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황제 직속 기병대 총사령관 Flavius Theodosius 대 테오도시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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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 |
신의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Divus Theodosius Pater) |
휘 |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Flavius Theodosius) |
직위 |
황제 직속 기병대 총사령관 (Magister Equitum Praesentalis) |
부친 |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호노리우스 (Flavius Julius Honorius) |
자녀 | 아들 테오도시우스 1세 |
생몰 | ? ~ 37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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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렌티니아누스 1세 치세 때 로마 제국 서방 영토에서 활약한 장군. 통칭 테오도시우스 백작(Count Theodosius).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버지다.2. 행적
아버지는 플라비우스 율리우스 호노리우스(Flavius Julius Honorius)라고 하며, 일찍이 군에서 복무한 이래 전공을 세우면서 받은 보상금으로 카우카와 이탈리카 일대에 상당 규모의 토지를 구매해 히스파니아 속주에서 알아주는 대지주가 되었다. 330년대 말이나 340년대 초에 테르만티아(Thermantia)와 결혼하여 두 아들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와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를 낳았다.368년, 테오도시우스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로부터 코메스 레이 밀리타리스(comes rei militaris: 장군 계급)을 수여받은 뒤 브리타니아 속주로 파견되었다. 당시 브리타니아는 로마에 귀속되었던 부족들과 하드리아누스 성벽 북쪽의 스코트인이 합심하여 로마 정부와 군대를 공격한 367년의 음모로 인해 무정부 상태 에 휘말렸다. 테오도시우스는 보노니아(현재 볼로뉴-쉬르-메르)로 가서 함대에 군대를 싣고 출항해 루투피아에 상륙했다. 당시 그가 이끌고 간 군대는 보조 팔라티나(Auxilia Palatinae) 네 개 부대로, 각각 바타비 세니오레스, 이오바니 세니오레스, 헤룰리 세니오레스, 그리고 빅토레스 군단이었다.
상륙 후 론디니움(현재 런던)으로 이동한 그는 그곳에 본부를 세운 뒤 로마 군단에 합류한 탈영병들에게 자비를 베풀었고 유능한 문민 관료와 장교들을 대륙으로부터 차출해 행정부를 공고히 했다. 이후 반란으로 황폐해진 도시와 요새를 재건했으며, 반란을 획책하던 브리타니아 보조병 전원을 강제 전역시켜 후방으로 보내버린 뒤 게르만족 보조병들을 대거 고용했다. 이후 브리타니아 부족들을 하나씩 소탕한 끝에 369년에 전부 복속시키고 하드리아누스 성벽의 방어를 강화했다. 몇몇 기록에 따르면. 테오도시우스는 방벽 북쪽까지 응징 원정을 떠났으며, 아타코티족을 복속시켰다고 한다.
그 후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부름을 받고 트리어로 이동한 테오도시우스는 마기스테르 에퀴툼 프라이센탈리스(Magister Equitum Praesentalis: 황제 직속 기병대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다. 370년 라인 강을 도하하여 갈리아에 침입한 알레만니족을 공격해 많은 적병을 죽이고 포로들을 북이탈리아에 정착시켰다. 이후 발렌티니아누스가 알레만니의 침략에 보복하고자 라인강을 건너 그들의 영역으로 쳐들어갈 때 동행했으며, 371년 사르마티아에 대항하는 원정에도 참여했다.
