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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8 07:43:10

기노시타 케이스케

기노시타 케이스케
[ruby(木下惠介, ruby=きのした けいすけ)]|Keisuke Kinoshita
파일:000000000062-org.jpg
국적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 →
[[일본|]][[틀:국기|]][[틀:국기|]]
출생 1912년 12월 5일
일본 제국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시
사망 1998년 12월 30일 (향년 86세)
도쿄도 미나토구 자택
수훈 자수포장 (1977년 수상)
욱일소수장 (1984년)
직업 영화감독,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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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colbgcolor=#fff,#1f2023>170cm
활동 기간 1933년 – 1998년
묘소 가마쿠라시 엔가쿠지(円覚寺)
부모 아버지 기노시타 주요시
어머니 기노시타 타마노
역임 직위 기노시타 케이스케 프로덕션 창립 및 1대 대표이사 역임(1964) }}}}}}}}}


1. 개요2. 일생과 일화3. 평가
3.1. 쇼치쿠 키즈인 오즈 야스지로와의 비교3.2. 태평양 전쟁 이전 초기 4 작품3.3. 태평양 전쟁 이후 주요 작품들
3.3.1. 내가 사랑한 그녀(わが恋せし乙女,1946)3.3.2. 초상(肖像,1948)3.3.3. 파계(破戒,1948)3.3.4. 아가씨 건배!(お嬢さん乾杯,1949)3.3.5. 약혼반지(婚約指輪,1950)3.3.6. 카르멘, 고향으로 돌아오다(カルメン故郷に帰る,1951)3.3.7. 일본의 비극(日本の悲劇,1953)3.3.8. 여자의 정원(女の園, 1954)3.3.9. 24개의 눈동자(二十四の瞳,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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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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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라면 언제나 인간을 그려내야 한다. "
ㅡ 기노시타 케이스케, NHK TV대담중
" 내 드라마에서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자식에게 악수하고 '전쟁터에 나가 자랑스럽게 전사하라'라고 말하는 어머니가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나는 결코 그런 걸 연출할 수 없었다. "
ㅡ 기노시타 케이스케, NHK 특별대담 인터뷰 중 육군(영화)에서 군부의 방침에 반하는 연출을 해서 감독활동을 박탈당한 경험을 묻자 답변중
" 기노시타 감독님의 작품에 수없이 출연했지만 키스 장면과 침대 장면은 단 하나도 없었어요. 나루세 감독님의 작품에는 아예 일상이었는데 말이예요.(웃음) "
다카미네 히데코, NHK에서 기노시타 감독과의 대담 인터뷰 중

일본 영화감독 극작가. 쇼와 시대를 걸친 일본 영화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거장이다.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구로사와 아키라, 나루세 미키오 이상 일본 영화계의 4대 거장 반열 평가는 받지 못했지만, 분명 쇼와시대 일본 영화계 내에서는 무시못할 족적을 남겼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 같은 년도에 데뷔했고,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감독이 사망한 후로는 구로사와와 함께 일본 영화계의 양대 산맥으로 여겨졌다. 특히 기노시타 감독의 " 24개의 눈동자"는 1954년 키네마 준보 1위에 선정되며 (심지어 당시 2위도 기노시타 감독의 작품이었던 "여자의 정원"!) 3위인 구로사와의 " 7인의 사무라이"를 앞섰는데, 오늘날 " 7인의 사무라이"가 갖는 평가와 의미를 생각하면 기노시타 감독의 " 24개의 눈동자"가 당시 얼마나 큰 반향을 불러왔는지 상상이 안될 정도.

1960년대 중반부터 주 활동무대를 TV로도 확장해서 영화뿐만 아니라 TV드라마 제작에도 활약하던 중 1998년 12월 30일 뇌경색으로 인해 동경의 자택에서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일생과 일화

시즈오카현에서 식료품점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 시절부터 범상찮은 포스를 선보이게 되는데 수업은 뒷전이고 허구언날 영화관에 처박혀 영화에 미쳤다며 부모에게 매타작을 버는 것은 기본. 당시 일본 사극영화의 배경이 되는 교토를 보고 싶다고 시즈오카에서 교토까지 무단가출(?)을 감행하여 할아버지가 출동해 교토를 이잡듯 뒤져 기노시타를 찾아내 집으로 귀환시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극심한 부모의 반대에도 계속해서 영화에 대한 열정을 본 부모는 결국 반대를 접고 기노시타의 꿈을 인정하기에 이르는데 이후 적극적으로 기노시타를 후원하는 듯한 행보도 보여준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당시 최신영화 스튜디오를 막 건설하고 운영에 들어간 쇼치쿠의 직원들을 물색해 자기 아들을 알리는 후원도 했다는 듯. 결국 기노시타는 1933년, 쇼치쿠의 키마타 스튜디오에 입사하여 필름 현상부 직원을 시작으로 그의 영화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이후 쇼치쿠 재직 중 1940년 제2차 중일전쟁 발발직후 일본 제국군대에서 입영영장을 받아 제국육군에 입대하는데 나고야에서 기본훈련을 받고 중국 상하이와 심양 등 중국본토내 일본군 점령지들을 옮겨다니다 1년만에 부상[1]을 입고 본국으로 귀국 후 상해제대한다.

