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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08:30:08

김태렴

1. 개요2. 기록3. 정체?
3.1. 한국 측 연구3.2. 일본 측 연구
4. 기타

1. 개요

김태렴(金泰廉, 생몰년 미상)은 8세기 신라의 인물로, 남북국시대 일본으로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찾아갔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속일본기(続日本紀)에는 경덕왕 왕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그 실체에 대해선 후술되어있듯 여러 이견이 있다.

2. 기록

한국 측 기록에서는 이름을 찾아볼 수 없고, 일본 측 기록 속일본기에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애초에 한일 양측의 사료에 다 등장해 교차검증이 되는 삼국시대 인물은 연개소문, 김춘추 등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1]

기록에 따르면, 752년 3월 일본 규슈 다자이후(太宰府)에 신라 사절단이 도착했는데, 규모가 역사상 유례가 없는 700명에 달하는 대규모였으며 대표는 신라의 왕자 김태렴이었다고 한다. 3개월 후 신라 사절단은 당시 일본의 수도 나라로 가서 여성 천황 고켄 덴노를 알현했는데, 김태렴이 천황에게 코가 땅에 닿을 듯 큰 절을 하고서는 신라 국왕(시기상 경덕왕)이 전하는 말을 그대로 올린다고 말했다.
"일본의 천황에게 삼가 아룁니다. 신라국은 예로부터 대대로 일본을 받들어 왔습니다. 이번에 제가(경덕왕) 몸소 가서 조공하고 인사를 드리려고 하였으나, 생각해 보니 하루라도 국왕이 없으면 국정이 해이해지고 문란해질까 염려되어, 저를 대신하여 왕자 한아찬 태렴을 우두머리로 하여 370여명을 거느리고 가서 입조(入朝)하게 하고 겸하여 여러 가지 특산물을 바치고 삼가 아뢰게 합니다."

7세기 신라 삼국통일 당시 일본 백제와 한 편이었고,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깨진 뒤론 본국에 짱박혀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신라와는 밀당 외교를 하며 약간 불편한 관계를 지속해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734년의 왕성국 사건을 기준으로 양측의 갈등이 표면화된 상태였다. 성덕왕 시기인 731년 일본은 배 300척을 보내 신라를 침공했으나 되레 격파당한다. 그리고 3년 후 성덕왕은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데, 사신이 가져온 국서에는 그동안 써오던 '신라'라는 나라 이름 대신 왕성국(王城國)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이게 문제가 된 이유는 서경, 주례 등 옛 유교 경전에서 말한 세계관에서는 왕성(수도 궁성) - 왕기(수도 근처) - 6복(지방 = 9주 5소경) - 번국(외부 이민족 제후국)의 순서로 주종관계의 체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 신라가 왕성국이라면 일본은 번국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컸다. 즉, 신라가 일본보다 지위가 높음을 뜻하니 천황 중심 세계관에 따라 오히려 신라를 한 수 아래로 여기던 일본은 '왕성국'이라는 호칭을 영 불쾌하게 여길 수 밖에 없었고 사신을 문전박대했다.

이후 신라가 보낸 사신은 수도 나라까지 들어가지도 못하고 다자이후에서 되돌려졌으며 742년에는 일본 측에서 신라에 사신을 보냈지만 입국조차 불허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신라 측에서 먼저 왕자를 보낸데다 스스로 고개를 숙여 대놓고 조공을 하겠다고 하니 일본 측에서는 대환영할만한 일이었다.

그렇게 일본 조정에 입조한 김태렴은 고켄 덴노 당나라 황제와 동급처럼 떠받들면서 아부했고, 이에 기분이 좋아진 천황은 3일 후 조당(朝堂)에서 큰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김태렴을 만난 다음날인 6월 15일부터 7월 8일까지 김태렴이 가져온 물건들을 구입하기를 원하는 5위 관등 이상 귀족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의 품목, 수량, 가격 등을 기록하여 문서로 제출하게 했는데 이 문서가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다. 도다이지 정창원에서 이면지로 쓰이고 있던 것을 19세기에 우연히 발견했다. 또 김태렴은 스스로 일본의 신하를 자처했기 때문에, 그의 일행이 일본에 머무는 동안의 비용은 그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일본 정부에서 짊어졌다.

