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별 명칭 | |
중국어 |
寧波之亂 爭貢之役 |
일본어 |
寧波の乱 明州の乱[1] 宗設の乱[2] |
한국어 |
영파의 난 영파쟁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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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523년 가정제 시기, 명나라의 해안지역 영파부(寧波府)[3]에서 오우치 가문의 감합선 선원들이 호소카와 가문 소유의 감합선에 방화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영파의 중국식 발음을 따서 닝보의 난이라고 불리기도 한다.2. 경과
근본 원인은 명나라와의 한정된 감합무역권을 둘러싼 주도권 다툼 때문이었다.1401년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명나라에 사절단을 보내 통교할 것을 청했고 명나라는 왜구를 단속한다는 조건으로 제한된 감합무역을 인정했다.
일본 조공 사절단은 명나라 해안도시 영파에서 물품 검사를 한 후 북경으로 가서 교역하였는데 그 이익이 최소 4~5배에서 최대 20배에 달하는 이익을 누리면서 일본 내에서 감합무역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다.
초기에는 무로마치 막부가 감합무역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1467년 오닌의 난이 일어나 막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해져 전국시대가 도래하자 감합무역권은 오우치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이 독점하게 된다.
1523년 오우치 가문이 명에 감합선을 파견하자 호소카와 가문도 감합선을 파견하였고, 오우치 측의 감합선이 먼저 도착하였으나 호소카와 측에서 명나라 관리에게 뇌물을 바쳐 먼저 입항검사를 받게 되었다. 이 사실에 분노한 오우치 측은 호소카와 측의 감합선에 불을 지른 다음 선원들과 명 관리를 살해하였고, 이 과정에서 일부 인원이 명나라의 해안지방을 약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를 영파의 난이라 부른다.
이후 명나라의 대일감정이 악화되어 감합무역은 잠시 중단되었다가 1536년 오우치 가문에서 재개되었고 1551년 오우치 가문의 멸망 때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