제대이후 본격적으로 쇼치쿠에서 감독으로 승격되어 1943년 "꽃이 피는 항구"로 장편 영화 감독데뷔를 하게 된다. 같은 해에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역시도 "스가타 산시로(姿三四郎)"로 감독데뷔를 하게 되는데 구로사와 감독은 커리어 출발을 도호영화사[2]에서 시작했다. --그때부터 라이벌 관계 형성.-- 데뷔 당시에는 쇼치쿠의 힘이 컸는지 아니면 영화 자체의 평가가 좋았는지는 결론내리기 어렵지만 신인감독상을 기노시타 감독이 수상하게 되면서 일본 대중에게는 기노시타 감독의 이름이 더 널리 알려지게 된다.

태평양 전쟁당시 기노시타 감독이 제작한 영화는 4편이며 이중 일본국내,해외를 막론하고 평론가들의 불꽃튀는 평가전이 벌어지는 문제작이 하나 나오는데 바로 1944년 발표된 " 육군(陸軍,리쿠쿤)"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페르소나로 유명한 류 치슈가 출연한다. 기노시타는 자신의 영화의 류 치슈를 자주 캐스팅했다. 이 영화는 일본제국 육군성이 전쟁선전영화로 기획하고 이를 쇼치쿠에 의뢰했는데 당시 쇼치쿠에서는 감독직을 기노시타에게 맡긴다.[3]

이 영화 "육군"는 아사히 신문에 연재된 히노 아시헤이(필명이며 본명은 타마이 카츠노리/玉井勝則)의 동명소설을 영화로 옮긴 것인데 원래 작가가 당시 살벌했던 분위기에 강압 반 자포자기 반으로 써 내려갔던 " 국뽕"필이 충만한 소설이었다. 원작의 ‘깊은 충성심’에 감동한 육군성은 당시 영화업계 1위(지금으로 따지면 CJ엔터급)인 쇼치쿠에게 이 소설의 영화화를 의뢰하고 제작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나온 결과물은 충격과 공포.(이후 항목에서 서술)

영화 "육군" 이후 기노시타는 일체의 영화활동을 금지당하게 된다. 일본의 항복이후 이 조치가 해제되면서 기노시타는 다시 영화감독으로 복귀하게 되는데 종전이후 첫번째 작품이 1946년 개봉한 "오손가족을 위한 아침(大曾根家の朝)". 이 영화는 1946년 키네마 준보 베스트 1위를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하였으나 역시나 기노시타 이름값에 걸맞게 사건사고를 치는데, 바로 미 점령하의 일본에서 검열지침 대상에 걸린 첫번째 영화로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이다.

일본 패전 직후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포고령을 통해 일본 언론 통제 및 검열에 대한 지침을 발표하고 사령부 내에 CCD(Civil Censorship Detachment)를 구성해서 일본의 모든 언론(물론 영화도 포함)에 대한 검열 및 보도에 엄격한 통제를 시작한다. CCD의 첫번째 영화 검열 본보기로 기노시타 감독의 복귀작이 얻어걸린 것인데, 기노시타의 "오손가족을 위한 아침" 영화 자체는 태평양 전쟁으로 뿔뿔히 흩어져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담담히 그려낸 영화이다. 문제의 마지막 장면 - 오손가족이 바닷가에서 다시 한자리에 모여 일출을 맞이하는 - 이 연합국 측에서는 "부활하는 일본제국 군국주의 및 민족주의"를 연상케 한다고 하여 삭제 권고 처분을 받은 것이다. 당연히 배급제작사인 쇼치쿠와 기노시타 감독은 SCAP에게 구구절절 이 영화의 반군국적 의미를 설명해야 했고 결국 마지막 장면은 어찌저찌 삭제 없이 그대로 상영되게 되었지만 기노시타 감독은 이때 꽤나 충격을 받은 듯하다. 패망 전 제국주의하의 일본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했던 기억이 뼈저리게 아팠던 그였기에 종전 이후 달라질 줄 알았던 시대에서 이런 처분이 엄청 억울했던듯.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기노시타 감독은 1960년도 중반까지 1년에 평균 2-3작품을 제작,발표하는 왕성한 활동력을 보인다.

