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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0> 이름 | 김의기 (金義基) |
국적 | 대한민국 |
출생 | 1959년 4월 20일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용암리 | |
사망 | 1980년 5월 30일 (향년 21세) |
서울특별시 | |
종교 | 개신교 |
직업 | 대학생, 학생운동가 |
가족 |
아버지 김억, 어머니 권채봉 형 3명, 누나 2명 |
학력 |
배명고등학교 서강대학교 무역학과[1] (경영학 / 명예학사) [2] |
사인 | 추락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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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생
2.1. 농민운동에 참여하다
김의기는 1959년 경상북도 영주의 농민가정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가족들의 기대 속에 서울 유학을 다녔는데 1976년 서강대학교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3] 그가 대학을 다니던 때는 유신정권 아래에서 민주화 요구가 강해지던 시기였다. 또 그 자신이 농민의 아들인지라 자연스레 농민운동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김의기는 하계 농촌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농업문제연구모임에도 적극적이었다. 또 감리교청년회(감청) 전국연합회 농촌선교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으며 모교에서는 학생들과 근대사도 연구했다. 무산되기는 했지만 학내시위를 계획하기도 했었다.그렇게 농민운동에 적극적인만큼 그는 늘 농민을 생각했다. 누나의 증언에 따르면 김의기는 대학 입학 기념으로 사준 양복도 입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묻자 "사람이 편하면 점점 더 편하고 싶어져서 도둑 같은 마음이 생긴다"고 답했다고 한다.[4]
2.2. 광주의 참상을 목격하다
김의기는 1980년 3월부터 전남지방의 농촌과 서울을 오가며 농촌활동 자료집을 발간하기 위해 힘썼다. 그러던 중 ' 함평 고구마 농민 투쟁 승리 기념식'에 참여하기 위해 다른 농민, 농민운동가들과 함께 광주를 방문했다. 그런데 그 날은 5월 19일, 계엄군의 만행이 백주대낮에 펼쳐지고 있었다. 김의기는 이 광경을 보고 충격에 빠진다.이 날 기념식에 참여한 사람 중에는 농민회 활동을 하며 그와 안면이 있었던 동화작가 윤기현이 있었다. 윤기현은 김의기에게 "지금은 계엄군에게 맞서 싸우는 것보다 광주가 고립되지 않도록 상황을 외부에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고, 이 말을 들은 김의기는 서울로 올라와 광주의 현실을 알리고자 했다.
2.3. 진실을 위해 몸을 던지다
1980년 5월 30일 서울 종로5가 소재 기독교회관에서는 금요기도회가 열릴 예정었다. 이 곳에서 김의기는 광주의 진상을 밝히기로 했다. 하지만 기독교회관은 자주 시위가 있던 곳인데다 그날은 시위를 예상하여 일방통행마저 금지시킬 만큼 경계가 삼엄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금요기도회는 취소됐지만 시위를 결행키로 한 김의기는 12시경 회관에 들어가 희생을 최소로 줄이고자 모든 일을 혼자서 추진했고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손수 타이프쳐서 인쇄했다. 그 와중 계엄군이 진입해 체포하려고 했지만 김의기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엄군을 피해 유인물 인쇄를 계속했다. 하지만 계엄군을 막을 수는 없었고 결국 계엄군에 의해 인쇄는 중단된다. ‘동포에게 드리는 글’의 내용과 유서가 없다는 점을 비춰 볼 때, 투신의 의도는 없었다고 판단되지만 계엄군과의 몸싸움이 있었고 결국 김의기는 6층 높이의 폭 1m 베란다[5] 밖으로 떨어져 운명하였다. 계엄군들은 떨어진 그를 구하기는 커녕 밑으로 떨어진 유인물을 줍느라 바빴다. 사태가 진정된 후 늦게나마 계엄군에 의해 시신이 인근에 있는 혜화동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다. 결국 김의기는 22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김의기 열사의 명예졸업식 때 졸업장을 품고 오열하는 모친. |
3. 대학생으로서, 농민의 아들로서
<일기>
1978년 11월 29일 수요일
白汎 선생, 친일망국사대부역배 이승만. 민족, 민중, 겨레,
이 나라 좀 더 살만한 나라 만들어 보자. 알맹이는 쏙 빼서 남다 주고 껍데기만 붙잡고 늘어져 후여후여 하지 말자. 저 사악하고 불의한 무리들 제 배 채울려고 나라 팔아먹는 수작 똑똑히 보자. 손바닥만한 땅덩어리 그나마 절반으로 나위어져서 서로 앙앙대는거 집어 치우자. 그런 수작 벌이는 자들 장단에도 놀아나지 말자. 그런 자들 편안히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것들 끌어내어 민족 앞에 무릎꿇리우고 단호히 정죄하자.
