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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21:53:01

라자르 카가노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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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0대 서기장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3대 제1서기
라자르 카가노비치
Ла́зарь Кагано́ви | Lazar Kaganovich
파일:Лазарь_Моисеевич_Каганович.jpg
본명 라자르 모이세예비치 카가노비치[1]
Ла́зарь Моисе́евич Кагано́вич
Lazar Moiseevich Kaganovich
출생 1893년 11월 22일[2]
러시아 제국 키예프현 카바니
(現 우크라이나 키이우주 디브로바)
사망 1991년 7월 25일 (향년 97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 연방시)
묘소 노보데비치 묘지
재임기간 제10대 서기장
1925년 4월 7일 ~ 1928년 7월 14일
제13대 제1서기[3]
1947년 3월 3일 ~ 12월 26일
서명
파일:Lazar_Kaganovich_Signature.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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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아버지 모이세이 게르시코비치 카가노비치
어머니 게냐 이오시포나 두빈스카야
형제자매 13남매
배우자 마리야 마르코브나 프리보로츠카야
자녀 입양아들 유리, 친딸 마야
학력 2년제 초등학교 졸업
종교 무종교 ( 무신론)
소속 정당
[[소련 공산당|]]
주요 서훈 사회주의노력영웅
노력적기훈장
레닌훈장 (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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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활동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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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정치인.

2. 생애

우크라이나 유대인 혈통이며 키이우 태생이다. 일찍이 볼셰비키에 가담해 러시아 혁명에도 참여한 인물이다. 가난한 유대인 노동자 집안에 태어나서 니키타 흐루쇼프와 마찬가지로 초등 2년만 공부하는 등, 거의 무학이었지만[4], 리더십이 대단했는지, 일찍히 우크라이나 볼셰비키에서 지도적 인물로 떠올랐다.

러시아 제국 해체 후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했고,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 세워졌으나, 카가노비치 및 우크라이나 내의 볼셰비키는 하르키우에서 우크라이나 SSR를 선포하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를 대신해 우크라이나 SSR이 우크라이나를 장악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우크라이나 SSR은 이후 소련에 가입한다.

이런 업적으로 소련 중앙정계에서도 우크라이나 세력의 대표주자로 활약했고, 이오시프 스탈린 레프 트로츠키의 당권 경쟁에서 스탈린을 지지해 심복이 된 뒤 정치국원까지 오르며 승승장구했다.

이후 소련 건설부 장관을 맡았고, 모스크바 도시계획을 현대화하는데 기여했다. 이 와중에 문화재로 가치가 있는 여러 옛 건물들이 파괴되기도 했다. 대표적 건물이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스탈린의 중공업 계획에 적극 찬성했으며, 소련 전역에 철도망을 까는 일도 감독하였다. 중앙에서는 본인의 인맥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 자기 인맥으로 여겨진 여러 인맥을 불러들였는데, 그 중 하나인 흐루쇼프도 모스크바로 불러들였고, 흐루쇼프도 중앙에서 카가노비치의 비호 아래에서 계속 승진하여 당직으로는 모스크바 제1서기까지 오르게 되었다.

스탈린의 집산화 추진 때는 우크라이나에 파견되어 집단농장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했고 이것이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원인을 제공했다. 다만 이 참극의 책임은 이 결정에 반대한 당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공산당 제1서기 스타니슬라프 코시오르가 뒤집어 썼고, 코시오르는 대숙청 때 폴란드 간첩으로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초래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된다.

대숙청에도 크게 한몫했는데, 본인의 형인 미하일이 대숙청 대상자가 되자 구해주기는 커녕 이를 냉정히 통보, 미하일이 자살하는데 큰 원인 제공을 했다는 설이 있다. 다만 미하일은 원래 술꾼이라서 직무태만으로 여러번 견책받은 처지고, 이때마다 카가노비치가 구해줬다는 설도 있다. 흐루쇼프도 카가노비치의 비호로 대숙청의 올가미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카가노비치는 흐루쇼프와 막역한 사이였고, 흐루쇼프가 집권하는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한때 자신의 부하였던 흐루쇼프가 이후 자신을 뛰어넘는 지위를 가졌는데도, 질투하지 않고 적극 지지해 스탈린에 이어 소련의 최고지도자로 등극하는데도 한몫했다. 하지만 본인이 철저한 스탈린파였기 때문에 흐루쇼프가 집권 후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이자 흐루쇼프와 결별한다. 이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함께 반흐루쇼프 운동에 가담했다가, 흐루쇼프의 반격으로 실각하고 당적이 박탈되었다. 실각 후 한직으로 가서 비료 공장장을 하다가 1960년대 은퇴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대숙청의 공범 노릇을 했기 때문에, 흐루쇼프 집권기인 1950년대 출당된 이후에도 한동안 당적은 복원되지 않았고, 그 시절부터 지속된 기록말살형에 처해져, 몰로토프와 더불어 1980년대까지 살아남은 두명의 고참 볼셰비키임에도 각종 행사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국가기록에서 전혀 언급이 없었다. 다만 이후 연금생활자로 모스크바에서 살며 별 고생을 하지는 않았다.

1984년 콘스탄틴 체르넨코 치하에서 몰로토프와 함께 복당이 허용되었다.

소련이 해체되기 5개월 전인 1991년 7월 25일에 노환으로 사망했으며,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말년에는 치매로 인해 정신이 오락가락했다고 한다.[5]

3. 활동

4. 여담


[1] 외래어 표기법상으로는 '라자리'이지만 발음상으로는 '라자르'이다. [2] 율리우스력 11월 10일 [3]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직위명 변경 [4] 이오시프 스탈린 그가 쓴 보고서가 엉망진창인 줄 알자, 문법을 공부하라고 3개월 휴가를 주었고, 그 이후에야 제대로 된 문장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스탈린은 혁명가가 되기 이전에는 자기가 쓴 시가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의 시인이기도 했다. [5] 몰로토프도 치매에 시달렸지만 카가노비치는 몰로토프보다 치매 증세가 더 심했다. [6] 97세까지 살아 있었으니 대단히 장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