1951년 일본 최초의 장편 '국산 컬러 필름영화'[4][5] "카르멘, 고향으로 돌아오다(カルメン故郷に帰る)"를 발표하였다. 이 영화부터 일본 영화사의 여제란 평가를 받는 다카미네 히데코와의 협업이 시작되었다.

1954년은 기노시타 감독 최고의 흥행 전성기라 불릴만한 해였다. 또한 다카미네 히데코에게도 생애 최고의 해중 하나로 기록될법하다. " 24개의 눈동자/二十四の瞳"와 "여자의 정원/女の園"이 개봉했는데 둘다 다카미네 히데코 주연이며 둘다 나란히 키네마 준보 베스트 1위와 2위로 선정되었다. 참고로 3위는 영화의 본고장 헐리우드에서 전설이라 칭송받는 구로사와 감독의 " 7인의 사무라이".

1949년에 "아가씨 건배!/お嬢さん乾杯"라는 작품에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페르소나라 불리는 하라 세츠코가 주연으로 출연하였는데 기노시타 감독작중 유일하게[6] 하라 세츠코가 출연하는 작품이다. 기노시타 감독의 50개 장편영화 필모를 보면 하라 세츠코[7][8]가 한편만 출연했다는게 좀 의아하게 느껴질 만도 하다.

1964년 영화 "향의 향기/香華" 개봉 이후로 쇼치쿠(松竹)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이후 2개의 영화(스리랑카의 사랑과 이별,사랑스러운 피리와 북)를 도호에서 제작한 후 사망까지 남은 작품들을 다시 쇼치쿠에서 제작하고 개봉한다.[9]

1964년 쇼치쿠와의 결별 이후 기노시타 감독은 TV로 활동영역을 넓혀간다. 기노시타 감독의 이름을 건 "기노시타 케이스케 프로덕션"을 설립한 그는 TBS 테레비와의 협업으로 "기노시타 케이스케 극장"이라는 타이틀로 전문 드라마 방송물 제작을 시작한다.[10] 1964년 10월부터 시작한 이 드라마 프로그램들은 중간에 "기노시타 케이스케 아워"로 이름이 바뀌고 방송시간이 조절되는 변화를 겪으면서도 계속 이어지다 1974년 9월을 끝으로 10년 방송의 막을 내린다.

1988년 기노시타의 유작이 된 "아버지/父"를 발표,개봉한다. 마지막 유작의 제작/배급은 역시나 쇼치쿠. 제작배경이 좀 특이한데 쇼치쿠에서 일반 대중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주제로 한 수필작문을 공모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아버지"편은 기노시타 감독이, "어머니"편은 기노시타 감독의 조감독이었다가 1961년 감독데뷔를 한 마츠야마 젠조[11] 감독이 맡아 제작하고 이 2편의 영화를 동시개봉하는 형태로 제작/발표되었다.

3. 평가

[쇼치쿠] 기노시타 100주년 기념위원회 제작 영상. 기노시타 감독의 대표작들을 복원판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후 평가가 박한 편이다. 앞서 언급한 일본 영화계의 4대 거장에는 끼지도 못하고 해외에서도 소개된 그의 작품들은 그리 많지 않다. [12]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사후 해외에서 받는 평가와는 대조적이다.

기노시타 케이스케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일본내에서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일본 영화평론가는 " 오즈 야스지로는 드라마라는 재료를 1cm 단위로 정확하게 조각하는 예술가, 구로사와는 철학적 액션 스펙터클의 창시자, 미조구치 겐지는 비극적인 여성에 대한 서사를 천재적으로 그려내는 화가" 등 단순하게 특징과 장점을 도출해 낼수 있지만 기노시타 케이스케는 그럴 수 없는게 해외에서 매력이 없는 중요 요소라고 진단한다. --(한마디로 특장점이 없다?!)--