이 외에도 김태렴은 6월 22일 도다이지(東大寺)를 방문해 예불을 올리는 등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다,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 가져간 물건들을 다 팔아치우고, 7월 24일 귀국했다. 고켄 덴노는 김태렴에게 사신을 보내 명주와 베, 술과 안주를 보내주었다.

김태렴은 왕이 직접 서명한 정식 외교문서를 가져오지 않고 단지 말로만 천황을 칭송했는데, 이에 고켄 덴노도 마지막 만찬에서 당부를 하였다.
오늘 이후로 신라 국왕이 직접 일본 조정을 방문하도록 하라.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사람을 보내어 반드시 외교문서를 가지고 오도록 하라.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신라 왕에게서 사절단은 오지 않았고 조급해진 천황은 이듬해인 753년 2월 신라에 사절을 파견했다. 아무래도 확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753년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왔는데 오만무례하므로 왕이 만나주지 않았다.

경덕왕은 일본 사신을 거들떠보지조차 않았다. 일본 조정은 폭발했고, 이후 실현되진 않았지만 신라 침공 계획을 구상하기도 한다.

3. 정체?

3.1. 한국 측 연구

일단 교차검증을 해보면 속일본기에 적힌 김태렴 경덕왕 왕자설은 신뢰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752년 당시 경덕왕에겐 왕자가 없었기 때문. 그냥 왕자에 대한 기록이 없는 걸 넘어서, 삼국유사를 보면 만월부인 표훈대덕 이야기 등 왕자를 얻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고 758년에야 겨우 훗날 혜공왕이 되는 왕자 김건운을 얻게 되었다는 당대의 정세를 반영하고 있던 야사 기록까지 있다. 차라리 왕자에 대한 기록이 아예 없으면 '왕자가 있었을 수도 있는데 기록이 부실하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는데 경덕왕은 '왕자가 없었다'는 기록까지 있으므로  빼박인 것. 그러니 752~753년 당시에 경덕왕에게 아들이 있었을 리가 없다.

또 당시 경덕왕의 나이는 752년 기준 아무리 많이 잡아봤자 30대 초반이었다. 왜냐하면 경덕왕의 어머니는 소덕왕후 김씨인데 그녀가 성덕왕에게 시집을 온 때는 720년이었다. 그러므로 효성왕 경덕왕은 모두 720년 이후에 태어났다고 봐야 한다. 소덕왕후는 724년에 사망했으므로 김태렴이 일본을 방문했던 752년에는 경덕왕의 나이는 29~32세였다. 겨우 30대 초반에 불과했던 경덕왕에게 외국에 입조시킬 만큼 장성한 나이의 아들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거기에 김태렴이 떠나고 바로 다음해에 일본쪽에서 사신을 파견했는데 경덕왕이 만나지도 않고 바로 추방시켜버렸다. 이건 신라와 일본 양쪽 모두 기록이 있어서 사실로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방일하였기에 그를 신라의 공식 외교사절이 아니라, 신라의 관인이나 상인이 내세운 ' 거짓 왕자(假王子)'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2] 다만 『속일본기』 천평승보 4년(752) 9월에 "왕자태렴(王子泰廉)" 등의 표현이 이후의 기록에서도 확인되고 있고, 또 이 무렵은 왕실이나 귀족이 아니면 대규모의 상업 및 교역망을 가동할 수 있는 세력을 운영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점에서 김태렴이 최소 일반 귀족 출신 이상은 되었을 것이라고 보는 한준수같은 학자도 존재한다.

