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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f3120><colcolor=#ffffff>광역자치단체 | 경상남도 | ||
기초자치단체 | 합천군 | ||
행정표준코드 | 5480049 | ||
관할 법정리 | 11리 | ||
하위 행정구역 | 16행정리 38반 | ||
면적 | 57.13㎢ | ||
인구 | 1,736명[1] | ||
인구밀도 | 30.39명/㎢ | ||
정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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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남도 합천군의 면, 용주면, 초계면, 율곡면, 합천읍, 쌍백면, 의령군 봉수면과 맞닿아 있다.2. 대양면 연혁
- 대양면은 삼한시대에는 변한에 속했다 하고 대목 고분군(대목리 이곡 마당무지산)으로 보아 선사 시대때부터 취락을 이루고 살았으며 부족 국가 일 때는 대양(량)국이었으며 (초계의 초계팔혜국. 쌍책의 다라국이 존재해 있었다.) 정양리의 고분군은 가야시대 고분군으로 확인되었고 신라 시대때에는 대량(야)주군, 고려때에는 대양궁이라 했으며 옛 합천의 고도라 아니할 수 없다.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대양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대야성(허나, 초계분지와 붙은 동쪽이 더 높다는 것과 서에서의 방어가 더 전문인 것을 생각하면, 오류일 수 있다.), 천혜의 황강, 강안의 비옥한 정양 들, 동쪽으로 대암산성, 남쪽으로 금반산성, 서남쪽으로 승비산성, 서쪽으로 갈마산성(대목면 벌리동소재)으로 싸여 있으며 백암리의 백암(대동)사지 덕정리의 덕정향교(창녕 조씨 족보)등이 실재해 있었다는 것이다.
- 조선 태종13년(1413)때부터 대목면과 양산면으로 분면되었다가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초계군 백암면의 상촌, 외동, 오서, 오산의 4개 동리를 병합하여 대목과 양산의 이름을 따서 대양면이라 하여 정양, 아천, 대목, 무곡, 덕정, 양산, 도리, 함지, 안금, 백암, 오산의 11개리로 개편 관할함. 동쪽은 초계면, 남쪽은 쌍백면과 의령군 봉수면, 서쪽은 용주면, 북쪽은 황강 건너 합천읍과 북동쪽 율곡면에 닿음.
- 옛 대목면이라 하여 정양, 상회, 하회, 소목, 주촌(대목), 흑석, 노동, 이곡, 이사(조동. 현 도리 구시골), 무곡, 장자, 벌리동(현 용주면 성산리 버러실)을 관할 하였고, 양산면이라 하여 관동, 남암, 덕정, 도동, 점촌, 함지, 배미, 사동, 안금, 후사동을 관할 하였다.옛 백암면은 상촌, 외동, 오서, 오산, 다현(현 의령군 봉수면 청계리지역)이었으며,오산 양지마을은 1914년에 봉수면 서암리로 편입됨. 행정리는 정양, 아천, 대목, 이계, 무곡, 장지, 덕정, 남암, 양산, 신거, 도리, 함지, 안금, 백암, 상촌, 오산리로 16개리 이며 51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3. 지명 유래
3.1. 대목리
본래 합천군 대목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흑석동, 노동동, 이곡동, 이사동과 양산면의 덕정동 일부지역(아랫마정)을 병합하고 대목면의 소재지 이므로 대목리라 해서 대양면으로 편입되었다. 현재 대목리에는 대목마을과 이계마을 2개의 행정마을로 분리되어 있다.
- 금평(琴坪) : 금평 마을은 갈골 좌측의 산봉우리 옥녀봉과 우측의 방계동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국이라 하여 금령이라 불리어 왔다고 하고, 또 일설에 의하면 옛날 마을에는 찬성 바위에 검은 돌 7개가 있었는데 현재 2개만 남아 있다. 마을에 검은 돌이 있다 하여 흑석동이라 불렀다 하며, 검은 돌이 발음 변형으로 검은 들, 금들로, 한자 표기로 금 들을 琴坪으로 불러왔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순 우리말로는 검은 들, 거무들, 거문들 금평이 되었다.
- 갈골 : 갈골마을은 금평마을 서남쪽 골짜기에 위치한 동리이며, 약 400여년 전 합천 신소양에서 광산 김취용이 갈골 마을에 처음 정착했다고 전하고 있으며, 광산 김씨 집성촌이다. 마을 이름을 갈골 또는 노동으로 불러왔으며, 그 유래는 지형이 기러기가 갈대를 물고 가는 형국이라 하여 갈골 또는 노동으로 불러 왔다고 한다. 그러나 가는(좁은) 골(갈골)이 원래 지명인데 한자 표기를 하면서 가는 골을 갈 골로 줄여 쓰다보니 갈을 갈대로 잘못 해석 하여 갈대 노자를 쓰다보니 엉뚱하게도 전혀 다른 뜻인 노동이 되었다.
