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나석현(羅碩鉉) |
이명 | 나재식(羅在植), 이석충(李碩忠) |
본관 | 금성 나씨 |
생몰 | 1911년 11월 28일 ~ 1980년 8월 15일 |
출생지 | 전라남도 나주시 세지면 송제리[1] |
사망지 | 전라남도 광주광역시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나석현은 1911년 11월 28일 전라남도 나주시 세지면 송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주농업학교에 재학하다가 1928년 6월에 동교생 송성수, 김재룡(金在龍), 유상걸(柳上杰), 김윤성(金允性) 등과 함께 조선인 학생에게 민족 차별을 일삼는 일본인 교사를 배척하는 운동을 주동했다. 그러나 학교 측이 이를 막자, 그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학생들과 함께 동맹휴교를 단행했다.이때 나석현, 송성수, 김재룡, 유상걸, 김윤성 등은 식민지 교육제도를 반다해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동맹휴학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연락부, 동원부, 탐정부 등의 부서를 정했는데, 나석현은 이 중 탐정부원의 일을 맡았다. 또한 그는 동맹휴학생들의 행동을 탐지하는 한국인 교사에게 경고문을 발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동맹휴학을 지휘하던 학생들을 모조리 체포했고, 나석현은 1928년 9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항소했지만 1928년 11월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징역 6개월 및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소 후인 1930년 11월에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일제의 만주 침략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가 다시 체포되어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33년 1월에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나순조(羅順祚) 등과 함께 야학을 실시해 농촌 청년들에게 조선 역사를 가르치다가 그해 8월에 또다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34년 3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및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았다. 그후 불령선인으로 낙인찍힌 채 일제의 감시를 받으며 곤궁하게 살던 나석현은 8.15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고,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광주에서 살다가 1980년 8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나석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