남의 입, 귀, 눈가리는 놈, 한자리하면 마르고 닳도록 그자리 해쳐먹을려고 별별 개 같은 짓들 다 하는놈. 자기배 부른줄만 알고 남 배고픈 줄 모르는 놈, 우리 백성 고혈 짜내서 남의 나라 시중 드는 놈, 남의 나라 돈에 환장해서 우리 처녀 팔아 처먹는 놈, 제 가진 것 아까와서 알면서도 바른소리 못지껄이는 놈, 음흉하고 흉측한 간계 뱃속에 감추고 말만 번드레레하게 하는 놈, 닭잡아 먹고 오리발 내미는 놈, 등치고 간빼 처먹는 놈, 한자리 해처먹을려고 오만 방정 다 떨고 오만 아첨 다하는 놈, 이런 아류에 속하는 망족부역노들에게 민족 무서운 줄, 역사 무서운 줄 알게하여 주자.
억눌리고 빼앗기고 배고프고 협박당하고 그러면서도 할말 한마디 못하고 죽은 듯이 지내는 민중 무섭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자.
문제의 해결책은 하나 밖에 없다.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
단 두 개의 길에 대한 대안밖에 우리에겐 주어져 있지 아니하다. 일시 사는 듯이 보일지 모르지만 무릎을 꿇고 사는가 아니면 일시 죽는듯이 보일지 모르지만 바로 영원히 사는 길인 끝끝내 서서 죽길 고집하는가의.
12월 16일
촌놈-나까지 포함해서-들에게 너무 했다. 정말 너무들 했다.
참기 너무 어렵다. 쌀 한가마 팔때마다 만 오천원씩 손해보라는 건
정말 너무하다. 정말 너무하다. 해도 너무한다.
그러면서 막대한 양의 외국산 도입까지 한다는 건
해도 너무하는 짓이다. 곡식뿐 아니고 고기와 양념마저도.
우리 농민들 어디로 가란말이냐 어떻게 살란 말이냐.
양적 축적은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 불문과 불안의 누적은 결국 혁명을 불러 일으킨다. 이 사람들아.
우리농사꾼들 농민들 너무 그렇게 심하게 제멋대로 다루지 마라.
이놈들아. 이 망할놈들아.
농민들이 죽창을 다듬고 있다.
1979년 4월 5일
일기를 참 오랫만에 써 보는듯 하다. 그동안 뭘 하며 살았길래.
열심히 살아야지, 사람보기를 하늘 보듯이.
사람 우러르길 하늘 우러르듯이
기댈 언덕을 찾기 전에 눈둘 하늘을 찾아야하고 디딜 땅을 찾아야 한다.
내 할일이 아직 쌓이고 쌓여있는 지금 여기서 개비는 일은 내겐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굽히지 않고 이 세상 끝장 볼 때까지 살아봐야겠다. 아무곳에도 눈돌리지 않고 힘 흐트리지 않고 내가 산 만큼 내 일을 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세상 살이는 그렇게 한심한 것만은 결코 아니다.
내가 한심하게 살지 아니하는 한 절대로 한심할 리가 없다.
이 좋은 봄날 내가 축 쳐져 있기에는 너무 안 어울린다. 두 평도 못되는 감옥속에서 나는 바라고 사는 동지들과 친구들이 있는 한 난 한심해질 수도 호사스러울 수도 없다.