- 이곡(狸谷) : 이곡마을은 북쪽에 높은 갈골 재 능선이 힘차게 뻗어 있고 남쪽에는 지산줄기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으며, 앞에는 넓은 이곡 천 냇물이 항상 흐르고 있다. 조선 인조 때(1623-1648)년경 거제 반씨가 아들 송수를 데리고 이곡 마을에 처음 정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원래 선비가 살고 있는 마을이라 사곡이라 하였는데, 지형이 살쾡이 형국이라 씩 실을 쌕 실로 발음하였고 한자로 표기 하면서 동명을 살쾡이 ‘리’자 이곡으로 쓰게 되었다. 원래 우리 말 이름인 쌕실로 부르고 있다. 일명 마당 무지는 신석기시대의 대목 고분군이기도 하다. 연안 송씨의 남계재가 있고, 천상에 영귀대가 있다. 1941~1942년 까지는 이곡리 구장을 따로 두었었다.
- 아랫마정(馬亭) : 옛 양산면 덕정 동 마정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대목리에 편입되었다. 마정마을은 대양 면사무소에서 북쪽 1㎞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도 33번 2차선 도로가 인접해 있고, 이곡마을 입구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옛날 마진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관의 말을 매어 두었다고 마정 이라고 했다고도 하며 산 끝이 마족(말발굽)형국이라 마정이라고도 한다. 3.1 만세 운동 때 이 곳이 집결지였고 결사대 조직도 여기에서 했다. 문헌에 의하면 국도 33번의 2차선도로 건너편 들 즉 이계리 입구 우측 편들과 이곡 입구 좌측 편들 옛날에 공수평(官의 田畓) 또는 공싯 들이라고 하였다.
- 개밭 골 : 개밭 골은 마정 마을 북쪽 500m 거리에 위치하고 국도 33번의 2차선도로와 접하고 있다. 마을 이름 유래는 산세가 개밥 통 같이 생겼다고 하여 개박 골이라 불렀다고 하고 또는 개가 밭에 누워 있는 형국이라 하여 개밭 골이라 불렀다는 설, 산 등이 황토로 먼 곳에서 보면 마치 붉은 꽃이 만개한듯하여 개화골인데 개화의 발음변형으로 개밭골이라는 설, 옛날 초상 때 가장(가매장)을 많이 했다는 등의 말들이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고증은 없다.
- 이계(伊溪) : 이계마을은 이사동이라 불러오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이 마을 심씨 가문에 등과 및 다섯 분의 학자가 배출되어 선비가 거처하는 마을로 정각을 많이 세우고, 그 정각에 많은 학자들이 출입하면서 말하기를 풍수지리설에 의해 동리 이름을 짓고 부르는 것도 좋으나 이사동은 두 마리의 뱀 동리라는 뜻의 이름으로 동리와 가문의 체면상 좋지 못하다 하여 선조들이 두 二자를 저 伊자로 바꾸고 뱀 巳 자를 물 이름 泗자로 바꾸어 伊泗洞으로 불러왔다고 전해오고 있다. 1960년대 마을마다 정확한 동리명을 조사 정리할 때 伊泗洞은 지형상으로 북쪽 깊은 골짜기에서 남쪽으로 동리 한복판에 사시사철 시원한 시냇물 소리가 들리므로 물 흐름과 같이 만사가 막히지 않고 시원하게 뚫려 만사형통한다는 좋은 동리라 하여 물 이름 泗字를 시내 溪字로 바꾸어 伊溪里라고 동네 어른들과 동민이 합의하여 면사무소에 신고한 이후 伊溪里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3.2. 정양리
옛날 합천군 대목면 지역이었으며, 진양 또는 정양이라 하였으나 1914년 행정 개편에 따라 상회동과 하회동을 병합하여 정양리라 하며 대양면에 편입되었다. 정양리는 행정마을인 정양마을 1개 마을과 정양마을 안에는 진양, 강가, 하회, 상회, 새터, 얼말 6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정양마을 : 하루 종일 양지바르다는 뜻에서 정양이라 불렀다고 전하고 있는데 남정교를 경계로 합천읍과 인접한 마을이다. 정양 마을에는 고려병원, 정비공장, 차량번호판제작소, 자동차 학원, 우시장, 합천고속관광 차고, 정양주유소, 황강주유소, 대형숙박업소(장, 여관), 대형목욕업소 황강스파랜드와 많은 음식점 등 각종 상가와 업체가 운집하여 면민의 생활근거지가 점차 확대되고 있어 앞으로 합천읍의 관문으로 주민의 소득이 많이 향상되는 마을로 부상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정양마을 앞 도로변에 합천군에서는 보기 드문 대단히 넓고 큰 정양 늪이 있는데 이 늪을 정양지이라 불러오고 있다. 합천댐을 건설한 이후 정양 로타리를 중심으로 합천군 도로의 요충지가 되고 있으며, 앞으로 황강 직강공사와 정양 늪이 개발되면 군내에서 제일 발전될 지역이기도 하며 옛날 정양늪 일대가 군내에서 제일 옥토였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강가 : 옛날 남정교 근처에 있던 마을로서 국도 33호선 확장 포장시 없어지고 정양 로타리 위로 마을을 옮겼음.
