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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카츠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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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신 나카무라 카츠히로 감독.jpg
나카무라 카츠히로
中村勝広 | Katsuhiro Nakamura
출생 1949년 6월 6일
사망 2015년 9월 23일 (향년 66세)
출신지 치바현 산부군 쿠주쿠리마치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학력 치바현립 나루토 고등학교- 와세다대학
신체 177cm, 65kg
투타 우투우타
포지션 2루수, 1루수
프로입단 1971년 드래프트 2순위
소속팀 한신 타이거스 (1972~1982)
지도자 한신 타이거스 2군 감독 (1983~1987)
한신 타이거스 작전, 수비·주루 코치 (1988)
한신 타이거스 1군 감독(1990~1995.7)[1]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2006)
프런트 오릭스 블루웨이브-버팔로즈 GM (2003~2005)
한신 타이거스 GM (2012~2015)[2]

[clearfix]
1. 개요2. 프로입단 전3. 한신 선수 시절4. 지도자 시절5. 프런트 시절, 사망6. 기타

1. 개요

일본의 전 야구선수 및 지도자, 프런트.

현역 시절엔 한신 타이거스 원클럽맨으로 활약했고 은퇴 후엔 지도자로써 리빌딩적인 면에선 나름대로 족적을 남겼으나, 전체적으론 감독으로써 성공했다고 보기 힘든 성적을 남겼다.

2. 프로입단 전

치바현 출신으로 나루토 고교에서는 3번 타자 유격수로 팀을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 본선까지 진출시키는 데 공헌했으나, 프로 지명을 못 받고 와세다대학 진학을 택했고 대학에서도 2루수 베스트나인을 한 차례 수상하는 등 나름대로 활약을 이어갔다. 대학 졸업시즌인 1971년 드래프트에서 한신 타이거스의 2순위 지명을 받고 프로로 진출했다.

3. 한신 선수 시절

데뷔 시즌인 1972년 개막전부터 1번 타자- 2루수로 선발 출장하는 등 한신 구단에서도 의욕적으로 나카무라를 신예 스타로 밀어주었으며, 팬투표 선출로 올스타전에 출전하기도 했다. 첫 시즌부터 81경기를 출전하며 타율은 .175로 낮았으나 3홈런 4도루 9타점을 기록하며 나름대로 가능성을 보였다.

1974년부터 본격적으로 기량이 만개, 이 해 100경기 이상을 출전하면서 11홈런을 기록하며 타석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1975년엔 전경기 출장에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넘기면서 타율 .280/OPS .828, 16홈런[3] 43타점으로 커리어하이를 찍으며 타선에서의 중심을 잘 잡아줬다. 이후 첫 풀타임 시즌만큼의 성적을 찍진 못했지만 1978년 시즌까지 매 100경기 이상씩 출전하며 10홈런 이상을 기록하는 장타력을 겸비한 2루수[4]였다. 수비에서도 골든글러브 수상 경력은 없었지만 견실한 수비력을 보여주며 1975년 일본 기록인 단일 시합 11보살을 수립했으며, 1978년에는 당시 일본 기록이었던 2루수 수비율 .995를 기록하기도 했다.[5]

1979년 시즌부터 1루수로 전향했으나 이때부터 출전 기회가 서서히 줄어들었고, 결국 1982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자신의 후임 감독이 되는 후지타 타이라보다 늦게 데뷔해 빨리 은퇴한 셈.

4. 지도자 시절

은퇴 후 곧바로 한신에서 2군 감독을 맡아 1987년까지 유망주 육성에 힘쓰다가 1988년 1군으로 승격하여 작전 코치 겸 수비, 주루 코치를 역임했고, 1989년에 잠시 팀을 떠나 평론가 생활을 하다가 바로 다음 해인 1990년부터 무라야마 미노루의 후임 감독으로 취임했다. 취임 첫 2년간은 구단 사상 첫 2년 연속 최하위라는 굴욕을 겪었지만[6], 1992년엔 신죠 츠요시, 쿠지 테루요시, 카메야마 츠토무 등의 신예들의 활약으로 우승 경쟁에 참여했다가 아쉽게도 시즌 막판에 연패를 거듭하면서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장시간 경기 당시에도 감독으로서 팀을 지휘했으며, 한신아재들의 난장판에 몰수패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도 선수단을 모은 후 이 말을 남겼다.
みんな、何とか受け入れてほしい。ただ、この試合は絶対に落とせない。力を合わせて戦ってくれ!
얘들아, 어떻게든 받아들였으면 한다. 하지만 이 시합을 놓칠 수는 없다. 힘을 합쳐 싸워다오!

그러나 1992년의 우승 경쟁은 일종의 회광반조였고, 그 이후엔 계속 하위권을 전전하면서 4466566664의 제일 앞 3자리를 만들게 되었다. 1992년의 호성적 덕분에 계속해서 감독직을 지킨 나카무라였으나[7] 결국 계속되는 팀의 침체를 버티지 못한 채 1995년 7월, 최하위 전락에 책임을 지고 명목상의 휴양 선언과 함께 감독직에서 해임되었다. 감독 대행 후지타 타이라가 맡았다.

