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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네이션즈/추가 정보/월드워 전당(전쟁 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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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휴대용 식기 세트
1.1. 도우보이 휴대용 식기 세트1.2. 즉흥 쉐프의 휴대용 식기 세트
2. 전화
2.1. 참호 전화2.2. 헬로 걸즈의 참호 전화
3. 가스 경보 딸랑이
3.1. 가스 경보 딸랑이3.2. 1차 호주제국군의 가스 경보 딸랑이
4. 현장 수술 키트
4.1. 현장 수술 키트4.2.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현장 수술 키트
5. 쌍안경
5.1. 참호 쌍안경5.2. 소령 헤스케스-프리처드의 쌍안경
6. 탄약 상자
6.1. 알루미늄 탄약 상자6.2. LZ 72의 알루미늄 탄약 상자
7. 신호등
7.1. 신호등7.2. 통신군단 신호등
8. 선물 상자
8.1. 메리 공주 선물 상자8.2. 메리 공주의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
9. 야전삽
9.1. 야전삽9.2. 최 전선 야전삽
10. 카메라
10.1. B형 공중 카메라10.2. F.C.V. B형 공중 카메라

1. 휴대용 식기 세트

Mess kit

1.1. 도우보이 휴대용 식기 세트

Doughboy Mess kit
옛 속담에서 말하듯 군대도 먹어야 진군합니다. 1차 세계 대전 중 모든 미군 병사에게 자신의 끼니를 준비해서 먹도록 작은 휴대용 식기 세트가 지급되었습니다. 휴대용 식기 세트의 형태와 크기는 다양했지만, 얼마나 컴팩트한지가 중요했습니다. 현대의 휴대용 식기 세트는 보통 일회용으로 재사용되지 않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지만, 이전의 식기 세트는 재사용이 가능했으며 보통 알루미늄이나 다른 금속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참호에는 지정된 요리사가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각자 매일 스스로 요리하고 자신의 식기 세트를 닦아야 했습니다.
As the old adage goes: an army marches on its stomach. During World War I, all U.S. military personnel were issued a compact mess kit to eat and prepare their meals. Mess kits came in all different shapes and sizes, but a key component of every kit was how compact it was. Modern mess kits are usually single-use and are made of disposable plastic, while the older kits were reusable and typically made of aluminum or other metals. Since there were no assigned cooks in the trenches, each soldier was responsible for cooking with and cleaning their mess kits every day.

1.2. 즉흥 쉐프의 휴대용 식기 세트

Impromptu Chef's Mess Kit
참호에는 정해진 부엌이나 요리사가 없었습니다. 보통 영국 병사들은 그들의 적인 독일군보다 더 많은 양의 배급을 받았으며, 이 사실은 영국의 정치 선전에서 많이 강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첫 해가 지나자 병사에게 제공된 대부분의 고기는 값싼 통조림 고기가 되었고, 야채는 신선하지 않은 말린 것일 때가 많았습니다. 많은 병사들은 자신의 돈으로 소스나 다른 양념을 구입해 배급 식량을 견뎠습니다. 추가 배급 식량이나 귀중품을 주면서 특히 요리에 재능이 있는 일부 병사들에게 자신의 끼니를 요리해 달라고 하는 병사들도 있었습니다.

옛 속담에서 말하듯 군대도 먹어야 진군합니다. 1차 세계 대전 중 모든 미군 병사에게 자신의 끼니를 준비해서 먹도록 작은 휴대용 식기 세트가 지급되었습니다. 휴대용 식기 세트의 형태와 크기는 다양했지만, 얼마나 컴팩트한지가 중요했습니다. 현대의 휴대용 식기 세트는 보통 일회용으로 재사용되지 않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지만, 이전의 식기 세트는 재사용이 가능했으며 보통 알루미늄이나 다른 금속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참호에는 지정된 요리사가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각자 매일 스스로 요리하고 자신의 식기 세트를 닦아야 했습니다.
In the trenches, there were no designated kitchens or cooks. British soldiers typically were given more rations than their German enemies, a fact that was highly played up in British propaganda. However, After the first year, most of the meat given to soldiers was cheap tinned meat, and the vegetables were often dried instead of fresh. Many soldiers would use their own money to purchase sauces or other condiments to make their rations bearable. Some soldiers were particularly talented at cooking, and so other soldiers would turn to them to cook their meals at the cost of extra rations or valuables.