- 진양마을 : 진양마을은 정양의 옛 이름이다.(고려병원 아래에 있는 마을)
- 새터마을 : 현재 정양 주유소 도로 위쪽에 새로 취락지를 조성한 새마을이라해서 새터 또는 신촌이라고도 부른다. 옛날 도로변에 있던 집들을 국도 33호선 확장 포장시 도로 위쪽으로 마을을 옮겼으며, 현재 합천 이씨들이 주성을 이루고 거주하고 있다.
- 하회 : 일명 아래회미 또는 아래미로 부르기도 하며, 구자동차 운전 교습소 안쪽 마을이다. 밀양박씨, 합천이씨, 진주소씨, 진주강씨가 살고 있다.
- 상회 : 일명 웃회미 또는 상회암동 이라고도 한다. 국도 33호선에 접하고 있는 진주 소씨의 집성촌이다. 까치덤과 넘터곡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정양늪으로 까치덤을 돌아가야 한다고 회암동이라고 하며, 윗쪾 마을이라고 상회동이라 한다.
- 얼말 : 현재 자동차 정비공장 등이 있는 새로 생긴 마을. 옛지명이 얼말들이라 하여 얼말이라 한다
황강만 건너면 합천읍내에서 대양면에서 제일 교통이 편한 지역이고 살기 좋은 지역이다.
3.3. 아천리
아천리는 옛날 대목면의 지역으로서 아촌 또는 아천이라 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소목동과 주촌동을 병합하여 아천리라 하여 대양면에 편입하였다. 아천리는 행정마을인 아천마을 1개와 아천마을 안에는 아천, 한원, 새마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 아천 : 아천마을을 아촌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정양 늪과 연접해 있다. 옛날 아천 마을의 옥토가 남정강의 하천 바닥이 높아짐으로써 늪으로 변해 버렸으며, 현재는 합천 댐의 영향으로 모래가 떠내려 오지 않고, 남정강 하상이 해마다 점차적으로 많이 낮아짐으로써 늪의 물이 점점 빠져나가 경작지가 늘고 있으나 경남도에서 상습 수해 지구인 아천천 개보수 작업으로 하천폭을 넓히고 제방을 쌓아 수해의 늪에서는 벗어났으나 잇단 국도 33호선이 마을 앞으로(조선때 관도) 이설 확장(4차선으로)됨에 따라 절반의 농토가 잠식 되었다. 수 백년 전에 마을이 형성된 아천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종군로가 있으며, 진주 강씨와 연일 정씨의 집성촌 이였으며 현재는 강씨들이 주성을 이루고 있다. 옛 지명은 연촌, 아호, 소목, 아천이라고도 하였으나 현재는 아촌, 아천이라고 한다. 아천의 지명 유래는 호수에 거위가 논다는 뜻이고 연촌은 별지에 마름(연)이 아닌가 한다. 소목은 한원마을보다 골이 작다고 작은눈 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 한원 : 본 마을 입구 옛 주촌동에 대목면 사무소가 현재의 정문(이씨 열녀문) 근처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국도 33호선이 새로 생기게 되자 면사무소도 평으로 이전 하였다.(확장된 33호선이 백 수십년 전의옛 관도로 다시 이설되니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한원 마을은 옛날 합천에서 삼가 의령 신반으로 가는 길목이었던 지역으로 삼거리 주막촌이 있어 이 마을을 주촌동이라 불렀으며, 그 당시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였다고 한다. 원래 지현이 큰눈의 형국이라, 한눈이었으며 옛 지명은 대목,한원, 주촌, 주막앞, 한눈, 한니라고도 했으나 지금은 하니 또는 한원이라고 한다. 이 마을의 쌀은 일조량과 토심이 깊어 미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 아천(鵝川) : 수백년 전에 마을이 형성된 아천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종군로가 있으며, 진주 강씨와 연일 정씨의 집성촌 이였으며 현재는 강씨들이 주성을 이루고 있다. 옛 지명은 연촌, 아호, 소목, 아천이라고도 하였으나 현재는 아촌, 아천 이라고 한다. 아천의 지명 유래는 호수에 거위가 논다는 뜻이고 연촌은 별지에 마름(연)이 있어 연촌이라 부르지 않았나 한다. 소목은 한원 마을보다 골이 작다고 작은 눈 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진주 강씨의 동호정과 별지와 지암이 있고, 구산천정터가 있다.
- 한원(漢原) : 본 마을 입구 옛 주촌동에 대목면의 사무소가 현재의 정문(이씨 열녀문) 근처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국도 33호선이 새로 생기게 되자 면사무소도 금평 으로 이전 하였다. 한원 마을은 옛날 합천에서 삼가 의령 신반으로 가는 길목이었던 지역으로 삼거리 주막촌이 있어 이 마을을 주촌동이라 불렀으며, 그 당시 교통과 상업의 요충지였다고 한다. 원래 지형이 큰 눈의 형국이라, 옛 지명은 한눈이었으며 한자 표기로 대목, 한원, 주촌, 주막 앞, 한눈, 한니 라고도 했으나 지금은 한눈의 발음 변형인 하니 또는 한원이라고 한다. 이 마을의 쌀은 일조량과 토심이 깊어 미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진주 강씨의 호산재가 있고, 소류지와 포강이 있다.
