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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14:25:33

로버트 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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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오리의 수상 이력 / 역대 등번호
{{{#!foldi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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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1995 2000 2001
2002 2005 2007

베스트팀
파일:NBA 로고.svg

휴스턴 로키츠 등번호 25번
앤서니 보위
(1989~1990)
로버트 오리
(1992~1996)
무치 노리스
(2005~2006)
피닉스 선즈 등번호 25번
올리버 밀러
(1992~1994)
로버트 오리
(1996~1997)
돈 매클레인
(2000)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등번호 5번
두에인 쿠퍼
(1992~1993)
로버트 오리
(1997~2003)
이메 우도카
(2004)
샌안토니오 스퍼스 등번호 5번
앤서니 골드와이어
(2002)
로버트 오리
(2003~2007)
이메 우도카
(2007~2009, 2010~2011)
샌안토니오 스퍼스 등번호 25번
알렉스 스케일
(2005)
로버트 오리
(2007~2008)
제임스 앤더슨
(201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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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로버트오리.jpg
로버트 키스 오리
Robert Keith Horry
출생 1970년 8월 25일 ([age(1970-08-25)]세)
메릴랜드주 하트포드 카운티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출신학교 앨라배마 대학교
신장 208cm (6' 10")
체중 109kg (240 lbs)
포지션 파워 포워드 / 스몰 포워드
드래프트 1992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1순위
휴스턴 로키츠 지명
소속 팀 휴스턴 로키츠 (1992~1996)
피닉스 선즈 (1996~1997)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1997~2003)
샌안토니오 스퍼스 (2003~2008)
등번호 25번 - 휴스턴 / 피닉스 / 샌안토니오[1]
5번 - 레이커스 / 샌안토니오[2]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3. 선수 시절4. 수상 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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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전 농구선수. 현역 시절 포지션은 포워드로, 출중한 스탯을 기록하거나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빅 샷을 꽂을 수 있는 클러치 슈터로 이름 높았다. 일명 '오리샷'. 이는 7회 NBA 파이널 우승이 말해준다.[3]

별명은 'Big Shot Rob'[4]이 있다.

2. 생애

1970년에 메릴랜드 하트포드 카운티에서 아버지인 군인 로버트 오리 시니어와 어머니 렐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부모가 이혼하여 아버지를 따라 사우스캐롤라이나를 거쳐 앨라배마 안달루시아로 갔고, 아버지는 조지아주 포트 베닝[5]으로 발령났다.

1988년에 안달루시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앨라배마 대학교에 진학한 후, 윔프 샌더슨[6] 감독 밑에서 가르침을 받으며 실력이 점차 상승해 3학년 때부터 편입생 라트렐 스프리웰과 함께 뛰면서 1992년 올- SEC 세컨드 팀에 뽑혔다.

3. 선수 시절

1992 드래프트에서 휴스턴 로키츠에 1라운드 11순위로 지명받아 입단한 후 루키 시즌부터 탁월한 자질을 보이며 평균 10.1득점 5.0리바운드 2.4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당시 휴스턴은 에이스 하킴 올라주원의 주도 하에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오리 역시 1994 NBA 파이널 1995 NBA 파이널 2시즌 연속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7] 1995년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1차전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상대로 역전 결승 점프 슛을 성공시키고, 1995 파이널 3차전 경기 종료 14초 전 1점차에서 4점차로 벌리는 3점 슛을 성공시키며 클러치 강심장 전설을 쓰기 시작한다.[8]


그 후 1996-97 시즌에는 피닉스 선즈로 이적하였으나 당시 감독이었던 대니 에인지의 얼굴에 수건을 투척하고 폭언을 하는 등[9] 물의를 일으켜 2경기 출장정지를 당하자 팬들에게 엄청 욕을 먹었고, 결국 시즌 중반에 세드릭 세발로스와 맞트레이드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이적한 첫 시즌에 평균 7.4득점에 그쳤지만 플레이오프, 특히 4쿼터에는 탁월한 클러치 능력을 보여줬다.

파일:external/images2.fanpop.com/Robert-Horry-s-game-winner-vs-Kings-los-angeles-lakers-8858019-666-579.jpg

파일:로버트 오리 버저비터.gif
대표적인 장면은 2001-02 시즌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 4차전에서 새크라멘토 킹스를 울린 한방이다. 당시 2승 1패로 앞서있던 새크라멘토는 4차전 종료 직전까지 99-97로 리드해 승리를 눈앞에 뒀다. 마지막 공격에 나선 레이커스는 코비 브라이언트 샤킬 오닐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고, 2초를 남겨둔 상황에서 블라디 디박이 공중볼을 외곽으로 쳐냈다.[10] 그러나 공교롭게도 디박이 쳐낸 공은 3점 라인 좌측에 서있던 오리에게 연결됐고 오리가 던진 마지막 3점 슛은 버저비터로 이어지며 경기는 100-99, 레이커스의 극적인 역전승으로 끝났다. 그 외에도 2001 NBA 파이널 3차전 마지막에 4점차로 벌리는 3점 슛, 2002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 3차전 역전 위닝 3점 슛 등 플레이오프에서 중요한 순간마다 상대에게 비수를 꽂았다.