As the old adage goes: an army marches on its stomach. During World War I, all U.S. military personnel were issued a compact mess kit to eat and prepare their meals. Mess kits came in all different shapes and sizes, but a key component of every kit was how compact it was. Modern mess kits are usually single-use and are made of disposable plastic, while the older kits were reusable and typically made of aluminum or other metals. Since there were no assigned cooks in the trenches, each soldier was responsible for cooking with and cleaning their mess kits every day.

2. 전화

Phone

2.1. 참호 전화

Trench Phone
전쟁에서 통신은 승리의 열쇠입니다. 1차 세계 대전 중 많은 형태의 통신이 사용됐으며, 여기에는 깃발 신호, 메시지 전달 비둘기, 등이나 호루라기를 통한 모스 코드 신호가 포함됐습니다. 하지만 더 명확하고 효과적인 통신 방식은 상대적으로 최신에 개발된 전화입니다. 군인들은 전쟁터에서 명령을 주고 받을 수 있도록 막대한 길이의 전화선을 이중 십자형으로 설치했습니다. 적군의 포격에 의해 전화선이 파괴되는 일이 잦았기에 이중 설치는 필수였습니다.
In war, communication is the key to victory. During World War I, many forms of communication were used, including flag signaling, carrier pigeons, and using lights or whistling to signal Morse code. But the clearer and most effective way of communicating was a relatively recent invention: the telephone. Soldiers would lay massive lengths of phone wire lines with redundant crisscross patterns to ensure that they could give and receive orders in the battlefield. The redundancy of these wires was a necessity, as wires would often get destroyed by enemy artillery fire.

2.2. 헬로 걸즈의 참호 전화

Hello Girls' Trench Phone
'헬로 걸즈'는 미국육군통신군단의 여성 교환병이었습니다. 이 통신군단은 미국 육군의 통신의 개발, 테스트, 운영을 맡고 있습니다. 통신이 승리의 열쇠임을 알고 있던 퍼싱의 지시로 '헬로 걸즈'라고 알려진 통신군단 여성전화교환수 유닛이 만들어졌습니다. 헬로 걸즈는 처음에는 군에서 고용한 민간인으로 여겨졌으며, 수 년 후에나 명예 제대 기회나 참전 용사 지위가 제공되었습니다.

전쟁에서 통신은 승리의 열쇠입니다. 1차 세계 대전 중 많은 형태의 통신이 사용됐으며, 여기에는 깃발 신호, 메시지 전달 비둘기, 등이나 호루라기를 통한 모스 코드 신호가 포함됐습니다. 하지만 더 명확하고 효과적인 통신 방식은 상대적으로 최신에 개발된 전화입니다. 군인들은 전쟁터에서 명령을 주고 받을 수 있도록 막대한 길이의 전화선을 이중 십자형으로 설치했습니다. 적군의 포격에 의해 전화선이 파괴되는 일이 잦았기에 이중 설치는 필수였습니다.
The ‘Hello Girls’ were the female switchboard operators of the U.S Army Signal Corps (USASC). The USASC is responsible for developing, testing, and operating the U.S. Army’s communications. General Pershing knew that communication would be the key to victory, and so, by his call, the Signal Corps Female Telephone Operators Unit, colloquially known as ‘Hello Girls’, was established. The ‘Hello Girls’ were originally considered civilians that were employed by the military and did not receive honorable discharges or veteran status until many years later.

In war, communication is the key to victory. During World War I, many forms of communication were used, including flag signaling, carrier pigeons, and using lights or whistling to signal Morse code. But the clearer and most effective way of communicating was a relatively recent invention: the telephone. Soldiers would lay massive lengths of phone wire lines with redundant crisscross patterns to ensure that they could give and receive orders in the battlefield. The redundancy of these wires was a necessity, as wires would often get destroyed by enemy artillery fire.

