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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21:20:32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은 시작되었다!/진/등장인물


1. 역대 군주2. 공/왕족 영(嬴)씨3. 기타 이름있는 자4. 기타

1. 역대 군주

2. 공/왕족 영(嬴)씨

3. 기타 이름있는 자

4. 기타


[1] 오기가 서하주둔군을 담당하던 시절의 일이다. [2] 당시 영거량은 본인이 출전하고 싶어했지만, 하필이면 당시 임신 중이었기에 영건에게 제지당한 후 손빈을 대신 보냈다. [3] 이 한탄에 대해서 영사가 고민한 결과가 바로 제나라의 패자 직위였고, 이는 328년의 낙양사건에 큰 영향을 미친다. [4] 유폐하거나 죽이거나라는 의미의 처리였다. [5] 이 일로 참치들 사이에서는 역시 빌런은 빌런답게 인성 개판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6] 이는 원래는 서장자였지만, 조선으로 보내면서 적장자로 승격하고, 초나라에 영직을 보내면서 다시 서장자로 강등했기 때문이다. [7] 당시 위나라는 조선을 상대로 합횡을 기획하고 있기에 이 때 어떻게든 길을 빌려주지 않았다. [8] 초나라가 합종에 참여함에 있어 위나라에게 가급적 달성을 요구한 조건 중 하나였다. [9] 이는 언니로써는 몰라도 왕으로써는 최적해였다. 조선의 신뢰를 얻고, 후계가 꼬일 상황을 막아내고, 친초파를 숙청할 길이 되었기 때문 [10] 그나마 초동대응까지 실패하여 희생양으로 백기를 내치는 선에서 끝난 것은 진나라 백성들에게 이전까지의 행보로 여전히 지지받고 있어서였다. [11] 섬망 [12] 들리지는 않았으나, 마지막으로 읊조린 말은 동생이 보고싶다는 것이었다. [13] 원 역사의 영탕이 자녀도 없는 상태에서 구정을 들겠다는 괜한 생쇼하다 무릎을 다친 게 도져 죽어서(...) 그렇다. [14] 친초파 문제가 대두된 것은 이 때로부터 몇십년 전부터의 일인데다, 갖은 노력으로 친초 성향이 매국행위까지 갈 극성 친초파들은 이미 수차례의 숙청과 진압을 통해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남은 이들이라고 해도 오히려 어디까지나 진을 위해서 내린 판단 하에 초와 친해질 필요는 있다 정도가 가장 극렬한 입장일 정도였고, 아예 진의 중진 중에서 해당 기준을 적용하면 영탕부터가 친초 위험분자라는 지적을 해 줄 지경이었다... [15] 이는 심지어 영직과 영탕의 항목에서 보듯 웬만해서는 정치적으로 대적할 관계였던 영직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16] 밑었던 수하인 맹열의 배신에 의욕을 잃고 칩거 중 [17] 거기에 영통의 지지자들이 영통을 충돌질 하는것을 보았기에 스스로 더욱 불안해 하였다. [18] 이때 조선은 진왕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하여 자국인을 고관직으로 채용할 거냐고 떠보았는데, 진나라에서는 보통 왕족에게만 허가되던 재상직을 바로 준비하겠다고 답변하였다. 이는 오랜 기간동안 경현군으로써 대 하동 외교업무등을 처리하여 현지 사정에 밝았던 조승의 예측을 뛰어넘는 호응이었다. [19] 밀실 회담에서 동석한 한(漢)왕은 황제의 사촌으로 기씨였다. 자신의 친족만큼 신뢰하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20] 심지어 영사는 회맹에 자신의 대리인 자격으로 파견해버리기까지 했는데, 이 때 일이 잘못될 경우 대리인으로써의 자격 미달을 이유로 꼬리를 자를 생각이었다. [21] 여담으로 지력이 100이고 안 그래보이는데 다혈질인 점에서 어장주는 세후와 가장 닮은 성격이라 표현했다. 무엇보다도 죽기 직전 자신의 눈 앞에서 최소한 자기네 나라라면 볼 일이 없는 국가적 개판(...)을 눈앞에서 목도하자 그대로 크게 미친 듯이 웃다가 베여 죽었다. [22] 원역사의 선태후 [23] 미왕후는 초나라 왕족이다. [24] 재상으로 타국의 상방과 동일하다. [25] 왕위 [26] 이때 기설이 보여준 반응이 마뜩치 않은것으로 보아 영직을 경계하는듯 하다. [27] 영탕 사망소식 [28] 이전부터 참치들이 우려했던 중원과 초원 양사이드로 조선을 압박하는 전략이 언급된것이다. [29] 영통은 사마가문이 영직에게 붙은 사실을 모른다. [30] 여담으로, 후손일 영정은 여기서는 여불위의 자식이 되었다(...) [31] 왕-대량조 바로 다음의 직책으로 사실상 3인자. [32] 인상여의 주문대로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 모두 끌여들여 함께 죽기로 다짐했다. [33] 원 역사에서도 영사습을 맞아들인 건 균개였으나 여기선 좀 더 빠르게 이뤄졌다. 사실 이는 본디 이름없는 귀족 포지션이었으나 해당 행보에 부합하는 인물이 있음을 뒤늦게 찾은 스레주에 의해 균개가 된 것도 있다. [34] 물론 진나라와 진 왕가의 입장에서는 재차 드리운 암운이겠다만. [35] 퇴장 직전 영탕에게 사실 너의 아버지는 너 말고 영직을 왕으로 만들고 싶어했다는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36] 죽기직전 자신은 왕에게 충성을 다했다며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간청하였지만, 영통은 냉정히 백기를 잘라버렸다. 물론 이는 진나라 군부 내에서 근왕파이자 중견급 인물을 날려버린 것이므로 엄청난 타격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37] 영직은 엄마가 초나라 사람이고, 본인도 어릴 때 초나라에 인질로 가서 친초파라고 여겨졌기 때문 [38] 아이러니하게도, 진나라가 서하대전으로 몰락하는 것이 월지의 약탈 때문이였는데, 월지가 망하는 계기도 진나라를 약탈하는 것이였다. [39] 영탕이 숙청하지만 사실상 초의 요청으로 인해 죽었다. [40] 실제 진나라 행동 판정 중 내정에서도 일부 부문을 빌미로 외정이나 군사행동에 가까운 짓을 내정이라 간주하고 할 수도 있었던 적이 꽤 되었다. [41] 더불어 영직과 침상을 함께 하는것으로 추정된다(...) [42] 영직에게 보내는 서신에 자신이 영직의 균개가 되겠다고 언급하였다. [43] 송의 상방 위염은 백기와 친한사이인것도 있었다. [44] 백기를 송에 보내어 그 연줄로 송에서 출사해보겠다는 계획이다. [45] 진측의 사정을 고려해 애초에 일부 물량이 유출되도록 안배되어있긴 했지만, 다른 연루자와 달리 명분도 충분한 최소선도 없이 한 행동이라 시선이 도저히 고울 수가 없었다. [46] 영직은 손해보는 성격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47] 이때는 여비가 떨어져 돈벌겸 객지벌이로 나간것이라 취미와 연관은 없다. 본인도 이때 생고생 한것을 두고두고 후회하였다. [48] 비의와 소진 [49] 원 역사에서 영직과 인상여의 관계를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50] 진나라 출신이 아닌 외국인이지만 어디 출신인지는 밣혀지지 않았다. [51] 더불어 조국 촉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