단일 임기 기준으로는 5년 7개월로 역대 한신 타이거스 최장기간 감독이었으나[8], 감독으로서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상술했듯 신죠 츠요시 등을 키워내며 리빌딩에선 나쁘지 않은 성과를 거뒀으나, 반대로 신예들을 기용하기 위해 베테랑들을 밀어낸 것이 팀 내 불화로 이어지기도 했고, 한신 코시엔 구장의 럭키존 철거로 외야를 넓혀 타선 중심에서 강한 투수진과 수비를 바탕으로 한 지키는 팀컬러로 바꾸겠다고 선언했음에도 정작 투수진의 붕괴와 수비력 쇠퇴를 막지 못하거나 타선 보강을 위해 영입한 선수들이 제 몫을 못하면서 팀의 방향성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는 비판도 받아야 했다. 결국 이러한 점들이 겹쳐 1993년부터 팀은 또 다시 망하고 말았다.

이후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오릭스 버팔로즈의 GM을 맡았다가 2006년 오기 아키라의 후임 감독으로 취임하며 지도자로 복귀했다. 그러나 주전들의 잇달은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이 해 오릭스는 작년 승수보다 10승이나 깎인 5위(52승 81패 3무 승률 .391[9])를 찍으며 처절하게 망했고, 결국 나카무라는 다시 1년 만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5. 프런트 시절, 사망

한신 퇴단 후 평론가 생활을 하다 상술했듯 2003~2005년까지 3년간 오릭스 블루웨이브 GM을 맡았고, 1년간 감독을 맡은 후 다시 프런트로 복귀해 2009년까지 시디어 어드바이저와 구단 본부장 등을 맡았다. 오릭스 프런트 시절에는 카네코 치히로, T-오카다를 지명하여 향후 팀의 주축이 될 선수들을 영입했고, 취임 당시 논란이 되었던 드래프트에서 하위순번으로 지명한 선수들에 대한 계약금 미지급 방침[10]을 "(프로에 대한) 꿈과 동경만으로 입단시키는 건 개인이나 팀에게나 좋지 않다"라며 폐지시켰다.

2012년 9월에 한신 타이거스의 GM으로 취임하며 데뷔팀에 복귀했고, 후쿠도메 코스케, 니시오카 츠요시, 오승환 등의 영입에 성공해 이들을 주축으로 2014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돌파에 성공했으나 일본시리즈에서는 1승 4패로 패퇴했다.

이듬해인 2015년 9월 22일, 나카무라는 도쿄돔에서 열리는 전통의 일전을 참관하기 위해 선수단과 같이 도쿄로 이동했는데 1차전이 끝나고 다음 날인 9월 23일에 호텔 방에서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다.[11] 향년 66세. 같은 해 11월 19일 한신 구단은 한신 코시엔 구장에서 추모회를 열었고, 야구계 관계자 및 일반인 1600여명이 모여 나카무라의 명복을 빌었다.

6. 기타



[1] 1995년 시즌 도중인 7월 23일 사임. 잔여 경기는 후지타 타이라가 감독 대행을 맡았으며 시즌 종료 후 곧바로 후지타가 후임 감독으로 취임했다. [2] 재임 도중 사망. [3] 이 중 선두타자 홈런이 6개로 이는 한신 구단 기록이다. [4] 당시만 해도 2루수 유격수의 덕목은 수비였고, 덕분에 우노 마사루처럼 거포+막장 수비라는 정반대 사례가 있긴 했어도 수비만 잘하면 타석에선 똑딱이 이하여도 납득이 가능했다. 21세기 이후로는 2루수에서도 야마다 테츠토 같은 거포들이 등장하면서 이제는 옛날 이야기가 됐다. [5] 이후 2020년 키쿠치 료스케 2루수 수비율 1.000로 절대 깨질 수 없는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6] 그래도 자신이 한신 2군 감독을 할 때 육성했던 야기 히로시 와다 유타카 등이 이 시기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7] 한신 타이거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워낙 파벌 다툼이 심한 구단 내부 사정 탓에 대다수 감독들이 2~3년 정도만 감독직을 맡고 물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8] 임기가 2번 이상인 감독까지 합치면 요시다 요시오의 8년(1975~77, 1985~87, 1997~98)이 최장 기록이다. [9] 그것도 2년차 신생팀 토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 4.5게임차밖에 나지 않는 성적이었다. [10] 정확히는 재능은 있으나 프로에서 활약하긴 애매하다 싶은 선수들을 입단 테스트를 거쳐 선별한 뒤 드래프트에서 하위 순번으로 지명하고, 계약금은 1군에서 등록일수를 채울 시 일종의 성과급 형식으로 지불하는 방침을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잡았었다. 일종의 육성선수와 비슷한 것이었는데, 당시 연습생 제도가 폐지된 탓에 소속 선수들을 무조건 지배하에 둬야 했기에 이런 꼼수를 쓴 것. 그러나 지명을 해놓고도 계약금을 주지 않는 것이 좋은 인상을 줄 리 없으니 당연히 비판이 따라왔고 이렇게 지명한 선수들이 활약한 경우도 사실상 없었다. [11] 사망 원인은 당초엔 급성 심부전으로 추측되었으나 후에 뇌출혈로 밝혀졌다. [12] 이쪽은 본래 1순위 지명자였던 츠지우치 타카노부가 혹사 여파로 프로에서 한 번도 1군 경기에 출장하지 못한 채 은퇴하면서 거포 타자로 성장한 오카다와 대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