3. 가스 경보 딸랑이

Alarm Rattle

3.1. 가스 경보 딸랑이

Alarm Rattle
독가스는 1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과 동맹군 모두가 사용한 공통 무기이었습니다. 일부 가스 공격은 탐지하기 어려워 너무 늦은 뒤에나 발견되었습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병사들은 화학 무기에 더 잘 대비하게 되었으나, 보호용 마스크나 수트를 착용하려면 여전히 시간이 걸리곤 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병사들은 가스 유입이 처음 발견되면 울리는 뿔피리나 시끄러운 딸랑이를 소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경고를 줌으로써 다른 병사들에게 장비를 준비하고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시간을 줄 수 있었습니다.
Poison gas was a common weapon used by both Allied and Central Powers during World War I. Some gas attacks were difficult to detect until it was too late. As the war progressed, soldiers now came better prepared against chemical weapons, but it would still take time to equip their protective masks or suits. As a response, soldiers started carrying horns or loud rattles that they would sound at the first sight of incoming gas. This warning would give their allies the time to ready their equipment and protect themselves from the attack.

3.2. 1차 호주제국군의 가스 경보 딸랑이

1st A.I.F.'s Gas Alarm rattle
1차 호주제국군은 1차 세계 대전의 호주 부대의 원정군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개 보병 사단과 한 개 경기병대 여단으로만 구성되었었습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1차 호주제국군은 더 많은 사단으로 증강되었습니다. 호주제국군은 1차 세계 대전의 많은 위대한 전투에서 싸웠으며, 특히 효과적인 군사력으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독가스는 1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과 동맹군 모두가 사용한 공통 무기이었습니다. 일부 가스 공격은 탐지하기 어려워 너무 늦은 뒤에나 발견되었습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병사들은 화학 무기에 더 잘 대비하게 되었으나, 보호용 마스크나 수트를 착용하려면 여전히 시간이 걸리곤 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병사들은 가스 유입이 처음 발견되면 울리는 뿔피리나 시끄러운 딸랑이를 소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경고를 줌으로써 다른 병사들에게 장비를 준비하고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시간을 줄 수 있었습니다.
The First Australian Imperial Force was the Australian Army’s expeditionary force during World War I. Initially, the 1st A.I.F. was only one infantry division and one light horse brigade. As the war continued, the 1st A.I.F. was reinforced by more and more divisions. The Australian forces fought in many of the greatest battles of World War I and earned a reputation of being an especially effective military force.

Poison gas was a common weapon used by both Allied and Central Powers during World War I. Some gas attacks were difficult to detect until it was too late. As the war progressed, soldiers now came better prepared against chemical weapons, but it would still take time to equip their protective masks or suits. As a response, soldiers started carrying horns or loud rattles that they would sound at the first sight of incoming gas. This warning would give their allies the time to ready their equipment and protect themselves from the attack.

4. 현장 수술 키트

Field Surgery Kit

4.1. 현장 수술 키트

Field Surgery Kit
전쟁터에서 큰 부상이 발생하면 부상병을 야전 병원으로 이송할 시간이 없는 경우가 잦습니다. 이러한 비상 사태에 대비해 의무병은 현장 수술 키트를 소지합니다. 수술 키트의 내용물은 다양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봉합선, 메스, 바늘, 다양한 의약품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키트는 대부분의 경우 부상 당한 병사들로부터 총알을 빼내거나 응급 절단을 해야 될 때 사용되었습니다. 전쟁이 지속되며 군수품이 부족해지자 많은 응급 키트가 의약품 없이 봉합선과 메스만 포함되어 공급되었습니다. 즉, 통증에 대한 의약품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는 상태에서 상처를 씻어낼 소금에만 의지해 현장에서의 수술을 진행했어야 했습니다.
When major injuries occurred on the battlefield there would frequently be no time to get the injured party to a field hospital. Battlefield medics would carry a Field Surgery Kit for just such an emergency. The contents of surgery kits would vary, but most always contained sutures, scalpels, needles and needle holders, and various medicinal drugs. Most commonly, these kits were used to retrieve bullets from wounded soldiers or to perform emergency amputations. As the war continued and supplies became more scarce, many emergency kits did not come with medication and only included sutures and scalpels. This meant field surgeries would have to be done with little to no pain medication and only salt water to rinse and clean wounds.