- 새마 : 현재 유료 낚시터가 있는 마을. 옛날에는 영일 정씨들이 살았으며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마라 하고 한자 표기는 신기(新基)이다.
3.4. 무곡리
합천군 대목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장자동을 병합해서 무곡리라 하여 대양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무곡리는 무곡마을과 장지마을 2개의 행정마을로 분리되어 있고 무곡마을에는 상무, 중무, 하무, 초막골, 옥산정, 신반 6개 자연마을로 분리되어 있으며, 장지마을은 장지 1개 마을로 독립되어 있다. 무곡마을 위치는 대양면사무소에서 동북간이 되며, 대양초등학교 좌측 편에 국도 33호 2차선이 통행하고 있으며, 진입로 덕정교에서 동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무곡마을이 있는데 동쪽에는 산세가 험준하고 수려한 높은 대암산이 솟아 있고, 동리 뒤에도 매봉산이 있는 남향으로 자리잡은 평화로운 마을이다. 무곡(무실)마을의 지명유래는 무곡 저수지가 없을 때 황무지였던 관계로 무실이라고 불리었다는 설과 숲이 울창하고 무성했다고 해서 무실이라 불리었다는 설이 전하고 있다.
- 옥산정(玉山亭) : 무곡 입구 첫 마을이면서 월선사와 보성 오씨의 무양재와 남평 문씨의 옥산재가 있는 보성오씨 집성촌이다.
- 초막(草幕)골 : 옥산정에서 북동쪽에 위치한 마을(옥산정 뒤편)이며, 옛날에 초막이 있었다 하여 초막동이라고도 한다. 앞산이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인데 소 앞에 초막이 있어야 좋다하여 초막을 지었으며, 이로 연유하여 초막 골이라 하는 설과 남평 문세린의 아들이 려막(초막)을 짓고 시묘를 살았다고 초막 골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 아랫땀 : 아랫담은 새터와 옥산정 가운데 있는 들을 말하여, 옛날 무산정 서당이 있었던 마을이며, 상주 주씨의 집성촌이다.
- 새터 : 큰 불이 일어난 후 형성된 마을이며, 무곡리 새마을 창고 건너편 마을이다. 상주 주씨와 진주 강씨가 살고 있다.
- 신반(新班) : 새터 앞에 있는 마을이며, 새로 생긴 班이라 하여 신반이라고 하며 새마을 창고가 있고, 의령 남씨의 암서정에서 추봉 남승우선생이 인근 유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장소이다.
- 큰땀 : 무곡 한가운데 있으며, 동민이 제일 많이 거주하는 마을로서 추계 추씨의 퇴산재가 있고, 상주 주씨의 종실과 서재로 사용하는 직산재와 단천정이 있다.
- 중무(中茂) : 마을이 인접해 있는 무곡의 막바지 마을이며, 안악 이씨의 집성촌으로 이씨의 염수재가 있는 마을이며, 또는 웃 무실이라고도 한다.
- 상무(上茂) : 불당, 불탄 골, 불당 골 또는 상촌 이라고도 했으며, 지금은 상무라고 부르고 있다. 불당 골은 옛날에 약수암이라는 절이 있었으며, 그 절터에 보원사라는 절이 있어 그 곳에 불당이 있었다고 불당 골이라 했다 한다. 한편 불탄 골은 마을에 큰불이 있었다고 불탄 골이라 부르며 뿔당 골은 불당 골의 변형된 말이라고 생각되며 추계 추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상촌은 무곡마을의 위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장지
장지마을은 무곡마을에서 동남간 1km 떨어진 곳으로 높은 대암산 밑에 아늑하게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 입구엔는 무곡의 큰 저수지가 있으며, 앞산에는 수령 500년 된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지금은 원목은 죽고 곁가지가 살아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380여년 전 진주강씨 휘, 덕수 청계공 광산 김씨 휘, 필서 대지공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하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 마을에 장자(큰 부자)가 거주했다고 하여 장자동이라 불러왔다고도 하는데 그후 행정개편에 따라 마을 입구에 큰 저수지가 있다하여 장지마을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장지(莊池) : 장지마을은 무곡마을에서 동남간 1km 떨어진 곳으로 높은 대암산 밑에 아늑하게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무곡의 큰 저수지가 있으며, 앞산에는 수령 500년 된 느티나무가 있었는데 지금은 원목은 죽고 곁가지가 살아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380여년전 진주 강씨 청계공 휘, 덕수 청계공 광산 김씨 휘, 필서 대지공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하고 있다. 봉계정 기문에 보면 원래 마을 이름은 봉곡이라 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 마을에 장자(큰 부자)가 거주했다고 하여 장자동이라 불러왔는데 그후 행정개편에 따라 마을 입구에 큰 저수지가 있다하여 장지마을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3.5. 덕정리
본래 합천군 양산면의 지역으로 덕거정, 덕거정촌, 덕정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관동, 남암동과 대목면의 이사동(- )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덕정리라 해서 대양면에 편입되었다. 덕정리는 덕정마을과 남암마을 2개의 행정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덕정, 관동, 웃마정(깐치정) 등 3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덕정마을은 마정과 덕정, 관동의 3개 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 마정마을 : 옛날에는 양산면 덕동마정이었는데 아랫마정을 1914년 행정 구역개편시 대목리로 개편하였다. 떡지 골목이라는 곳도 이곳을 말하며,(깐치정 이라고도 한다.)국도 33호선 2차선도로가 접하고 있어 교통이 가장 편리한 마을이며 대양면의 중심지가 되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대양면 사무소, 대양파출소, 우체국, 대양초등학교, 보건지소, 중부농협 대양지소, 농협구판장, 농촌지도소, 중대본부, 대양경로당 등 면 단위 행정기관과 제반 면민 이용시설이 운집되어 있어 면민들의 생활 근거지가 되고 있다.