감옥은 부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무덤은 깨치고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감옥은 감옥이기 때문에 부숴져야 하고 무덤은 무덤이기 때문에 깨쳐져야 한다.
1978년 11월 29일 수요일
白汎 선생, 친일망국사대부역배 이승만. 민족, 민중, 겨레,
이 나라 좀 더 살만한 나라 만들어 보자. 알맹이는 쏙 빼서 남다 주고 껍데기만 붙잡고 늘어져 후여후여 하지 말자. 저 사악하고 불의한 무리들 제 배 채울려고 나라 팔아먹는 수작 똑똑히 보자. 손바닥만한 땅덩어리 그나마 절반으로 나위어져서 서로 앙앙대는거 집어 치우자. 그런 수작 벌이는 자들 장단에도 놀아나지 말자. 그런 자들 편안히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것들 끌어내어 민족 앞에 무릎꿇리우고 단호히 정죄하자.
남의 입, 귀, 눈가리는 놈, 한자리하면 마르고 닳도록 그자리 해쳐먹을려고 별별 개 같은 짓들 다 하는놈. 자기배 부른줄만 알고 남 배고픈 줄 모르는 놈, 우리 백성 고혈 짜내서 남의 나라 시중 드는 놈, 남의 나라 돈에 환장해서 우리 처녀 팔아 처먹는 놈, 제 가진 것 아까와서 알면서도 바른소리 못지껄이는 놈, 음흉하고 흉측한 간계 뱃속에 감추고 말만 번드레레하게 하는 놈, 닭잡아 먹고 오리발 내미는 놈, 등치고 간빼 처먹는 놈, 한자리 해처먹을려고 오만 방정 다 떨고 오만 아첨 다하는 놈, 이런 아류에 속하는 망족부역노들에게 민족 무서운 줄, 역사 무서운 줄 알게하여 주자.
억눌리고 빼앗기고 배고프고 협박당하고 그러면서도 할말 한마디 못하고 죽은 듯이 지내는 민중 무섭다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자.
문제의 해결책은 하나 밖에 없다.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
단 두 개의 길에 대한 대안밖에 우리에겐 주어져 있지 아니하다. 일시 사는 듯이 보일지 모르지만 무릎을 꿇고 사는가 아니면 일시 죽는듯이 보일지 모르지만 바로 영원히 사는 길인 끝끝내 서서 죽길 고집하는가의.
12월 16일
촌놈-나까지 포함해서-들에게 너무 했다. 정말 너무들 했다.
참기 너무 어렵다. 쌀 한가마 팔때마다 만 오천원씩 손해보라는 건
정말 너무하다. 정말 너무하다. 해도 너무한다.
그러면서 막대한 양의 외국산 도입까지 한다는 건
해도 너무하는 짓이다. 곡식뿐 아니고 고기와 양념마저도.
우리 농민들 어디로 가란말이냐 어떻게 살란 말이냐.
양적 축적은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 불문과 불안의 누적은 결국 혁명을 불러 일으킨다. 이 사람들아.
우리농사꾼들 농민들 너무 그렇게 심하게 제멋대로 다루지 마라.
이놈들아. 이 망할놈들아.
농민들이 죽창을 다듬고 있다.
1979년 4월 5일
일기를 참 오랫만에 써 보는듯 하다. 그동안 뭘 하며 살았길래.
열심히 살아야지, 사람보기를 하늘 보듯이.
사람 우러르길 하늘 우러르듯이
기댈 언덕을 찾기 전에 눈둘 하늘을 찾아야하고 디딜 땅을 찾아야 한다.
내 할일이 아직 쌓이고 쌓여있는 지금 여기서 개비는 일은 내겐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굽히지 않고 이 세상 끝장 볼 때까지 살아봐야겠다. 아무곳에도 눈돌리지 않고 힘 흐트리지 않고 내가 산 만큼 내 일을 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세상 살이는 그렇게 한심한 것만은 결코 아니다.