4.2.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현장 수술 키트

Ernest Hemingway's Field Surgery Kit
어니스트 허밍웨이는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로 주로 알려져 있으나, 1차 세계 대전 중 파리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앰뷸런스 기사로 복무했습니다. 결국 헤밍웨이는 부상을 입어 은퇴해야 했습니다. 이후 그는 '어려서 전쟁에 나가면 나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는 망상을 가진다. 다른 사람은 죽어도 자신은 죽지 않는다는... 그리고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면 이때 처음으로 이런 망상을 잃게 되고,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라고 썼습니다.

전쟁터에서 큰 부상이 발생하면 부상병을 야전 병원으로 이송할 시간이 없는 경우가 잦습니다. 이러한 비상 사태에 대비해 의무병은 현장 수술 키트를 소지합니다. 수술 키트의 내용물은 다양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봉합선, 메스, 바늘, 다양한 의약품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키트는 대부분의 경우 부상 당한 병사들로부터 총알을 빼내거나 응급 절단을 해야 될 때 사용되었습니다. 전쟁이 지속되며 군수품이 부족해지자 많은 응급 키트가 의약품 없이 봉합선과 메스만 포함되어 공급되었습니다. 즉, 통증에 대한 의약품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는 상태에서 상처를 씻어낼 소금에만 의지해 현장에서의 수술을 진행했어야 했습니다.
Ernest Hemingway is primarily remembered as a novelist and journalist, however, he also served as an ambulance driver in Paris and later at the Italian Front during World War I. Eventually, Hemingway was injured and forced to retire. He later wrote about his experience saying: ‘When you go to war as a boy you have a great illusion of immortality. Other people get killed; not you... Then when you are badly wounded the first time you lose that illusion and you know it can happen to you.’

When major injuries occurred on the battlefield there would frequently be no time to get the injured party to a field hospital. Battlefield medics would carry a Field Surgery Kit for just such an emergency. The contents of surgery kits would vary, but most always contained sutures, scalpels, needles and needle holders, and various medicinal drugs. Most commonly, these kits were used to retrieve bullets from wounded soldiers or to perform emergency amputations. As the war continued and supplies became more scarce, many emergency kits did not come with medication and only included sutures and scalpels. This meant field surgeries would have to be done with little to no pain medication and only salt water to rinse and clean wounds.

5. 쌍안경

Binoculars

5.1. 참호 쌍안경

Trench binoculars
1차 세계 대전은 참호 전쟁의 시기이었습니다. 깊은 참호는 포격과 총격으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참호 밖에서 노출된 상태로 정찰을 해서 병사들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하기 보다는 더 안전한 대안인 '참호 쌍안경'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잠망 쌍안경 덕분에 병사들은 흉토 위로 자신들을 노출시키지 않고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유사한 기술을 사용해 잠망 소총과 기관총 등, 혁신적인 참호 무기가 제작되었습니다.
World War I was the time of trench warfare. Deep trenches were capable of protecting soldiers from artillery fire and gunfire. Instead of risking the lives of the soldiers by having them perform reconnaissance while exposed from the trenches, they could now use the ‘Trench Binoculars’ which proved to be a safer alternative. These periscope binoculars allowed the soldier to stay safe without having to expose themselves over the parapet. Similar technology was used to create innovative trench weapons such as periscope rifles and machine guns.

5.2. 소령 헤스케스-프리처드의 쌍안경

Major Hesketh-Prichard's Binoculars
헤스케스-프리처드는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영국 장교입니다. 대부분의 연대가 매 달 적의 저격수로부터 12명의 병사를 잃는다는 점을 알게 된후 그는 병사들을 저격수로부터 더 잘 보호하고 사격술로 영국 병력을 더 잘 훈련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총의 시야를 올바르게 맞추고, 자신의 돈으로 더 나은 소총을 구입하는 등 처음에는 작은 부분으로 시작했습니다. 결국 영국 부대에 캠페인을 벌여서 '저격, 감시, 정찰을 위한 최초의 군사 학교'를 공식적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헤스케스-프리처드는 3개월 만에 저격 사상자의 수를 매 주 대대 당 5명에서 60개 대대 당 44명의 사상자로 줄일 수 있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은 참호 전쟁의 시기이었습니다. 깊은 참호는 포격과 총격으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참호 밖에서 노출된 상태로 정찰을 해서 병사들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하기 보다는 더 안전한 대안인 '참호 쌍안경'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잠망 쌍안경 덕분에 병사들은 흉토 위로 자신들을 노출시키지 않고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유사한 기술을 사용해 잠망 소총과 기관총 등, 혁신적인 참호 무기가 제작되었습니다.
Hesketh-Prichard was a British officer during World War I. After learning that most regiments would lose over a dozen men each month to enemy snipers, he began taking measures to both better protect soldiers from snipers and to better train British troops in the art of marksmanship. At first, his contributions were small; he would correct sights on rifle scopes and purchase better rifles using his own money. Eventually, after campaigning to the British Army, he was formally allowed to start ‘The First Army School of Sniping, Observing and Scouting.’ Reports state that Hesketh-Prichard was able to reduce sniper casualties from five per battalion each week to only forty-four casualties across sixty battalions in three months.

