이 크다.
4. 인간됨
4.1. 여성 관계
젊은 나이에 잘생긴 얼굴, 부와 권력을 한 몸에 쥐고 있었던 대권주자이다보니 젊은 시절 염문이 끊이지 않았지만 주변 가족과 정치적 동료, 친구들의 증언을 종합하자면 케네디 가문에서는 그나마 여성 관계가 가장 양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형제 2명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형 존 F. 케네디는 아버지 조셉 P. 케네디의 여성 편력을 물려받은데다 에디슨병 치료를 위한 스테로이드제 복용의 부작용으로 성욕이 너무 높아져서 대통령 시절 섹스 중독이었다는게 정설에 가깝고, 테드 케네디는 1969년 7월 "차파퀴딕 사건"[9]에 휘말리기도 했고 1990년대에도 젊은 여비서와 놀아나다 파파라치에 찍혀 조롱감이 되는 추문을 일으켰지만 최소한 로버트 케네디는 일단 공식적으로는 그러한 스캔들을 겪은 적이 없다.로버트 케네디는 형 존 F. 케네디와 나이 차이가 8살이나 났고 동생 테드와도 8살 차이였다. 그래서 조셉 P. 케네디로부터 유독 소외를 받았는데, 이 때문에 로버트 케네디가 어릴 적 가톨릭에 대한 신앙심이 깊어졌고 그 영향으로 여성 관계도 상당히 깨끗했다고 보는 분석이 많다. 많은 증언에 의하면 그는 형제는 물론 가족 중 가장 가톨릭 신앙이 깊었다고 하는데 보수적인 가톨릭 교리에 여성 관계도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대신 부부 사이에 금슬이 엄청나게 좋았는지 40대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도 무려 7남 4녀를 낳았다. 로버트 케네디의 부인인 에델 케네디도 로버트 케네디를 "가정적인 남편"이라고 여러차례 증언했다. 히스토리 채널의 미니 시리즈 <케네디가>(Kennedys)에서도 이를 반영해 로버트 케네디는 형과 달리 가정적이고 여성 문제도 깨끗한 청년으로 나온다.
그러나 "케네디 가문"이라는 이름 값 때문에 로버트 케네디도 다른 케네디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성 관계가 상당히 추잡했다는 말도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마릴린 먼로와의 염문인데, 마릴린 먼로와 가장 마지막으로 만난 인물 중 하나가 로버트 케네디였기에 미국에서는 로버트 케네디가 마릴린 먼로와의 섹스 스캔들을 숨기기 위해 청부살인한게 아니냐는 음모론이 유명하다. 또다른 음모론으로는, 연예인을 사찰하던 존 에드거 후버가 우연히 로버트 케네디와 마릴린 먼로의 정사를 알아챘고 이를 빌미로 로버트 케네디를 협박해 마틴 루터 킹 도청을 요구했다는 것이 있다. 또 정계 유력인사들의 파티에 자주 초대 받았던 배우 리처드 버튼의 증언에 의하면 언론 담당이었던 피어 샐린저(Pierre Salinger)가 연 파티에서 20세기 최고의 발레리나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마고 폰테인(Margot Fonteyn)을 침실로 헐레벌떡 데려가 급히 관계를 맺고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것을 보면 케네디 가문 치고는 여성 관계가 비교적 정상적인 편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가정적인 사람은 아니었던 듯하다.
[1]
이런 이유 때문에 카터 대통령이 설치한 교육부는 미국에서 가장 쓸모없는 부서라는 악평을 자랑하고 그 외에도 주택도시개발부나 에너지부도 종종 폐지되어야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2]
사회주의자였던
마틴 루터 킹은 로버트 케네디의 제안에 회의적이었으며 공기업만이 진정으로 흑인 빈곤을 떨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킹 목사의 암살 이후 1990년대까지 흑인 민권운동을 이끈 지도자
제시 잭슨은 로버트 케네디의 제안에 비교적 호의적이었고, "블랙 자본주의"(Black capitalism)이라 불리는 개념이 등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3]
리처드 닉슨과 같은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다.
[4]
케네디는 종종 이런 감동적이고 추상적인 연설로 교묘하게 전쟁에 대한 자세한 입장 표명을 회피하는데 능수능란했다.
[5]
당시 월남전 반대운동을 벌였던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는 어니스트 그뤼닝(Ernest Gruening) 알래스카 상원의원과 웨인 모스(Wayne Morse) 오리건 상원의원이 진정한 초기 베트남전 반대파라고 주장했는데, 두 사람은 통킹만 결의안에 반대한 유이한 상원의원이었다. 게일로드 넬슨이나
조지 맥거번,
제이콥 재비츠,
J. 윌리엄 풀브라이트 등은 통킹만 결의안에 처음에는 반대했다가 막판에 돌아섰는데 이들도 넓은 의미에서 초기 반대파라고 볼 수 있다.
[6]
오히려 전쟁 찬성파로 알려져있는
휴버트 험프리야말로 초기 반대파였다고 할만하다. 존슨의 부통령직을 수행하며 목소리를 낮추긴 했지만 일단 베트남 전쟁이 망할 것이라는걸 정확히 예상한 초기 정치인 중 하나가 험프리였다는 점은 잘 알려져있지 않다.
참고 자료
[7]
빌 클린턴부터 20대 때 텍사스 주에서 로버트 케네디와 조지 맥거번의 선거운동을 도운 반전좌파 출신이다.
[8]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 인식은 컸지만, 사실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40% 정도는 현상 유지, 40% 정도는 확전, 20%만이 전면 철수를 지지했다. 또 1968년 대선날까지 미국인의 최소 40% 정도는 존슨의 베트남 전쟁 수행에 문제가 없다고 답했다. 닉슨이
침묵하는 다수를 주장한 것이 이런 배경을 둔 것이다.
[9]
테드 케네디가 여비서를 태우고 드라이브를 하다가 바닷물에 차를 빠트렸는데, 여비서를 구출하지도, 자동차 사고를 경찰에 신고하지도 않고 자기만 혼자 빠져나온 사건을 의미한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은 그가 여비서와 카섹스나 염문 혹은 임신 등을 숨기려고 일부러 여비서를 죽게 내버려뒀다고 의심했고 이 사건으로 테드 케네디의 대권 가도는 끝장난다. 다만, 테드 케네디의 전기작가들에 의하면 테드 케네디가 신고를 하지 않은 것은 여비서와의 추문보다는 음주로 인해 의사판단능력이 떨어졌고 음주운전을 한 사실이 걸리면 골치가 아파져서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