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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양궁 60주년 공로패 수상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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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c7668><colcolor=#ffffff> 김수녕 金秀寧 | Kim Soony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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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71년 4월 5일 ([age(1971-04-05)]세) | |
서울특별시[1]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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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청주덕성초등학교 (졸업) 청주중앙여자중학교 (졸업) 청주여자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 학사) 경희대학교 체육대학원 (스포츠산업경영학 / 석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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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164cm | |
종목 | 양궁 | |
소속 | <colbgcolor=#8c7668><colcolor=#ffffff> 선수 | 예천군청 (1999~2002) |
해설 | MBC (2004~2014) | |
약력 | 세계양궁연맹 규정위원 (2015~2019) |
[clearfix]
1. 개요
시위를 떠난 화살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前 양궁 선수. 올림픽에서 금메달 4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획득하며 역사를 썼다.
2. 선수 경력
2.1. 어린 시절
1971년 4월 5일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여기 저기를 이사 다니다가 최종적으로 정착한 곳이 청주시였다. 여기서 양궁에 입문했고, 소년체전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양궁 신동의 등장이라는 찬사를 받으면서 청주여고 1학년 때, 최연소 국가대표가 되었다.2.2. 1988년
불과 만 17세의 여고 2학년생으로 처음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우승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1988 서울 올림픽에서 개인전 금메달, 단체전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2관왕에 올랐다.[3] 서울 올림픽 당시 양궁 개인전은 30m, 50m, 70m, 90m 거리별 성적을 합산해서 메달 색깔을 가리는 방식이었는데, 총점 344점을 기록하면서 팀 동료이자 선배인 왕희경, 윤영숙을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단체전에서는 선배들과 힘을 합쳐 양궁 단체전 금메달을 차지했다.2.3. 1989년~1991년
김수녕의 진정한 전성기였다. 1989년과 1991년 세계선수권 2년 연속 2관왕,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단체전 금메달, 1989년 거리별 공인 6종목 모두 세계신기록을 20대 초반에 모두 달성했다. 참고로 세계선수권 2년 연속 2관왕은 김수녕 이후 단 한 사람도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 이 시절에 세운 세계 기록이 상당히 많아서 본인도 전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김수녕 선수가 현역 생활동안 세운 세계신기록은 30개가 넘는다.2.4. 1992년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도 당연히 국가대표가 되었는데, 여기서 무적의 그녀는 뼈아픈 패배를 맛봤다. 팀 동료인 조윤정과의 결승전에서 패하면서 개인전 은메달을 차지한 것이다. 다만 당시 경기장면을 보면 결승 후반까지 점수가 비슷하다가 마지막 두 발이 점수가 좋지 않게 나왔다. 자신의 점수를 보고 아쉬워하기 보다는 웃어넘기는 표정을 지었다.물론 단체전에서는 또 금메달을 차지하면서 본인의 세 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했다. 이 대회부터 흔히 양궁 대회 방식으로 알고 있는 토너먼트가 도입이 되었는데, 이 토너먼트의 긴장감이 생각 이상이었다고 한다. 마침 지기 싫어하는 성격에 패배가 너무 아쉽기도 했고, 또 이룰 것은 다 이뤄서 목표도 사라졌기 때문에 그냥 이 대회를 끝으로 은퇴했다.
2.5. 1999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대학 선배였던 이기영[4]과 결혼하면서 두 아이의 엄마로 평범하게 살아가는가 싶었는데, 1999년에 전격적으로 컴백을 선언했다. 당시 어린 선수 위주의 대표팀이라서 경험이 많은 선배가 필요하다는 협회의 판단 아래 협회에서 복귀를 권했다고 한다. 물론 그와 별개로 국가대표 선발전은 자력으로 뚫어야 했다. 그런데 6년의 공백이 무색하게, 기어코 선발전에서 1위를 기록하며 김수녕은 다시 국가대표가 되는 관록을 보여주었다.[5] 게다가, 인생의 경험도 늘어서 과거처럼 지는 것을 싫어하는 김수녕이 아닌 좀 더 여유롭게 활을 쏘는 김수녕으로 변했고, 그 결실은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맺어졌다.2.6. 2000년
올림픽 4강전에서 윤미진에게 패하면서 3,4위전으로 밀렸다. 3, 4위전에서는 북한의 최옥실을 누르고 동메달을 차지했는데, 원숙해진 그녀는 집 장식장에 동메달도 걸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다고 한다. 그리고, 후배들과 함께 단체전 우승을 차지하면서 한국 여자 양궁의 신화를 이어갔다. 이로써 차지한 메달의 수는 금메달 4개 포함 모두 6개가 되었다.3.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는 올림픽 때마다 MBC의 양궁 종목 해설위원으로도 만나볼 수 있었는데, 해설에서는 양궁 시합시 보여준 대담성과는 거리가 먼 감정이 격화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한국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기 직전이 되면 울먹거리면서 거의 해설을 진행하지 못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김수녕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저런 멘탈(?)로 어떻게 올림픽에 3회 출전했는지 의아해하기도 했을 정도. 오죽하면 당시 일부 스포츠 마니아들은 '김수녕이 울었다' 라는 말을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가 금메달을 땄다' 랑 같은 의미로 쓰기도 할 정도였다고. 그래서 그만 좀 울라고 안티들의 비아냥을 듣기도 했는데, 어쨌든 한국팀 선수가 금메달도 딴 마당에 다 같이 기뻐하니 그냥 그러려니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2014년 1월 9일,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공주의 전담 코치를 맡는다는 기사가 떴다. 기사에 나온 내용으로 보면 대한양궁협회에서 여러 명의 후보 명단을 보내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골랐다고 한다.