World War I was the time of trench warfare. Deep trenches were capable of protecting soldiers from artillery fire and gunfire. Instead of risking the lives of the soldiers by having them perform reconnaissance while exposed from the trenches, they could now use the ‘Trench Binoculars’ which proved to be a safer alternative. These periscope binoculars allowed the soldier to stay safe without having to expose themselves over the parapet. Similar technology was used to create innovative trench weapons such as periscope rifles and machine guns.

6. 탄약 상자

Ammunition Box

6.1. 알루미늄 탄약 상자

Aluminum Ammuntions Box
탄약 상자는 탄약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사용된 특별히 고안된 상자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군 탄약 상자는 사고로 탄약이 상자에서 나오는 것을 막고자 아연을 덧댄 내구성 있는 금속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탄약 상자는 다양한 모양과 크기로 나왔는데 일부는 일정한 형태의 직사각형 상자이었고 다른 상자는 '스팸 캔'으로 불린 음식 용기와 비슷했습니다. 알루미늄 탄약 상자는 보기 드물었으나 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에서 가끔 사용했습니다.
Ammunition boxes are specially designed crates used to safely store ammunition. Most military ammo boxes are made of durable metal with zinc lining or padding to prevent accidental discharge. Ammo boxes come in many shapes and sizes, with some being form-fitting rectangular crates, and others resembling food containers commonly called ‘spam cans.’ Aluminum ammunition boxes were rare, but were occasionally used by the German Empire during World War I.

6.2. LZ 72의 알루미늄 탄약 상자

LZ 72's Aluminum Ammuntion box
LZ 72는 1차 세계 대전 중 폭격 임무에 사용된 독일의 '수퍼 제플린' 비행선이었습니다. 전쟁에 비행선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 특히 효과가 좋았습니다. 일정 기간 동안 수 십 차례의 폭격이 가해졌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제플린에 맞서는데 소이탄 공격이 특히 효과적이라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곧 비행선이 불길에 연이어 추락하자 독일은 공격 효율성이 희생되더라도 모든 비행선이 더 높은 고도에서 비행하도록 비행선을 고쳤습니다.

탄약 상자는 탄약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사용된 특별히 고안된 상자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군 탄약 상자는 사고로 탄약이 상자에서 나오는 것을 막고자 아연을 덧댄 내구성 있는 금속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탄약 상자는 다양한 모양과 크기로 나왔는데 일부는 일정한 형태의 직사각형 상자이었고 다른 상자는 '스팸 캔'으로 불린 음식 용기와 비슷했습니다. 알루미늄 탄약 상자는 보기 드물었으나 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에서 가끔 사용했습니다.
LZ 72 was a German Empire ‘Super-Zeppelin’ airship used for bombing missions during World War I. When airships first appeared during the war, they were particularly effective. Dozens of bombing runs were made successfully for a period of time. However, the British discovered that the use of incendiary rounds was particularly effective against zeppelins. Soon after, airship after airship was shot down in flames, which caused the German Empire to revise all airships to fly at a much higher height at the cost of offensive efficiency.

Ammunition boxes are specially designed crates used to safely store ammunition. Most military ammo boxes are made of durable metal with zinc lining or padding to prevent accidental discharge. Ammo boxes come in many shapes and sizes, with some being form-fitting rectangular crates, and others resembling food containers commonly called ‘spam cans.’ Aluminum ammunition boxes were rare, but were occasionally used by the German Empire during World War I.