이 경우 752년의 대일교역은 의미가 작지 않으므로 관련 연구도 활발한 편이다. 주된 관점은 교역의 성격에 맞춰져 있다. 당시 발해와 대립관계에 있던 신라가 발해와 일본의 긴밀한 관계를 견제하여 자국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우호관계의 형성을 목적으로 파견하였다는 견해가 제시되었으나, 나라[奈良] 동대사의 대불(大佛) 개안식(開眼式)의 참석과 경제교역을 시행하기 위해서 파견했다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한다. 하나의 군사 혹은 경제적 목적만을 띠고 있었다고 파악하기에는 당시의 현실이 단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양한 목적을 지닌 복합적 성격의 사절단이었다고 하겠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태렴(金泰廉))

또한 『 일본서기』만 봐도 신라가 일본쪽에 김상림, 김양림 같은 왕자나 김춘추 같은 파진찬, 대아찬같은 진골 귀족들을 보내 선물 공세를 펼친건 김태렴 이전부터 이어진 오랜 관행이었다. 왕자, 대아찬, 파진찬 온갖 높은 신분인 사람들이 이미 일본쪽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김태렴만 사기꾼이란건 논리가 빈약하다는 주장도 있다.
3년(802) 겨울 12월에 균정(均貞)에게 대아찬(大阿湌) 관등을 주어 가왕자(假王子)로 삼고 왜국(倭國)에 질(質)로 보내고자 하였으나, 균정이 거절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애장왕(哀莊王) 3년 12월
신라본기를 보면 애장왕때도 왕족인 김균정에게 대아찬 관등을 주고 가짜 왕자로 삼아 왜국에 질(외교사절)[3]로 보내고자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김춘추가 대아찬의 관등으로 일본에 질로 보내졌다는 일본측 기록과 대응된다. 즉, 실제로 신라측에선 왕족들에게 대아찬이나 파진찬같은 높은 관등을 주거나 가짜 왕자로 삼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는 관행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태렴이 경덕왕의 진짜 왕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왕자라고 신분을 속이고 신라측 공식 사절로 일본을 염탐하러 갔을 확률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렇다면 이후 신라의 대일본 강경 행보가 설명이 안되는데, 이에 여성 천황이라 더 대외적 권위가 필요했던 고켄 덴노 측이 한동안 국교가 단절되어 있던 신라 측이 사절을 보냈다면 이들이 자신을 공경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자기에게 이롭고 권위가 올라가므로 이 사절을 받아들이고는 '신라가 상국으로써 우리를 섬기려고 사신을 보냈다!'고 일종의 언플을 시전한 뒤 기록을 윤색, 미화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에 신라도 국교단절 이후 일본과 다시 외교를 복원하려다 두 조정 사이의 이견이 있었고, 국제정세가 안정되니까 일본을 손절하고 다시 외교 관계를 무례하다는 이유로 단절한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위 주장도 오히려 일본쪽 기록에서 일본측이 정식 국서도 없는 자칭 사절단을 국빈으로 후하게 대접하거나 엄청난 선물안겨 보내는 등 일본측의 허술한 부분까지 세세하게 서술하고 있으며 일본이 왜곡했다고 하기에는 김태렴 사건 직후에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가 추방당하는 기록이 상호간에 교차검증되고 그외에도 수시로 신라 외교관계중에 김태렴을 운운하면서 신라를 하대하려다가 외교갈등을 빚는 등 왜곡했다고 하기에는 일본쪽에서 김태렴에게 심각하게 집착하는 행태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어서 단순히 왜곡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많다

