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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8:40:55

랄프 드 스태퍼드

<colbgcolor=#F9B928><colcolor=#000000> 초대 스태퍼드 백작
랄프 드 스태퍼드
Ralph de Stafford, 1st Earl of Stafford
파일:랄프 드 스태퍼드.jpg
성명 랄프 드 스태퍼드
Ralph de Stafford
생몰년도 1301년 9월 24일 ~ 1372년 8월 31일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스태퍼드셔 스태퍼드 성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켄트 톤브리지
아버지 에드문드 폰 스태퍼드
어머니 마거릿 바세트
형제 리처드 스태퍼드
부인 캐서린 드 하스탕, 마거릿 드 오들리
자녀 마거릿, 조안, 랄프, , 엘리자베스, 베아트리체, 조안, 캐서린
직위 스태퍼드 백작, 왕실의 세네샬, 가스코뉴 보안관, 가터 기사단 단원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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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활약했다.

2. 생애

1301년 9월 24일 잉글랜드 왕국 스태퍼드셔 스태퍼드 성에서 제1대 스태퍼드 남작 에드문드 폰 스태퍼드와 제1대 바셋 남작 랄프 바셋의 딸인 마거릿의 장자로 출생했다. 형제로 리처드 스태퍼드[1]가 있었다. 아버지 에드문드는 웨스트 미들랜즈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귀족으로, 스태퍼드셔, 워릭셔, 옥스퍼드셔와 링콘셔에 여러 영지를 보유했다. 또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가 벌인 스코틀랜드 원정에서 두각을 드러내 1299년 제1대 스태퍼드 남작으로 지명되었다.

랄프는 7살 때 아버지가 병사한 뒤 어머니 마거릿이 토머스 드 피프와 재혼하면서 잉글랜드 중부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후 어머니 친척들의 보살핌을 받았고, 1325년 계부와 함께 어머니의 형제인 제2대 바셋 남작 랄프 바셋의 수행원이 되었다. 1327년 기사 작위를 받았고, 1328년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 참전했다. 1330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 프랑스의 이자벨의 애인으로서 강력한 권세를 누리고 있던 로저 모티머를 타도하기 위한 음모에 가담해, 그해 10월 19일 이자벨과 모티머가 구금되는 데 일조했다. 랄프는 에드워드 3세가 어머니와 모티머를 밀어내고 실권을 잡아야 한다고 설득했다고 하며, 에드워드 3세는 그런 그를 자신의 친구이자 심복으로 여겼다.

1332년 여름, 랄프는 스태퍼드셔의 보안관으로 선임된 뒤 제1대 글로스터 백작 휴 드 오들리와 함께 스코틀랜드로 파견되었다. 그해 8월, 그는 스코틀랜드 왕위를 주장한 에드워드 발리올의 군대에 가담해 더플린 무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하고 에드워드 발리올이 스코틀랜드 국왕이 되는 데 일조했다. 이후 발리올이 정변으로 축출되었고, 그는 1334~1336년 발리올을 복위시키기 위한 3차례의 원정에 모두 참전했다.

1338~1340년 에드워드 3세의 플란데런 백국 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장 프루아사르는 그의 연대기에서 랄프를 그의 남동생 리처드 스태퍼드와 혼동했기 때문에, 이 시기의 특정 사건에서 언급되는 '스태퍼드경'이 그인지, 아니면 리처드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다만 1340년 6월 24일에 랄프가 슬로이스 해전에 참여해 대승에 일조한 것만은 분명하다.

1340년 11월 30일 군자금이 떨어진 에드워드 3세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왕과 대신들간의 대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 존 드 스트랫퍼드에게 2번 파견되어 왕 앞에 출두하라고 설득했지만, 캔터베리 대주교는 의회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싶다며 거절했다. 한편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인사들을 요직에 앉히기로 마음먹고, 관리 경험이 거의 없는 군인들을 중요한 직위에 앉혔다. 랄프 역시 1341년 1월 6일 왕실의 세네샬로 발탁되었다. 1341년 4월 23일, 랄프는 새로 임명된 다른 2명의 관리와 함께 의회에 들어와서 캔터버리 대주교가 의회에 참석하는 걸 막으려 했다. 그러자 제7대 서리 백작 존 드 워렌이 "하인은 상원에 자리를 잡을 수 없다"며 나가달라고 요구했고, 랄프는 굴욕감을 품으며 의회를 떠났다. 그는 이후에도 에드워드 3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에드워드 3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랄프에게 워릭셔와 스태퍼드셔에서 무역 특권을 누릴 권한을 부여했다.