7. 신호등

Signalling Lamp

7.1. 신호등

Signalling Lamp
전쟁터에서의 주요 통신 수단은 전화이었지만, 전선이 적의 포격에 파괴되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래서 신뢰할만한 대안이 될 수 있는 통신 수단이 필요했습니다. 한가지 방법은 신호등이었습니다. 이 등에는 햇볕이나 등의 불빛이 장거리를 지나 신호 기지로 집중되도록 렌즈가 사용됐습니다. 신호를 주는 쪽과 신호를 받는 쪽에서 보통 모스 코드를 주고 받으며 통신했습니다.
Although the principal means of communication on the battlefield was via telephone, often times the phone wires would get destroyed by enemy artillery fire. As such, reliable alternative means of communication was required. One such method was using signal lamps. These lamps would use lenses to focus either sunlight or lamplight over a long distance to a signaling post. The signaller and the signaling post would communicate back and forth, usually via Morse code.

7.2. 통신군단 신호등

Signal Corps Signalling Lamp
미국육군통신군단은 1860년에 발족되었으며, 그 이후 미군의 긴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에서는 육군공군단이 아직 설립되지 않아서 육군통신군단에서 모든 군용 항공을 담당했습니다. 또한, 통신 군단은 새로운 유형의 무선 통신과 레이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전쟁터에서의 주요 통신 수단은 전화이었지만, 전선이 적의 포격에 파괴되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래서 신뢰할만한 대안이 될 수 있는 통신 수단이 필요했습니다. 한가지 방법은 신호등이었습니다. 이 등에는 햇볕이나 등의 불빛이 장거리를 지나 신호 기지로 집중되도록 렌즈가 사용됐습니다. 신호를 주는 쪽과 신호를 받는 쪽에서 보통 모스 코드를 주고 받으며 통신했습니다.
The United States Army Signal Corps (USASC) was established in 1860 and has been an integral part of the U.S. military ever since. During World War I, the USASC was responsible for all military aviation as the Army Air Service had not yet been created. Additionally, the Signal Corps developed new types of radio communications and eventually pioneered radar technology.

Although the principal means of communication on the battlefield was via telephone, often times the phone wires would get destroyed by enemy artillery fire. As such, reliable alternative means of communication was required. One such method was using signal lamps. These lamps would use lenses to focus either sunlight or lamplight over a long distance to a signaling post. The signaller and the signaling post would communicate back and forth, usually via Morse code.

8. 선물 상자

Gift Box

8.1. 메리 공주 선물 상자

Princess Mary Gift Box
1차 세계 대전 동안 영국 왕가의 메리 공주는 '병사와 선원 크리스마스 펀드'를 시작했습니다. 이 펀드의 미션은 모든 영국군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장교를 위한 은으로 된 상자와 그 외의 군인을 위한 황동으로 된 상자, 이 두 가지의 선물 상자가 만들어졌습니다. 메리 공주의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는 공주의 이미지와 1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가의 이름으로 장식되었습니다. 상자 안쪽의 선물은 사람마다 달랐습니다. 많은 경우 담배, 초, 라이터로 상자가 채워졌는데, 모든 박스에 크리스마스 카드와 메리 공주의 사진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During World War I, Princess Mary of the British royal family started the public ‘Soldiers and Sailors Christmas fund’. Its mission was to ensure that each and every member of the British Armed Forces would receive a Christmas gift. Two versions of the gift boxes were created: a box made of silver for officers and one made of brass for all the others. The Princess Mary Christmas gift boxes were adorned with an image of the Princess as well as the names of the Allied countries during World War I. The gifts inside of the box varied from person to person. Many were filled with tobacco, candies, and lighters, but every box came with a Christmas card and a photo of Princess Mary.

8.2. 메리 공주의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

Princess Mary's Christmas Gift Box
헤어우드 백작 부인 메리 공주는 1900년대에 영국과 영국 자치령의 왕이었던 조지 5세 왕과 메리 여왕의 외동딸이었습니다. 메리 공주는 자선 행위를 많이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 펀드를 만들었으며, 간호 수업을 들었고, 지역 병원에서 일주일에 두 번 자원봉사를 했습니다. 메리 공주는 군사들 뿐만 아니라 어린 소녀들과 여성을 돕는 가이던스 조직도 도왔습니다.