- 덕정마을 : 덕정마을 유래는 약 500여년전 문화 류씨가 정착한데 이어 400여년 전 청송 남계 심대용이 먼저 거주하였다. 그 후 덕정마을은 매봉산 정기를 받아 덕정 심씨 문중과 류씨 문중이 주성을 이루며 여러 씨족이 화목하게 날로 번창하여 왔다. 덕정마을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옛날에 동리 앞에 냇물이 주야로 흘러 내리는 곳이라고 해서 마을 이름을 덕천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큰고을을 말하기도 하고 옛날에는 대량국, 대량주의 고도였다.
- 관동마을 : 관동(갓골)마을은 덕정리에서 1km 떨어진 남쪽 국도 33번 도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관동마을 유래는 마을 옆산이 갓처럼 생겼다고 하여 관동마을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 마정(馬亭) : 옛날에는 양산면 덕정리 마정이었는데 아랫 마정을 1914년 행정 구역개편시 대목리로 개편하였다. 떡지 골목이라는 곳도 이곳을 말하며,(깐치정이라고도 한다.)국도 33호선 2차선도로가 접하고 있어 교통이 가장 편리한 마을이며 대양면의 중심지가 되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대양면 사무소, 대양파출소, 우체국, 대양초등학교, 보건지소, 합천농협 대양지소, 농협구판장, 농촌지도소, 중대본부, 대양경로당 등 면 단위 행정기관과 제반 면민 이용시설이 운집되어 있어 면민들의 생활 근거지가 되고 있다.
- 덕정(德亭) : 덕정마을 유래는 약 500여년전 문화 류씨가 정착한데 이어 400여년 전 청송 남계 심대용이 먼저 거주하였다. 그 후 덕정마을은 매봉산 정기를 받아 덕정 심씨 문중과 류씨 문중이 주성을 이루며 여러 씨족이 화목하게 날로 번창하여 왔다. 덕정마을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옛날에 동리 앞에 큰 냇물이 주야로 흘러내리는 곳이라고 해서 마을 이름을 덕천, 덕촌 이라고도 하였다. 큰 고을을 말하기도 하고 옛날에는 대양국, 대량주의 고도였다. 청송 심씨의 람덕재와 덕천서사가 있고, 문화 류씨의 덕양재와 태남재가 있다.
- 관동(冠洞) : 관동(갓골)마을은 덕정리에서 1km 떨어진 남쪽 국도 33번 도로 옆에 위치하고 있다. 관동마을 유래는 마을 옆 산이 갓처럼 생겼다고 하여 갓골이라 하였다. 영일 정씨의 와룡정과 임헌공 정세필의 유적비가 마을 입구에 있다
- 남암
- 남암리는 대양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2k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백암리로 가는 아홉 사리재 입구 도로변에서 우측으로 1km 떨어진 조용한 마을이다. 본래 남암마을이 독립된 마을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덕정리에 속했다가 현재는 행정리로 독립된 마을이다. 남암마을 연혁은 300여년전 전주천씨 부인이 아들 순흥 안만상을 데리고 이 마을에 정착했다고 한다. 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안씨보다 박씨가 먼저 이 마을에 정착했다는 말이 있으나 후손이 없어 확인할 자료가 없다.
- 남암(藍岩) : 남암마을의 지명 유래는 남암리 동남간 300m 위치에 있는 바랑골 산 지형이 꼭 중의 바랑과 같이 생겼다고 하고 덕정못(못골)옆에 모집등이 있는데 그 산 지형이 중목탁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부처님을 연상케 하는 나무아미타불을 불러오다가 말이 길어 나무아미로 짧게 부르다가 남애미, 남암 발음으로 변형되어 현재까지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남암 마을은 순흥 안씨의 집성촌이다. 순흥 안씨의 구남정이 있다.