1342년 8월, 랄프는 에드워드 3세의 지시에 따라 150명의 사병을 이끌고 브르타뉴 공작위 계승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브르타뉴에 상륙했다. 이후 노샘프턴 백작 윌리엄 드 보훈의 지휘하에 브레스트 항구를 구출하는 데 기여했고, 그 해 9월 30일 모를레 전투에 참전해 승리에 기여했다. 그러나 반 공방전을 치르던 중 프랑스군에게 생포되었고, 많은 부하가 전사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에 사로잡힌 브르타뉴 출신 프랑스 장군 올리비에 4세 드 클리송과 교환되었다. 1343년 1월 프랑스 측 협상단과 협의한 끝에 휴전을 맺기로 합의했다. 1343년 5월 20일 아비뇽 유수 중이던 교황 클레멘스 6세에게 사절단 대표로 파견되어 프랑스 왕위에 대한 에드워드 3세의 주장을 옹호했다. 그 해 여름 플란데런으로 가서 독일 제후들과 잉글랜드의 관계를 강화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플란데런에서 임무를 마친 뒤 스코틀랜드군에 의해 포위된 록마벤 성을 구하고자 출진한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원정에 참여했지만, 도착하기 전에 스코틀랜드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나면서 특별한 공적을 세우지는 못했다. 1344년 4월, 사병 200여 명을 이끌고 가스코뉴로 잠시 갔다가 같은 해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자신의 영지를 관리했고, 웨스트 미들랜즈에서 여러 왕실 임무를 수행했다.

1345년 3월 29일 왕실의 세네샬 직위를 사임하고 가스코뉴의 세네샬로 임명되었다. 이후 브리스톨에서 동생 리처드와 함께 14척의 배를 이끌고 보르도로 향한 그는 7월 1일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군대에 합류한 뒤 헨리의 부관으로서 활동했다. 특히 10월 21일 오베르슈 전투에서 헨리의 지휘하에 월터 매니와 함께 부대를 이끌어 아군의 대승에 일조했다. 이후 랄프는 가론강 론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프랑스 남서부의 요충지인 에기용으로 진군했다. 주민들은 잉글랜드군이 접근해오자 수비대를 축출한 뒤 그들에게 성문을 열었다.

1346년 초,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후계자이자 노르망디 공작인 은 적을 남부 프랑스에서 몰아내라는 명령을 받들어 오를레앙에 15,000~2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집결시켰다. 그는 먼저 에기용을 탈환한 뒤 라 레울을 공략하고 뒤이어 가스코뉴의 수도인 보르도를 공략하기로 했다. 프랑스군은 장 왕자의 지휘하에 아쟁에서 가론 계곡을 따라 행진하여 4월 1일 에기용에 도착했다. 랄프는 이에 맞서 300명의 중장병과 600명의 장궁병을 통해 요새 수비에 만전을 기했다.

수적으로는 프랑스군이 압도적인 우위였지만, 장은 에기용을 완전히 고립시키기엔 지형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론 강과 론 강이 서로 합류하면서 3개의 서로 다른 구역을 형성했기에, 도시를 포위하려면 이 3개 구역 모두에 병력을 배치해야 했다. 그렇게 했다가는 각개 격파될 우려가 있었기에 서로 긴밀하게 협력해야 했지만, 강이 가로막고 있어서 가론 강과 론 강 위에 새로운 다리를 건설해야 했다. 론 강을 잇는 다리 공사는 잉글랜드 수비대가 훼방을 놓는 통에 지연되었지만, 5월 말에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가론 강을 잇는 다리는 적 수비대가 장악하고 있던 터라 쉽사리 장악되지 않았다.