1차 세계 대전 동안 영국 왕가의 메리 공주는 '병사와 선원 크리스마스 펀드'를 시작했습니다. 이 펀드의 미션은 모든 영국군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장교를 위한 은으로 된 상자와 그 외의 군인을 위한 황동으로 된 상자, 이 두 가지의 선물 상자가 만들어졌습니다. 메리 공주의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는 공주의 이미지와 1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가의 이름으로 장식되었습니다. 상자 안쪽의 선물은 사람마다 달랐습니다. 많은 경우 담배, 초, 라이터로 상자가 채워졌는데, 모든 박스에 크리스마스 카드와 메리 공주의 사진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Mary, Princess Royal and Countess of Harewood, was the only daughter of Queen Mary and King George V, who was the King of the United Kingdom and the British Dominions during the 1900s. Princess Mary was known for her frequent charitable acts. In addition to the Christmas gift box fund she created, she took courses on nursing and would volunteer two days a week at a local hospital. Her contributions extended not only toward those in the military but also toward guidance organizations aimed at helping young girls and women.

During World War I, Princess Mary of the British royal family started the public ‘Soldiers and Sailors Christmas fund’. Its mission was to ensure that each and every member of the British Armed Forces would receive a Christmas gift. Two versions of the gift boxes were created: a box made of silver for officers and one made of brass for all the others. The Princess Mary Christmas gift boxes were adorned with an image of the Princess as well as the names of the Allied countries during World War I. The gifts inside of the box varied from person to person. Many were filled with tobacco, candies, and lighters, but every box came with a Christmas card and a photo of Princess Mary.

9. 야전삽

Entenching Tool

9.1. 야전삽

Entenching Tool
참호 전쟁은 1차 세계 대전에 걸쳐 지속되었습니다. 참호를 빨리 구축하기 위한 다양한 혁신적인 방법이 있었는데, 가장 간단하고 흔한 방법은 삽으로 파는 것이었습니다. 총검이 너무 크고 성가실 때 근접 무기로 사용될 수 있도록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야전삽에는 날카로운 면이 포함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투 시 참호를 파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참호 안에서도 계속 굴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이 방법의 가장 큰 결점은 제한된 작업 공간 때문에 두 명만 동시에 굴을 팔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밤의 장막 외에는 보호해 줄 것이 아무도 없는 개방된 공간에서 참호를 파야 하는 경우도 잦았습니다.
Trench warfare was a constant throughout World War I. There were many innovative ways to quickly build trenches, but still the simplest method was the most common - digging with shovels. Standard issue entrenching tools often came with sharpened edges so that they could be used as melee weapons when a bayonet would be too large and cumbersome. The safest way to dig a trench in combat was called sapping, which allowed soldiers to dig while still inside of their trench. The largest drawback to sapping was that only two men could dig at a time, since the space they had to work in was limited. Often times soldiers had to dig trenches out in the open with nothing but the cover of night to protect them.

9.2. 전선 야전삽

The Frontline's Entrenching Tool
참호에서의 삶은 전투 그 이상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오랜 시간 동안 참호에서 먹고, 자고, 살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요리 구역, 이발사, 잠을 위한 더 작은 굴, 임시 변소가 있는 참호가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전선에는 한번에 일, 이 주 동안만 전선에 있고, 다시 지원책이나 예비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도 증강 병력이 거의 없는 국가의 경우 한 번에 수개월 간 전선에 머무는 병사의 경우도 드물게 있었습니다.

참호 전쟁은 1차 세계 대전에 걸쳐 지속되었습니다. 참호를 빨리 구축하기 위한 다양한 혁신적인 방법이 있었는데, 가장 간단하고 흔한 방법은 삽으로 파는 것이었습니다. 총검이 너무 크고 성가실 때 근접 무기로 사용될 수 있도록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야전삽에는 날카로운 면이 포함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투 시 참호를 파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참호 안에서도 계속 굴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이 방법의 가장 큰 결점은 제한된 작업 공간 때문에 두 명만 동시에 굴을 팔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밤의 장막 외에는 보호해 줄 것이 아무도 없는 개방된 공간에서 참호를 파야 하는 경우도 잦았습니다.
Life in the trenches was more than just combat. Soldiers had to eat, sleep, and live in these trenches for long periods of time. As such, many trenches had cooking areas, barbers, smaller dugouts for sleeping, and latrines. Most soldiers would only be on the frontline for a week or two at a time before being pulled back to support or reserve lines. Even so, there were rare cases of soldiers, particularly of nations that had little reinforcements to give, that would stay on the frontline for months at a time.