사실 김태렴은 생몰연대가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활동내용을 파악하는데 한계가 있으며, 사료 그것도 일본 측 기록인 속일본기를 토대로 정체를 추정해볼 수 밖에 없는 인물이다. 당대 기록에는 '신라왕자 한아찬 김태렴'이라 하였는데, 한아찬은 대아찬(5관등)의 별칭이라는 점에서 적어도 거짓말을 한게 아니라면 진골귀족 이상의 신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왕자라 칭했던 사실에서 경덕왕의 직계 후손은 아닐지라도 신라왕실의 혼인 관계를 고려하면 왕족이었을 가능성은 있다고 보기도 하는데, 왕자는 아니니 김태렴이 경덕왕의 아들이 아닌 사촌으로, 왕족이었던 그를 왕자라고 당시 일본 조정이 착각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삼국사기》 성덕왕 32년 冬12월조에는 성덕왕의 조카로 김지렴(金志廉)이란 이름이 나오는데, 돌림자를 고려하면 김태렴은 김지렴과 형제간일 가능성도 있는데, 만약 이 가정이 맞는다면 김지렴은 성덕왕의 조카이며 경덕왕은 성덕왕의 아들이므로 김태겸은 경덕왕과 사촌이 된다는 것. 다만 거의 때려맞추기식 해석이라 역시 가설의 영역을 벗어나긴 어렵다. 그래도 이게 사실이라고 전제할 경우, 사기극이 아닌, 신라에선 그냥 김태렴을 일본에 외교 사절로 보내 국교 회복 의사를 타진했는데, 일본 조정에서 이를 자의적으로 왜곡해 신라에서 왕자가 와 조공을 바쳤다라는 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 의하면 경덕왕대에는 오랫동안 왕자가 탄생하지 않았는데, 경덕왕 4년(745)에 동궁을 수리하였다는 기사가 보이고, 또 752년 8월에도 동궁아관을 두었다는 기사가 있다. 즉, 왕자 탄생 이전에 동궁으로서 책립된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효성왕 3년에도 아들이 없던 효성왕이 아우를 봉하여 태자를 삼은 것이 《삼국사기》에 보인다. 따라서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신라 왕자로 등장하는 김태렴이 경덕왕대 초기에 동궁으로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물론 가설의 영역이다. 출처: 8세기의 新羅와 日本과의 관계景德王代(742∼765年)

752년 700여 명의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한 김태렴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김태렴을 비롯한 고위 귀족과 불교계 지도자들은 헤이세이쿄의 사찰을 순례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동대사(東大寺)의 노자나 대불의 개안식에 참배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동시에 신라의 귀족 및 불교계 지도자들은 신라 유학을 마치고 대안사에 있던 심상(心詳)을 만나기 위해 대안사를 방문한 것이다. 당시 대안사에는 화엄종 학단이 있었고, 그 총본산으로 화엄원이 건립되어 있었다. 따라서 신라의 귀족과 불교계 지도자들은 동대사에 이어 신라의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안사를 방문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편, 370여 명이 입경한 신라 사신단 중에는 신라 상인, 혹은 사신의 중하급자 중에는 상업적 행위를 하려는 인물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귀족층을 보좌하면서 일본 지배층과 교역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가 정소원과 존경각문고 등에 있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교역문서이다. 결국 김태렴은 동대사 대불 참배와 대안사 방문, 그리고 교역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김태렴 일행이 700여 명의 대규모 사절단이 된 것도 여러 사찰 참배단 가운데 다수의 상인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 752년 신라사 김태렴의 방일 목적에 관한 연구, 이병로 /ByungRo Lee, 김용일, 계명대학교

8세기 중반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정치적 긴장이 표면화된 상태에 있었다. 735년 2월, 신라 조정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자국이 “왕성국(王城國)”임을 표방하자 일본 조정은 사신을 돌려보냈다. “왕성국”은 신라가 당의 제후국임을 표방한 상징적 표현으로서, 천황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 세계관을 가지는 일본에 대해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자국이 우위에 있음을 확고히 하는 데 작용하였다. 이후 양국 사이에 외교 방식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하는 등 정치적 긴장이 표면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752년에 약 9년 만에 양국 간의 외교가 진행되었다. 이때 신라는 왕자 김태렴을 필두로 한 700여 인이라는 사상 최대의 규모를 갖춘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김태렴 사절단은 신라 사신으로서 약 17년 만에 일본의 京에 들어가 교역 활동을 비롯한 외교를 진행하였다.