3.6. 양산리
합천군 양산면의 지역인데 이곳에 면소재지가 있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배미동, 사동을 병합하여 양산리라 하여 대양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양산리는 양산마을과 신거마을 2개의 행정리로 분리되어 있다. 양산리는 대양면 소재지에서 1.5km 떨어진 곳으로 합천읍과 진주 사이의 33호선 국도변에 접하고 있거나 국도변과 그 인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배미, 새터 마을 등 2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양산마을
- 양산마을은 새터, 배미 2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배미(培美) : 배미마을의 위치는 양산리 새터마을 동쪽에 위치하고 있고, 대양면 사무소에서 바로 마주 보이는 마을이다. 지형이 배의 바닥과 같은 형국이라 하여 배(舟)밑이라고 배미등이라고 불러온 설과 (옛날에는 야미라고도 했다 한다.) 또 한편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뱀의 등과 같은 형국이라 하여 뱀의 등(배미등)이라 불러 왔다는 설이 있으나 고증할 자료는 없다. 전주 이씨들의 율산정이 있다. 90년도 경남 잠업시범 단지로 지정되어 대규모 잠업 단지로 발전시켜 앞으로 농가 소득증대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 새터 : 400여년전에 남평 문무언이 먼저 정착했다고 전하고 그 당시 뒷산에 학이 많아서 학동 이라 부르다가 새로 터를 잡아서 만든 마을이라고 하여 새터라 한다. 한자 표기로 신기동이라고 표기 한다. 김해 김씨의 학운정이 있다
- 신거
- 신거마을은 사동, 신거, 작은 새터(창동) 3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 신거(新巨) : 1941년 양산 2구로 구장을 두었다. 국도 33호선의 인접한 마을이며, 동명 유래는 옛날 이 마을에 살던 짚신 장수가 집 앞에 짚신을 걸어 놓아(괘리점) 행인들이 짚신을 보고 구입하도록 했다 해서 신거리라 했다 한다. 순 우리말의 신거리를 발음 그대로 한자 표기를 신거리로 했다하는데 혹자는 마을의 발전을 기원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라고도 한다.
- 작은새터 : 신거 맞은 편 육우정 아래에 있는 사동, 또는 사창동이라고도 하며 조선조 철종(1860년) 임금 때 합천군수 심성지가 아현원을 설치한 곳이라 하여 사창동 이라고도 하는데, 신거리 아래 국도 변 암벽 밑에 세워진 비석이 심군수의 영세불망비 이다. 청송 심씨들의 육우정이 있고, 그 아래 회사보에서 한지를 생산 했다.
- 사동 : 배암골 이라고도 하며 합천 이씨, 나주 라씨가 살고 있으며 현재 서광사 절이 있다.
3.7. 도리
합천군 양산면 지역으로서 독골, 돗골, 도동, 도안이라고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점촌동과 대목면의 구시골(조동)을 병합하여 도리라하고 대양면에 편입되었다. 도리는 행정리와 법정리가 같으며, 도리마을 안에는 상도리, 하도리(점촌), 구시골 3개의 자연마을이 분포되어 있다. 대양면 소재지에서 6km 떨어진 마을로서 합천읍에서 진주로 연결되는 33호선 국도변, 아등재 입구에서 우측편에 위치한 조용한 마을이다.
- 도리마을에는 고려말기와 이조 초인 지금부터 약 600여년 전에 황씨, 한씨, 이씨가 정착하였다 하나 이름은 미상이다. 도리마을의 지명유래는 옛날에 마을의 서쪽에 도암이라는 바위가 있어 도동이라 했다고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도동(상도리)에서 용주면 팔산리와 노리, 장전리, 쌍백면 멱골리 대양면 이계리와 신거리 등 사방 각처로 통하는 길이 많이 있다고 하여 길자를 따서 도리라 했다 한다. 옛날 도리를 돗골 이라고 불렀는데 그 연유는 이 동리에서 돗자리 원료인 완초를 많이 생산하는 골이라 하여 돗골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으며, 독골로 부른 연유는 점촌동과 구시골의 염재에서 옹기를 생산했기 때문에 독골이라고 불렀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는 도동을 상도리, 윗도리라고 부르며, 점촌동을 하도리라고 부르고 있으며, 옛날 구시골을 조동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거의 부르지 않는다
- 도동 : 웃도리, 상도리, 독골, 돗골 이라고도 하며 도리의 제일 위에 있는 마을이다. 진양 강씨 은열공파의 도강재와 종사랑 정릉 참봉 죽헌 진주 강공의 유적비, 애국지사 인암 강상무의 추모비와 박사공파의 도양재가 있다. 분재의 명인이 운영하는 백암산방이 있다.
- 구시골 : 옛 대목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에 도리에 병합 되었고 상도리와 하도리 중간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고 합천 이씨의 모선각이 있다. 옛날 구시골을 조동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거의 부르지 않는다.
