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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창규(昌奎) |
본관 | 함평 노씨[1] |
출생 | 1927년[2] 6월 15일 |
전라남도 장성군 삼서면 수해리[3] | |
사망 | 2020년 8월 6일 |
광주광역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6묘역-30호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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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2. 생애
노동훈은 1927년 6월 15일 전라남도 장성군 삼서면 수해리에서 아버지 노경무(魯炅武, 1907. 3. 15 ~ 1929. 11. 9)와 어머니 여양 진씨(1905. 8. 1 ~ 1973. 3. 27) 진만협(陳萬協)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43년 3월 광주사범학교 3학년에 재학하던 중 옥대호(玉大鎬)·조규학(趙圭學)·안동영(安東永) 등 17명과 함께 무등독서회(無等讀書會)를 조직하여 매월 두 차례에 걸쳐 모임을 갖고 민족독립운동과 식민사관에 대항한 정통역사관 확립에 노력했다. 또한 연합군이 한국에 상륙할 때 행동대원으로 봉기하는 것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락원으로 밀명을 실행하는 계획을 논의했다. 후에 그는 "사범학교에 일본인 교사와 친구들도 많은데 비밀리에 독서회 활동을 한다는 건 엄두도 못내던 시기였다"며 "친구가 중이염을 앓고 있다기에 문병을 구실삼아 사범학교 교우들과 순창농고의 비밀결사 조직원들을 친구집으로 모이게해 일본 경찰들의 눈을 피해가며 독립운동을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1944년 12월 모든 계획이 발각되면서 나주경찰서에 체포된 그는 8개월간 옥고를 치르며 모진 고문을 받아 다리뼈들이 부서졌다. 그러다 8.15 광복으로 출옥한 그는 광주사범학교에 복학하여 졸업한 뒤 광주 대성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받은 후 1992년 8월 나주 공산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할 때까지 42년간 전라남도 일대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퇴임 당시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1995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으며, 2018년 11월 이낙연 국무총리의 방문을 받고 집 현관문에 '국가유공자 명패'가 걸렸다. #
2020년 8월 6일 광주광역시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2020년 8월 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6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