4. 평가
대담성이 큰 장점으로, "시위를 떠난 화살에는 미련을 두지 않는다."를 신조로 삼아 이미 지난 성적에 미련을 두지 않는 모습 때문에 평정심을 잃지 않고 늘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치열한 승부욕은 전성기에는 불패의 모습을 만들어 냈고, 결혼과 출산 이후 복귀한 시점에서는 승부욕을 달인의 달관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경륜으로 승화시키면서, 그야말로 진정한 신궁으로서 자리잡았다.한국 양궁이 수십년째 세계 정상을 지키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많은 궁사들이 등장하여 신궁 호칭을 물려받고 있지만, 가끔은 김수녕 혼자만을 신궁으로 지칭할 때도 있을 정도로 세계양궁협회에서도 인증한 '20세기 최고의 여자 양궁 선수'로 평가되었다. 심지어는 국민학교 국정교과서 자연 과목의 물리 파트에 김수녕이 1988 서울 올림픽 양궁 단체전 당시 과녁을 겨냥하는 사진이 컬러로 실려 있을 정도였다. 정확히는 이 사진이다(출처: 경기일보).
실제 그녀의 올림픽 성적은 출중한데, 금4, 은1, 동1로 '올림픽 최다 메달 타이 기록'을 가지고 있다.[6][7] 다만 양궁 자체가 국제 무대에서의 엄청난 성과와 별개로 대중적인 인기 스포츠는 아니다 보니, 현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언급이 덜 되어 젊은 세대들에겐 인지도가 낮은 편이긴 하다. 사실 이는 축구나 야구 등 몇몇 인기 종목을 제외하곤, 과거 특히 21세기 이전 스포츠 선수들 대다수에 해당하는 사항이긴 하다. 세월 앞에 장사 없는 것. 그래도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처럼 양궁계의 전설 중 한명으로 남아있다.
5. 수상 기록
올림픽 | ||
<colcolor=#000000> 금메달 | 1988 서울 | 단체전 |
금메달 | 1988 서울 | 개인전 |
금메달 | 1992 바르셀로나 | 단체전 |
금메달 | 2000 시드니 | 단체전 |
은메달 | 1992 바르셀로나 | 개인전 |
동메달 | 2000 시드니 | 개인전 |
세계선수권 | ||
금메달 | 1989 로잔 | 단체전 |
금메달 | 1989 로잔 | 개인전 |
금메달 | 1991 크라쿠프 | 단체전 |
금메달 | 1991 크라쿠프 | 개인전 |
아시안 게임 | ||
금메달 | 1990 베이징 | 단체전 |
동메달 | 1990 베이징 | 개인전 |
아시아선수권 | ||
금메달 | 1988 콜카타 | 단체전 |
금메달 | 1988 콜카타 | 개인전 |
6. 둘러보기
Team KOREA /
1988 서울 올림픽 / 양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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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남자 | 여자 | ||||
박성수 | 이한섭 | 전인수 | 김수녕 | 왕희경 | 윤영숙 |
Team KOREA /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 양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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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남자 | 여자 | ||||
임희식 | 정재헌 | 한승훈 | 김수녕 | 이은경 | 조윤정 |
Team KOREA /
2000 시드니 올림픽 / 양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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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남자 | 여자 | ||||
김청태 | 오교문 | 장용호 | 김남순 | 김수녕 | 윤미진 |
리커브 여자 국가대표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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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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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아 ·
조미숙 ·
황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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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포기]
소속 학교 규정에 따른 입촌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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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성장기는 여기 저기 이사 다니다 최종적으론 충북 청주시에서 보냈다.
[2]
석사 학위 논문:
양궁 활성화를 위한 아카데미 필요성에 관한 연구(2011. 2)
[3]
두 번째는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2관왕을 달성한 쇼트트랙 선수
김기훈으로, 대한민국의 최초로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2관왕을 달성한 남자 선수이다.
[4]
前 유소년 수영코치, 現
백영고등학교 학생인권부장.
[5]
6년의 공백을 깨고 치열한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선발전이 금메달 따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농반진반 소리가 나올 정도로 한국 양궁 선수가 내부 경쟁을 뚫고 올림픽에 세 차례나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일은 굉장히 어렵다.
[6]
빙상의
이승훈과
사격의
진종오가 6개로 동률 기록을 가지고 있다. 다만 진종오는 은퇴했고 이승훈도 나이를 고려하면 메달 추가가 쉽진 않다. 그래도
양궁 후배들이나
쇼트트랙,
펜싱 등에서도 메달 획득이 활발한 편이라 시간이 지나면 깨질 확률은 있다.
[7]
최다 금메달 기록도 가지고 있었지만, 후배 궁사
김우진이 2024년 금메달 5개로 갱신하게 된다. 참고로 양궁에서 처음 올림픽 금메달을 딴 국내 선수는
서향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