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명 | 라오서(老舍, Lao She) |
본명 | 수칭춘(舒慶春)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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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 만주족 |
출생 |
1899년
2월 3일 베이징 |
사망 |
1966년
8월 24일 (향년 67세) 베이징 |
학력 | 베이징사범대학 |
직업 | 교사, 작가 |
1. 개요
중국의 소설가이자 극작가. 베이징 인력거꾼의 불행한 생애를 담은 <낙타상자(駱駝祥子)>의 저자이다.2. 생애
만주족 정홍기 가정 출신이다. 만주식 성은 슈무루(舒穆祿), 또는 슈슈기오로(舒舒覺羅)[1]라는 설도 있다. 성장한 라오서는 1918년 베이징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를 역임하였으며, 1924년부터 1930년까지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런던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던 중 서양 문학을 접하면서 소설 창작을 시작하게 되었다.1931년 중국으로 돌아와 칭다오에서 교사 생활을 이어가다가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고, 1936년 라오서의 대표작이라고 평가받는 소설 <낙타상자(駱駝祥子)>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베이징에 사는 가난한 인력거꾼의 비참한 생활을 그린 것으로, 하층 서민의 애환과 어두운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묘사를 통해 비판적 리얼리즘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라오서는 후베이성 우한시에 있던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中華全國文藝界抗敵協會)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소속 작가들에게 애국과 항일에 도움이 되는 문학작품을 창작하도록 격려했다.
1946년엔 미국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는 1946년부터 1949년 12월까지 미국에 머물렀다. 라오서는 여행하는 동안, 그의 친구 펄 벅과 그녀의 남편은 조력자로 일했고 그들은 라오서가 미국에 사는 것을 도왔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후, 라오서는 미국에 머물라는 벅의 조언을 거부하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낙타상자>는 1940년대 초에 벅에 의해 번역되었다. 벅의 번역은 <낙타상자>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49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울 무렵, 라오서는 희곡 창작에 매진하여 1957년 중국 현대 희곡의 대표작인 <찻집>을 발표하여 작가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이외에도 그는 단편이나 설화의 평가, 창작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말년에는 매우 비참해지는데,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라오서의 삶은 송두리째 달라지게 되었다. 8월 23일, 마오쩌둥을 추종하며 많은 지식인, 예술가들을 핍박하였던 홍위병들이 병원을 다녀오며 사무실에 잠깐 들렀던 라오서를 발견하고 그를 생포하였다. 홍위병들은 라오서를 '제1의 반동적인 학술 권위자'라고 비판하며 공자사원 계단 앞에서 머리를 강제로 밀고 먹물로 얼굴을 칠한 뒤 쇠버클이 달린 혁대로 심한 구타와 조리돌림, 모욕을 가하였다.
결국 라오서는 홍위병에게 수모를 당하고 반동혐의에 관한 경찰조사를 받으라는 진언을 받은 뒤, 다음 날 밤 베이징의 타이핑 호수 근처에서 의문사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이를 두고 라오서가 평생에 걸쳐 쌓아올린 업적이 한 순간에 모두 무시당한 것에 대한 모욕감에 분을 못이겨 자살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1]
두 설은 중국어 위키피디아에 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