- 점촌(店村) : 도리마을 입구에 있는 마을로 하도리라고도 하며 옛날 옹기를 생산 했던 마을이라 토점동, 점촌 마을이라 한다. 3개의 옹기굴이 있었고 장독, 사구, 뚝배기 등을 생산하다가 1976년도에 폐쇄 했으며 전성기에는 약80여명의 종업원들이 종사 했다. 경주 이씨의 판석정과 하동 정씨의 봉호정과 창녕 조성연의 기행비가 있다
3.8. 함지리
대양면 소재지에서 4km 떨어진 마을로서 진주에서 합천읍을 경유하여 대구로 연결되는 33호선 국도변 아등재 입구 좌측편으로 1km 거리에 있는 한적한 마을이다. 본래 합천군 양산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양면에 편입되었다. 함지리는 행정마을이 1개 마을로서 마을 안에는 작은 함지, 큰 함지, 함지주막 3개의 자연마을이 분포되어 있다. 함지마을은 400여년 전 선조 31년 정유재란 당시 나주 회진 나원 임씨 일가가 난을 피해 이 마을에 정착했다 한다. 현재는 나주임씨의 집성촌이며, 조선중기까지는 함계리로 불러 왔다고 한다.
- 함지마을 지명유래는 마을 남쪽에 마등산과 동쪽에 안봉산 서쪽에 금구산(금반승, 금반산성)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각 봉우리마다 샘이 있어(금반승, 옹달못팽전과 큰골산봉의 도토리샘과 배안골(배암골)산봉의 돛달샘) 하늘못이라 하여 함지라고 한다. 지형이 함지박처럼 되었다하여 함지라 한다.
- 큰함지 : 함지의 큰 마을이며, 옛날에는 큰절(큰암자 대암자)이 있어서 큰암자, 큰함지라고 한다. 부처골이 있으며 그 흔적이 남아 있다.
- 작은함지 : 함지의 작은 마을이며, 옛날에 작은 암자가 있어서 소함지, 소암자라고 한다.
- 함지주막 : 함지 입구에서 본동까지 외딴집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등재밑에 주막이 있어 함지주막이라 한다
3.9. 안금리
안금리는 옛날 양산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개편에 따라 후사동을 병합하여 안금리라 하여 대양면에 편입되었다. 골짜기 안굼(구렁)이 되므로 안금 또는 안짐이라 하였다. 안금리는 행정마을 1개의 안금마을이 있는데 안금 마을안에는 본동, 후사, 내동(안담), 중촌, 삼박골 5개의 자연마을으로 분포되어 있다. 안금마을의 위치는 대양면 소재지에서 남쪽 진주선 33호 국도 1km 떨어진 지점에서 남쪽으로 안금리 진입로를 따라 1km 깊은 골짜기에 5개 자연마을이 분포되어 살고 있는 조용한 마을이다. 안금마을에는 원주 원씨(이름 미상)가 약 400여년 전에 이 마을에 제일 먼저 정착했다는 말이 전해 오고 있고 그 후 파평 윤씨 신달 시조 22세손 전이 380여년 전에 마을에 먼저 정착했다고 후손들이 전하고 있다. 안금리 지명 유래는 골짝안이 지형상 구렁형태로 되어 있으므로 암굼, 안금(안짐)으로 발음이 변하여 불렀다는 설과 또 옛날에 쇠붙이 이외 주물작업의 흔적과 금광을 발굴한 것으로 보아 골짜기 안에 금이 있다 하여 안금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 본동 : 안금리의 본 마을로서 안금리의 첫 마을이며, 청송 심씨의 집성촌이다. 청송 심씨의 안천정과 파평 윤병권의 창효각이 있다.
- 후사동(後寺洞) : 뒷절골, 뒤절골, 삐짓골이라고도 하며, 옛날 양산면일 때는 독립된 마을이었으며 1941~2년에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금 2구로 구장을 두었다. 1943년 안금 1구와 병합하여 오늘에 이른다. 파평 윤씨들의 집성촌이다. 파평 윤씨의 동양재와 영일 정태화의 공적비가 있다. 마을 위에 절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안담 : 안안금, 안안짐, 내안금, 안계라고도 불리 운다. 안짐재(백암리 문의실로 가는 고개)가 있으며, 본동과 중촌의 중간 좌측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선산 김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이 마을에 선산 김씨의 안계정과 안땀 못, 못 옆에 법화종의 정불사가 있다.
- 중촌(中村) : 내동 위 삼박골 중간에 있는 마을이며, 삼박골과 중간에 마을이 있다고 중촌이라 한다. 파평 윤씨들이 주성을 이루고 있으며, 파평 윤씨의 연봉정이 있고, 안금 못(소류지)가 있다.
- 삼박골 : 산박골, 삼학동이라고도 하며 의령의 말깃재와 쌍백의 배잿(이현)고개가 있는 마을로 중촌 마을 위 막바지 마을이다
3.10. 백암리
옛날 초계군 백암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촌리와 외동리를 병합하여 옛날 백암면의 이름을 따서 백암리라 하여 합천군 대양면에 편입되었다. 백암리는 아홉 사리재 밑 동남간에 위치하고 있다. 백씨덤이 있으므로 백씨와 덤자를따서 백암리라 하는 설과 흰바위(국사봉 바위)가 있어 백암리라 부르는 설도 있다. 또한 백산덤 밑에 있는 바위보다도 백산초등학교 맞은 편에 있는 바위가 더 크다 하여 맏백자를 따서 백암이라 불러왔다는 설도 있다. 현재 백암리는 행정리인 백암마을과 상촌마을 2개 마을로 분리되어 있으며, 문례실, 가라곡, 오두말, 덤밑, 계동, 상촌 등 6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백암산(무월봉)의 이름을 따서 백암이라 한 것이 유력하다.