더욱이 워낙 많은 병사들이 몰려든 터라 프랑스군이 가지고 온 보급품은 금세 바닥났고, 주변 지역 역시 황폐화되었기에 병참을 전적으로 강에 의존해야했다. 라 라울에 기반을 둔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프랑스 식량 운송부대를 지속적으로 습격하고 그들의 보급품을 가로챘다. 여기에 프랑스 숙영지 내부에서 이질이 발생해 많은 병사가 죽어갔다. 6월 중순 프랑스군이 2척의 대형 보급 바지선에 보급품을 채워서 가론 강 서쪽에 주둔한 병사들에게 전달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적 수비대가 지키고 있는 가론 강 다리 아래를 통과해야 했다. 프랑스군은 강행돌파를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바지선들은 파괴되었다. 이에 격분한 프랑스군이 달려들자 수비대는 후퇴했지만, 많은 병사가 성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지 못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프랑스군은 이후에도 공성전을 이어갔지만 좀처럼 함락될 기미가 없었다.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이 소량의 보급품과 증원군을 야간에 강을 통해 수비대에 전달하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프랑스군은 에기용 남쪽 방어선에 최소 12개의 투석기를 동원해 포격을 가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7월에는 3개의 공성탑을 바지선에 태워서 에기용 북쪽 방어선을 공격했지만, 공성탑들이 적 투석기가 날린 바위에 맞아 모조리 파괴되는 바람에 실패했다.

장은 도시를 점령할 때까지 공성전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엄숙하게 맹세했지만,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7월 초 프랑스군 보급로를 경비하던 바하몽 성이 잉글랜드군의 기습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7월 말 아쟁의 세네샬인 로베르 드 우데토가 2,000명의 장병을 이끌고 탈환을 시도했지만, 가이야르 1세 드 듀퐁이 이끄는 수비대가 이를 격파하고 로베르를 생포했다. 이로 인해 보급로가 끊겨버리자, 프랑스군은 굶주렸고 수많은 말이 사료 부족으로 죽었으며, 이질은 갈수록 널리 퍼졌다. 이에 절망한 많은 장병들은 끊임없이 탈영했다.

그러던 중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1346년 7월 12일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 약탈 행진을 이어간 끝에 7월 26일 노르망디에서 루앙 다음으로 큰 도시인 캉을 점령하고 주민 수천명을 학살하고 200여 명의 기사와 향사들과 수많은 도시 유력자들을 생포하자( 1차 캉 공방전), 필리프 6세는 아들 장에게 당장 에기용 포위를 중단하고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장은 에기용을 공략할 때까지 공성전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느님께 맹세했다며 거부했지만, 8월 12일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32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8월 14일, 장은 지난날 아버지 랭커스터 공작이 사망하면서 랭거스터 공작위를 상속받은 그로스몬트의 헨리에게 지역 휴전을 제안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곤경을 사전에 파악한 헨리는 거부했다. 8월 20일, 장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북쪽으로 철수했다. 에기용 수비대를 비롯한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이들을 추적해 수많은 보급품과 공성 무기 및 말 등을 포획하고 장의 개인 수하물 일부를 입수했다. 프랑스군이 론 강 상류에 설치했던 소규모 요새들은 잉글랜드군에 공략되었다.

에기용 공방전이 한창이던 1346년 7월, 랄프는 에기용 수비를 월터 매니에게 맡긴 뒤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후 군대를 이끌고 노르망디에 상륙한 그는 바르플뢰르 항구를 공략한 뒤 동생 리처드와 함께 에드워드 3세에게 가담했고, 그 해 8월 26일 크레시 전투에 참전해 왕이 직접 지휘하는 분견대의 일원으로서 승리에 기여했다. 1346년 10월 1차 칼레 공방전에 참전했다가 1347년 초 '왕의 극비 문제 해결'을 위해 잉글랜드로 갔다. 학자들은 이 임무는 자금 조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의회에 참석하는 것일 거라고 추정한다. 1347년 2월, 맨티스 백작과 파이프 백작의 재판에 참석하라는 왕의 지시를 따라 스코틀랜드로 파견되었고, 그해 봄에 칼레를 포위한 왕의 군대에 복귀해 칼레를 해상에서 봉쇄한 해군 사령관에 선임되었다. 그는 많은 배를 나포해 적을 압박했고, 1347년 8월 왕실 원수로서 워릭 백작 토머스 뷰챔프와 함께 항복한 칼레 시의 열쇠를 받고 도시 재산을 보상으로 받았다. 이후 9월 28일 프랑스와의 휴전 협상에 참여했다.