Trench warfare was a constant throughout World War I. There were many innovative ways to quickly build trenches, but still the simplest method was the most common - digging with shovels. Standard issue entrenching tools often came with sharpened edges so that they could be used as melee weapons when a bayonet would be too large and cumbersome. The safest way to dig a trench in combat was called sapping, which allowed soldiers to dig while still inside of their trench. The largest drawback to sapping was that only two men could dig at a time, since the space they had to work in was limited. Often times soldiers had to dig trenches out in the open with nothing but the cover of night to protect them.

10. 카메라

Camera

10.1. B형 공중 카메라

Type B Aerial Camera
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공중 정찰 시 카메라를 사용하면 적군의 움직임에 대한 필수적인 정보가 제공된다는 사실이 입증됐습니다. 하지만 초기의 영국 A형 공중 카메라는 사용하기에 느려서 조종사가 비행기를 조종하는 와중에 11번의 단계를 거쳐야 한 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B형 카메라는 반자동이어서 훨씬 더 높은 해상도로 사각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공중 정찰 사진을 이용해 전시 전략가들은 숨겨진 방어 병력을 밝혀내 적의 진지에 대한 지도를 재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By World War I, using cameras during aerial reconnaissance had proved to give vital information about enemy movements. However, the early British Type A Aerial Camera was slow to use and required the pilot to perform eleven different actions for a single photograph, all while piloting the aircraft. The new Type B cameras were semi-automatic and could take photos at a much higher resolution and at oblique angles. Using aerial recon photos, wartime strategists have been able to reveal hidden defenses and reconstruct maps of enemy encampments.

10.2. F.C.V. B형 공중 카메라

F.C.V. Laws Type B Aerial Camera
프레더릭 찰스 빅터 로스(F.C.V.)는 영국왕립공군의 장교이었습니다. F.C.V.는 1차 세계 대전 중 공중정찰유닛을 만들었으며, 공수 작전 시 사용할 카메라 개발을 곧바로 시작했습니다. 당시 영국군에는 공중정찰 관련 경험이 전혀 없었으며 공식적인 공군의 지원 없이 카메라로 수많은 실험을 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F.C.V.는 영국, 그리고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노련한 항공 사진 고문으로 추앙 받았습니다. F.C.V.는 1차 세계 대전 후 퇴역했으나 2차 세계 대전 공군 중령으로 영국왕립공군에 재입대 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공중 정찰 시 카메라를 사용하면 적군의 움직임에 대한 필수적인 정보가 제공된다는 사실이 입증됐습니다. 하지만 초기의 영국 A형 공중 카메라는 사용하기에 느려서 조종사가 비행기를 조종하는 와중에 11번의 단계를 거쳐야 한 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B형 카메라는 반자동이어서 훨씬 더 높은 해상도로 사각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공중 정찰 사진을 이용해 전시 전략가들은 숨겨진 방어 병력을 밝혀내 적의 진지에 대한 지도를 재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Frederick Charles Victor Laws was an officer of the British Royal Air Force. During World War I, F.C.V. Laws established an aerial recon unit and immediately started work on creating cameras to use while airborne. At the time, the British had no experience with aerial recon and many experiments with cameras were done without official Air Force support. By the time World War I had finished, F.C.V. Laws was hailed as ‘the most experienced aerial photographic adviser in England and possibly the world.’ Laws retired after World War I but rejoined the Royal Air Force as wing commander during World War II.

By World War I, using cameras during aerial reconnaissance had proved to give vital information about enemy movements. However, the early British Type A Aerial Camera was slow to use and required the pilot to perform eleven different actions for a single photograph, all while piloting the aircraft. The new Type B cameras were semi-automatic and could take photos at a much higher resolution and at oblique angles. Using aerial recon photos, wartime strategists have been able to reveal hidden defenses and reconstruct maps of enemy encamp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