김태렴 사절단에 관한 기록을 보면 대체로 그들이 일본에서 조공국(朝貢國)으로서의 예(禮)를 갖추어 외교를 진행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기존 연구에서는 김태렴 사절단이 파견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와 같은 외교 방식을 취하였다고 이해해 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해는 일본 율령법의 이념에 의해 윤색된 기록을 근거로 도출된 것이다. 일본 측 사료에는 김태렴 사절단이 상위 국가로서의 예를 갖추어 일본과의 외교를 진행하였다는 기록이 확인되나, 기존 연구에서는 이를 간과해 왔다.

일본 조정은 김태렴 사절단에 대해 외교 방식에 관한 요구 사항을 제시하였다. 이는 752년 4월에 거행된 도다이지 대불개한회(東大寺 大佛開眼會)를 통해 형성된 새로운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서, 신라에 대해 조공국으로서의 예를 갖추도록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종래의 대일 외교 방침을 유지하였다.

김태렴 사절단의 도일은 일본 조정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관련 사료에 따르면 신라 조정은 김태렴 사절단을 파견하여 요청된 물품을 전달하는 동시에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교역 활동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신라 조정의 정치적 의도에 따른 것으로서, “왕성국” 표방 이래 일본과의 사이에 표면화된 정치적 긴장 속에서 다시금 자국의 문화적․권위적 우위성을 과시하며, 나아가 대내적으로도 왕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정책이었다. 출처: 8세기 중반 羅日關係의 推移와 金泰廉 使節團의 渡日

3.2. 일본 측 연구

일본에서는 신라측이 김태렴 등을 파견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이를 정치적인 목적이 강한 견사로 보는 일본의 역사학자 사카요리 마사시(酒寄雅志)는 북변경영에서 발해와의 충돌 및 일본과 발해의 협격을 우려한 신라가 일본의 ‘중화사상’에 영합하여 ‘조공’을 한 것으로 보았다. 한편 이를 친선을 도모하기 위하여 일본의 초청에 응해 동대사(東大寺)의 대불개안을 축하하는 사절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때의 사신단은 700여 인이라는 대대적인 것으로, 이들은 아라비아 방면에서 동남아시아에 걸쳐 산출되는 향료와 약품, 당의 공예품, 신라의 특산품 등을 다량으로 가지고 갔다. 이들이 가져간 물건은 당시의 동아시아의 무역품을 거의 망라한 것으로, 당으로부터 신라에 전해진 것이 다시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따라서 도노 하루유키(東野治之)는 이때의 신라사신에게 ‘조(調)’를 위장한 무역의 목적이 강하였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김태렴 이후의 신라의 사신파견은 무역을 추진하기 위한 공사파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였다. 즉 사신이라면 일단 체재는 보증받아 입경하지 못하더라도 무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4]

4. 기타



[1] 한 예로 '일본에 우리 문화를 전수했다'며 한국 교과서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왕인이나 담징 등은 오직 일본 역사서에만 등장하며, 근대 이전엔 한국에서 알려지지도 않았던 인물들이었다. [2] 실제 어떤 나라에 가짜 나라 사신이 조공하러 가서 비위 맞춰주다 반대로 삥 실컷 뜯고 온 사례는 역사적으로도 실존한다. 대표적으로 제나라에게 조공을 바쳤던 사신인 혜심(慧深)은 부상국에서 왔다고 속이고 조공을 바쳐, 제나라로부터 막대한 하사품을 받아 부를 쌓은 바 있다. 여담으로 혜심은 부상국이 일본으로부터 동쪽으로 3만 2천리 떨어져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1만km가 넘는 거리로, 현대 미국 동부 위치쯤 되는 거리다. 사족으로 혜심이 한 사기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부상국의 이웃나라 중에 여인국이 있다고 한 것이다. 여인국은 말그대로 여자만 사는 나라이며, 남자가 없기 때문에 2월, 3월쯤에 강에 들어가면 저절로 임신할 수 있었다고 한다. [3] 일본어에서 인질에 해당하는 '질'의 훈독은 '무카하리'(人力)라고 읽는데, 그 뜻은 '왕의 대리인'이라는 뜻이므로 고대 일본에서 받아들여지는 인질의 개념은 인신공납의 개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4] 출처: 국사편찬위원회(김태렴(金泰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