1347년 11월 장인 휴 드 오들리가 사망한 후, 에드워드 3세로부터 장인의 재산을 소유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1348년 2월 스태퍼드와 메들리에 성채를 보강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1348년 4월 에드워드 3세가 설립한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해 8월 에드워드 3세에게 평생 복무하는 계약을 체결했고, 그 대가로 런던과 보스턴 세관의 수입으로 확보된 연간 연금 600 파운드를 받았고, 해외에서 활동하는 자금으로 570파운드를 받았다. 한달 후 에드워드 3세와 함께 칼레로 가서 프랑스와의 추가 협상에 참석했고, 1349년 가스코뉴로 가서 그곳에서 복무했고, 1350년 8월 29일 윈첼시 해전에서 패배한 후 살아남은 카스티야 함대의 공격으로부터 잉글랜드 선박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해 10월 요크로 가서 스코틀랜드인과의 평화 협상에 참여했다.

1351년 3월 5일 스태퍼드 백작에 처음으로 선임되었고, 연간 연금으로 1,000 파운드를 지급받았다. 그해 3월 6일, 그는 랭커스터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은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뒤를 이어 가스코뉴 왕실 보안관이 되었다. 1352년 3월, 랄프는 자신의 영지에서 모집한 200명과 함께 왕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서약했고, 그해 3월 두배로 늘어난 파견대에 추가 지원군을 이끌고 가스코뉴로 가서 원정을 수행했다. 그 결과 아쟁 근처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여러 포로를 확보했다. 그 중에는 부시코의 영주이자 프랑스 선장 장 르 맹그레도 있었는데, 랄프는 잉글랜드 해안을 수시로 습격해 큰 피해를 안겼던 맹그레를 생포한 공으로 왕실 재무부로부터 1,000파운드의 보상금을 받았다.

1354년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에브뢰 백작인 카를로스 2세가 잉글랜드와 손잡고 프랑스 국왕 장 2세에 대항하려 할 때, 그는 그로스몬트의 헨리와 함께 카를로스 2세를 지원하는 원정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카를로스 2세가 얼마 후 장 2세와 화해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랄프는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북부 원정에 가담했고,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이후 1356년 봄까지 지속된 스코틀랜드 원정에서 왕의 군대를 지휘했다. 1359년 10월 다시 프랑스 원정에 참여한 그는 그해 11월 26일 랭스 인근의 솜 숲에 있던 본진이 습격당했을 때 습격자 한 명을 사살하고 다른 한 명을 무력화시켰으며, 습격을 이끈 적 지휘관을 생포했다. 1360년 5월 브레티니 평화 협약 협상 때 참여했으며, 10월에 조약이 칼레에서 공식 비준되었을 때도 참여했다.

1361년 에드워드 3세의 차남인 앤트워프의 라이오넬과 함께 아일랜드로 가서 잉글랜드의 통치를 회복하려고 했다. 그는 이전에 이미 아일랜드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다. 1350년 자신의 딸 베아트리체와 미래에 제2대 데스몬트 백작이 될 아일랜드 귀족 모리스 피츠제럴드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1358년 6월 모리스 피츠제럴드가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사망하자, 에드워드 3세는 모리스 피츠제럴드의 모든 재산을 베아트리체가 아닌 랄프가 관리하게 했다. 이런 인연이 있었던 랄프는 라이오넬의 아일랜드 통치에 협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1372년 8월 31일 켄트의 톤브리지에서 사망했다. 사후 톤브리지 수도원에 부모, 두번째 아내 마거릿 드 오들리의 옆에 안장되었다. 이후 휴 드 스태퍼드가 그의 직위와 영지를 계승했다.

3. 가족



[1] ? ~ 1380, 가스코뉴 세네샬 역임, 오베르슈 전투, 크레시 전투, 1차 칼레 공방전, 푸아티에 전투 기사로 참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