2003년에 FA 계약으로 샌안토니오 스퍼스로 이적 후 2005 NBA 파이널에서 리핏을 노리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를 상대로 시리즈 스코어 2-2의 팽팽한 대결 후 5차전 원정에서 또 역전 결승 3점 슛을 성공시키고 팀은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2007 NBA 파이널에서 르브론 제임스가 이끄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상대로 4승 무패 스윕을 거두며 마지막 우승반지를 차지했다. 우승 7회의 대업을 이룬 뒤, 2007-08 시즌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4. 수상 내역

수상 내역
파일:NBA-Champion.png NBA 챔피언 7회 (1994-1995, 2000-2002, 2005, 2007)
파일:NBA 로고.svg NBA 올-루키 세컨드 팀 (1993)

[1] 2007-08 시즌 [2] 2003~2007 [3] 과거 보스턴 셀틱스 왕조의 구성원들을 제외하고 일곱 번의 우승을 차지한 선수는 없다. [4] 영어에서 로버트의 애칭은 Rob, Bob 모두 쓰이며, 당시 이 별명을 처음 지어준 동료 팀 던컨 역시 'Big Shot Rob'과 'Big Shot Bob'을 혼용했다. [5] 미합중국 육군의 기지 중 하나이며 2023년 5월 포트 무어로 이름을 변경했다. 여러 개의 육군부대와 군사학교, 군병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보병 신병훈련소가 있다. [6] 1937년 8월 8일 앨라배마 주 플로렌스 출생. 에블린 크리스천 대학교 및 플로렌스 주립대학교를 다닌 뒤 1960년부터 앨라배마 대학교의 수습 코치로 들어온 이래 1964년 코치, 1980년 감독으로 각각 승진하며 1992년까지 32년을 재직했고, 특히 감독으로 재직하는 12년 동안 오리와 라트렐 스프리웰 외에 마크 갓프리드, 데릭 맥키, 제임스 로빈슨, 데이빗 벤와 등을 발굴/육성했다. 1994년 아칸소 대학교 리틀록 캠퍼스 감독으로 현장 복귀 후 임기 5년 동안 데릭 피셔 등을 육성하며 1995-96 시즌에 NIT로 진출시킨 적 있다. 화려한 체크무늬 재킷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데다 1980년대 내내 소니 스미스 오번대 감독과 라이벌이었으며, 전 립스컴 대학교 감독 스캇 샌더슨이 그의 아들이다. [7] 케니 스미스 - 버논 맥스웰의 가드진, 파워포워드 겸 블루워커 오티스 소프, 영건 로버트 호리가 올라주원을 지원했다. 샘 카셀은 식스맨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8] 당시 주전 라인업은 부동의 센터 하킴 올라주원과 슈팅 가드 클라이드 드렉슬러를 필두로, 포인트 가드 케니 스미스, 백업으로 버논 맥스웰, 샘 카셀 등이 있었다. [9] 여담으로 당시 에인지는 나이가 들고 감독 입장인만큼 소속팀 선수랑 멱살잡고 싸울수도 없기에 당혹스러워하는 반응만 보였는데, 현역 시절이라면 절대 얌전히 넘어갈 리가 없었을 것이다. 에인지는 현역시절에 216cm 거구 센터인 트리 롤린스에게 먼저 욕을 하며 시비를 걸었다가 그를 테이크다운하고 싸우거나 마이클 조던과도 싸움 직전까지 간 적이 있을 정도로 성깔이 있었다. 오죽하면 1980년대 당시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서 빌 레임비어, 릭 마혼, 모리스 루카스, 엑제비어 맥대니얼 등과 함께 에인지를 언급하며 'NBA의 깡패들'이란 기사를 낼 정도였다. [10] 저 상황에서 디박은 불리한 위치라 공을 잡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공을 최대한 림과 먼곳으로 쳐내는게 상대의 풋백득점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조치였다. 디박 입장에선 영리하게 대처를 잘 한 것인데, 하필이면 딱 저 위치에 강심장으로 유명한 오리가 있었던 것이 불운했던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