- 백암마을안에는 문례실, 가라곡, 구사, 오두말, 4개의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 문례실: 아홉사리 재 남쪽 재밑 구사동 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무노실, 문의실, 물렛골, 모노실, 외동, 물래골 등 여러 가지로 불러오고 있다. 동명 유래는 지리풍수설에 의하여 지형이 물래처럼 생겼다고 하여 물렛골, 물레실이라 불러오고 있다. 마을회관이 이 마을에 있다.
- 가라곡 : 문어실 동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가동, 갈동, 가례동 등 여러 이름으로 불러왔다. 가라골 동명 유래는 지형이 물렛가락처럼 생겼다고 하여 가라골이라 하며, 물레옆에는 반드시 가락이 있어야 한다고 가라골이라 하였다. 나주 나씨의 가산재가 있고 가산재 안에 나씨 세효자비가 있고 벽진 이씨의 선훈재와 백암 못(소류지)이 있다.
- 오두말(烏頭말) : 백산초등학교가 있고 백암면 사무소가 있던 마을. 까마귀 머리설이라 오두말이라 한다. 그 외 농협창고와 보건진료소, 백암교회, 게이트볼장과 로변에 초계군수 임상준의 영세불망비와 거창 유씨의 추원재가 있다.
- 구사(九沙) : 굽이(모롱이)가 많다 하여 다현. 아홉 사리라고도 하며 덕정리로 가는 아홉 살 고개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 옛 진주 강씨의 계산재가 현재는 가정집으로 변했다. 매재 못이 있다
- 상촌
옛날 초계군 백암면에 속해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합천군 대양면 백암리에 편입되었으며, 상촌마을 안에는 상촌, 덤밑(내동), 계동, 양지 4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무월봉 아래에 있으며, 옛날 백암사가 있던 마을이다.
- 덤밑 : 덤(바위) 밑에 있는 마을이며 백산초등학교 위에 있는 마을이라 음지마을이라고 하며 암하라고도 부른다. 당산이 있고, 토종돼지 시범단지가 있다.
- 계동(桂洞) : 계동 및 제동이라 하며, 정자나무인 계수나무가 있었다고 계동이라 하며 충주 지씨들의 계양재가 있다.
- 상촌(上村) : 덤 밑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백암리에서 제일 위에 있다고 상촌 이라고 하며 무월봉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백암사(대동사)가 있었던 마을이다. 현재는 마을뒤에 약수암이 있고, 백암사사지에 석가여래좌상과 보물 석등이 있으며 상촌 못이 있다.
- 양지(陽址) : 덤 밑 맞은편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다
3.11. 오산리
오산리는 아홉사리 재를넘어 백암리를 지나 의령군 봉수면과 접하고 있는 마을이다. 옛날 초계군 백암면의 지역으로서 오미 또는 오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오서동을 병합하여 오산리라 하여 합천군 대양면에 편입되었다. 1989년 음지마을(하오산)은 의령군 봉수면으로 편입되었으며 한지(문종이)의 주 생산지이다.양지마을은 1914년 의령군 봉수면 서암리로 편입. 현재 오산리는 오산마을 1개의 행정마을이 있는데 오서골과 샛터 2개의 자연마을로 분포되어 있다.
* 오서골(烏捿골) : 대양면 사무소에서 약 7km 떨어진 국사봉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오서골 동명의 유래와 전설은 오서골 뒷산이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오두설, 즉 까마귀 머리같이 생겼다는 설이 있고, 또 한편 뒷산 지형이 까마귀가 깃을 드리는 형국이라 하여 오서골 이라고도 하는 설이 있다. 옛날 오서골에 반남 박씨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스님이 시주를 나갔는데 동민이 시주를 해주지 않자 서운한 마음이 생긴 스님은 동리를 망하게 하려고 거짓말로 동민에게 산에 돌을 많이 갖다 놓으면 동리가 번창 할 것이라고 하니 동민이 오두산에 돌을 많이 갖다 놓은 이후 잘 살던 반남 박씨가 모두 못살아 오서골을 떠났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산에 검은 돌이 까마귀처럼 많이 있다 하여 오산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함안 조씨의 오산재가 있고, 1989년 준공한 대양면에서 제일 큰 저수지인 오산저수지가 있다.
-
새터 : 오서골 위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다
- 음지 : 본래 대양면에 속하여 있었는데 1989년 행정구역 조정때 의령군 봉수면으로 편입 되었으며 오산리 입구 오른쪽 음지쪽에 있는 마을이다.
4. 특징
면소재지는 덕정리이다. 이 면의 특징은 합천읍과 경계로 있으며 33번 국도와 1026번 지방도, 1011번 지방도가 지난다.2024년 12월경에 함양울산고속도로가 완공되면 합천IC를 통해 함양, 울산으로 갈 수 있다.
5. 교육
초등학교 - 대양초등학교 (공립)6. 출신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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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주민등록인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