내가 한심하게 살지 아니하는 한 절대로 한심할 리가 없다.
이 좋은 봄날 내가 축 쳐져 있기에는 너무 안 어울린다. 두 평도 못되는 감옥속에서 나는 바라고 사는 동지들과 친구들이 있는 한 난 한심해질 수도 호사스러울 수도 없다.
감옥은 부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무덤은 깨치고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감옥은 감옥이기 때문에 부숴져야 하고 무덤은 무덤이기 때문에 깨쳐져야 한다.
4. 동포에게 드리는 글
동포에게 드리는 글 |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화발 소리가 우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고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 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 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공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년 동안 살벌한 총검 아래 갖은 압제와 만행을 자행하던 박 유신정권은 그 수괴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으나, 그 잔당들에 의해 더욱 가혹한 탄압과 압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20년 동안 허위적 통계숫자와 사이비 경제이론으로 민중의 생활을 도탄에 몰아 넣은 결과를, 우리는 지금 일부 돈 가진 자와 권력 가진 자를 제외한 온 민중이 받는 생존권의 위협이라는 것으로 똑똑히 보고 있다. 유신잔당들은 이제 그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시민으로서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 것인가? 또다시 치욕의 역사를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떳떳한 조상이 될 것인가?
동포여, 일어나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일어나자. 우리의 힘을 모아 싸워 역사를 정방향에 서게 하자. 우리는 이긴다.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 동포여, 일어나 유신잔당의 마지막 숨통에 결정적 철퇴를 가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동포여!
매일 정오 서울역 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바쳐 싸우자! 동포여!
1980년 5월 30일 오후 5시 30분
김의기
- 1980년 5월 30일, <동포에게 드리는 글> 전문[6]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 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 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참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공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20년 동안 살벌한 총검 아래 갖은 압제와 만행을 자행하던 박 유신정권은 그 수괴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으나, 그 잔당들에 의해 더욱 가혹한 탄압과 압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20년 동안 허위적 통계숫자와 사이비 경제이론으로 민중의 생활을 도탄에 몰아 넣은 결과를, 우리는 지금 일부 돈 가진 자와 권력 가진 자를 제외한 온 민중이 받는 생존권의 위협이라는 것으로 똑똑히 보고 있다. 유신잔당들은 이제 그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개처럼 노예처럼 살 것인가? 아니면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시민으로서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살 것인가? 또다시 치욕의 역사를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고 떳떳한 조상이 될 것인가?
동포여, 일어나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일어나자. 우리의 힘을 모아 싸워 역사를 정방향에 서게 하자. 우리는 이긴다. 반드시 이기고야 만다. 동포여, 일어나 유신잔당의 마지막 숨통에 결정적 철퇴를 가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일어나자, 동포여!
매일 정오 서울역 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바쳐 싸우자! 동포여!
1980년 5월 30일 오후 5시 30분
김의기
- 1980년 5월 30일, <동포에게 드리는 글> 전문[6]
5. 여담
- 송곳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가 김의기와 인연이 있다고 한다. 특히 김의기의 죽음은 그에게 특별히 아픈 일이었는데 그가 수배 중에 있어서 친구(김의기)의 부고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소식을 들었을 때 장례식을 치렀던 선배가 "너희 나쁜 놈이야. 의기 장례식을 치르는데 똑똑한 놈들은 다 도망가버리고 멍청한 놈들만 남아서 장례를 치렀다. 얼마나 다 도망갔는지 의기 관을 운구할 사람이 없는 거야. 너희 나쁜 놈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 그의 모교인 서강대학교에서는 1981년부터 매해 기일인 5월 30일에 김의기의 정신을 기리는 의기제를 주최하고 있다.
- 2019년, 열사의 모교인 서강대에서 김의기 열사 추모제를 맞아 김대건관과 게페르트-남덕우 경제관 사이에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 분필로 길 위에 쓰여졌다.
- 김의기열사기념사업회는 2020년 5.18민중항쟁과 김의기 40주기를 맞이해 김의기 평전 <의기>(서해문집, 작가 정화진)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