372년 베르베르 족장 피르무스가 아프리카 총독 로마누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당초 전 족장 누벨이 사망한 뒤 아들들이 영지를 놓고 다투었다. 이때 피르무스는 사생아지만 로마누스의 총애를 받았던 형제 잠멕을 살해했다. 로마누스는 이에 격분하여 트리어의 황궁에서 내무장관으로 봉직 중이던 인척 레미기우스를 통해 피르무스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보고를 올렸다. 이걸 알게 된 피르무스는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진짜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 당시 아프리카 속주는 363년 총독으로 부임한 로마누스의 실정으로 민심의 이반이 일어나고 있었다. 트리폴리타니아[1] 렙티스 마그나 시 주변의 농촌 주민들은 오지 사막에 사는 베르베르인에게 빈번하게 약탈당하자, 로마누스에게 구원을 청했다. 로마누스는 렙티스 마그나에 병력을 집결시킨 후, 주민들에게 낙타 4,000필을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주민들이 거절하자, 로마누스는 병사들을 해산시키고 출정하기를 거부했다. 주민들은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게 대표단을 보내 로마누스의 행태를 규탄했다. 하지만 로마누스는 레미기우스를 꼬드겨 대표단이 도착하기 전에 사태의 경위를 날조하여 황제에게 먼저 보고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양측의 말을 모두 믿지 않고 조사위원회를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위원회가 미적거리는 사이, 베르베르인들이 렙트시 마그나를 습격했다. 주민들은 두 번째 사절을 황제에게 파견해 로마누스의 계속되는 직무유기를 고발했다. 발렌티니아누스는 팔라디우스를 파견하여 북아프리카의 실정을 파악하게 했다. 팔라디우스는 현지에 도착한 뒤 로마누스가 저지른 행태를 파악했으나, 한편으로는 아프리카 주둔군 지휘관 및 경리관들과 짜고 공금 일부를 횡령했다. 그 후 팔라디우스와 로마누스는 악마의 거래를 했다. 팔라디우스는 트리어로 돌아와 렙티스 마그나 주민들의 탄원은 사실무근이라고 보고했고, 로마누스는 팔라디우스의 공금 횡령을 숨겼다. 발렌티니아누스는 거짓 탄원을 한 렙티스 마그나 주민들을 처벌하라고 명령했고, 368년경 트리폴리 시 장관 한 명이 처형되고 대표 2명은 혀가 뽑히는 처벌을 받았다.
이렇듯 든든한 '빽'을 둔 로마누스는 주민들을 마음껏 수탈했고, 이로 인해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래서 피르무스에게 호응하는 이들이 상당했고, 반란은 쉽사리 진압되지 않았다. 발렌티니아누스는 그제야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여기고, 테오도시우스를 아프리카로 파견했다. 테오도시우스는 373년 시티피스에 도착한 뒤 로마누스가 수탈을 일삼은 사실을 파악하고, 그를 긴급 체포했다. 그 후 로마누스의 문서들을 조사하다가, 팔라디우스가 제삼자에게 보내고 다시 제삼자가 로마누스에게 인사를 전하는 편지를 발견했다.
"팔라디우스가 사령관께 안부를 묻는다면서 하는 말이, 자신이 관직에서 해임된 것은 트리폴리 사건에 대해 거짓 보고를 올렸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테오도시우스는 즉각 황제에게 보고했고, 팔라디우스는 은퇴하여 살고 있던 시골 영지에서 끌려나와 트리어로 압송되던 중 자살했다. 또한 내무장관 레미기우스는 처형되었고, 거짓 증언을 한 자들 역시 뒤따라 처형되었다. 그렇게 사건을 수습한 뒤, 테오도시우스는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로 진격하여 피르무스를 토벌할 군대를 조직했다. 피르무스는 테오도시우스에게 사절을 3차례 보내 로마누스가 자신을 몰아세워서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며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에게 사정을 잘 설명해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는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피르무스는 보라색 망토를 두르고 목줄을 맨 채 돌아다니며 황제 행세를 했다고 한다. 테오도시우스가 협상 요청을 들어주지 않은 건 이것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피르무스는 테오도시우스에 맞서기 위해 형제 마시젤과 디우스에게 틴덴스와 마시니센스 인을 이끌게 하였고, 누이 키리아는 피르무스를 대신하여 베르베르 부족의 내정을 이끌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전력상 열세여서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375년경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피르무스는 이사플렌세스 족장 이그마젠에게 배신당해 사로잡힌 뒤, 테오도시우스에게 끌려가던 중 자살했다.
이리하여 아프리카 속주를 안정시키는 데 성공한 그는 아프리카를 안정시키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러나 375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급사하고 그라티아누스가 서방 황제에 등극한 지 얼마 안 된 376년 초 돌연 카르타고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급사한 후 파벌간의 대립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그가 딴 마음을 품고 반기를 들려 했다는 모함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죽기 직전에 기독교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아들 테오도시우스는 374년 모이시아 장관으로 부임한 뒤 고트족과 반달족의 침략을 물리쳤지만 아버지가 처형된 뒤 군에서 물러나 낙향했다. 그 후 몇년 간 조용히 지내다가 378년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발렌스 황제가 고트족에 대패하고 전사하면서 동로마 제국이 마비상태에 이르자, 그라티아누스는 아들 테오도시우스를 불려들여 대 테오도시우스의 혐의를 취소한 뒤 그의 아들을 동방의 아우구스투스(정황제)로 세우고 제국을 분할 통치했다. 이후 즉위한 아들에 의해 신의 아버지 테오도시우스(Divus Theodosius Pater)로 신격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