위 평가에 대해 여러 의견이 갈리겠지만 기노시타 감독이 오즈나 구로사와 그리고 나루세 감독들에 비하면 현역시절 인기는 훨씬 능가했다는 데는 이론이 없을 듯하다. 한창 활동때에는 1년에 3개 장편영화를 제작해 개봉할 정도로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줬다. 소속배급사인 쇼치쿠(松竹)의 대접도 다른 감독들에 비해 높았으며,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생전에 배급사로부터 급전을 자주 땡겨 썼고 그의 사망직후 장례식장에서 부조금으로 들어온 조의금함을 압류당할 뻔한 웃지못할 궁핍함도 기노시타 감독에게는 먼나라 이야기일 정도로 어느정도 생활을 영위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45년 영화감독 경력에 50편의 장편영화에서 별다른 기복이 없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 낸다. 혹자는 쇼치쿠가 좋아할 만한 소재인 가족,사랑,인간애 등을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배급사,영화제작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하지만, 사실 기노시타 감독의 필모를 분석하면 그시대 일본의 사회상을 비판할만한 주제를 결코 피해가지 않고 채용했음을 쉽게 알수 있다. 그리고 쇼치쿠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음은 분명하지만 그건 1950년대 후반까지고, 1964년 기노시타 감독이 기획중이던 반전영화가 흥행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쇼치쿠가 제작중단을 전격 선언하자 기노시타 감독은 길길이 날뛰며 30년 넘게 몸담아오던 쇼치쿠를 뛰쳐나와 자신의 이름을 딴 "기노시타 케이스케 프로덕션"을 설립한다.(2003년 TBS 테레비 산하 드리맥스 텔레비젼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TBS의 자본수혈을 받고 이후 2019년 TBS에 인수합병된다) 이후 쇼치쿠 배급으로 몇개의 작품을 더 만들기는 하나 이 사건 전후로 쇼치쿠와의 관계는 과거에 비하면 완전히 돌아섰다고 봐도 무방하다. [13]

기노시타 감독에 대해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당시 "대중적으로 인기있고, 다작이었으며, 평론가들에게 호평받고, 사회비평이던 순응이던 절충해서 버무려내는 능력이 탁월했던 영화감독" 이라는 평가는 분명한 듯 하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정적인 느낌이라면 기노시타 감독은 그 반대일 정도로, 형식과 주제를 가리지 않고 표현했다. 코미디와 멜로같은 주제에 좀더 적극적이었던 면은 분명하지만 형식면에서 뮤지컬과 대하극, 전쟁서사극, 시대극 등도 가리지 않고 제작했으며 과거 전국시대부터 현대 시대극까지 사회배경에 개의치 않고 자유롭게 오가며 극본을 써냈다. 거칠고 엉성한 영상미학에서부터 극도로 양식화된 스튜디오 영상미를 골고루 사용했으며,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극단적으로 선호하면서 썼던 정적인 카메라 테이크 샷들에 비하면 기노시타 감독은 롱테이크와 퀵 커팅을 번갈아가며 사용하는데 별 부담이 없다고 생전에 말하기까지 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 당시 일본영화가 조명하려고 했던 일본의 역사,문화,이상 그리고 일본 대중의 정서적 삶에 대해 기노시타 감독은 광적으로 집착하리만큼 집요하게 파고들었으며 이때 항상 도덕적 관념을 결합시켰다는 점이다. 영화를 통해 표현하려고 하는 모든 주제에 항상 도덕적 감각을 주입했다는 것이 기노시타 감독의 특징인 것이다. 이는 종종 기노시타 감독의 작품을 비판할때 "나이브하다"라는 것과 맞물리는데 "휴머니즘이긴 한데 뻔해보여 싫다","전형적인 최루성 영화( 24개의 눈동자)의 거장","가르치려 들려 해서 싫다"는 일본 시네필들의 평가도 만만찮은 편이다. 반대로 하라 케이이치처럼 애니메이터임에도 기노시타 전기 영화를 만들정도로 지지하는 팬도 있다.

전통적인 일본의 도제시스템을 채용한 쇼치쿠출신이기 때문에 그의 동세대 모든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스튜디오 시스템의 산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에 대한 남다른 동경으로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그의 꿈은 1933년 쇼치쿠의 카마타 스튜디오에 입사하게 됨으로서 현실이 된다. 당시 쇼치쿠는 대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감독/조감독/작가 직급으로의 입사가 가능했는데 기노시타 감독은 고등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이어서 동경의 동양사진학교에 입학, 졸업이후 정식 입사를 했으니 영화에 대한 그의 열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3.1. 쇼치쿠 키즈인 오즈 야스지로와의 비교

상술했듯이 기노시타 케이스케는 어떠한 제작 스타일이다, 어떤 범주의 영화를 만든다 라고 쉽게 정의내리기가 어렵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 패망 이후 발표했던 그의 작품들에 대해서 일본내 다수의 영화평론가들은 대부분 호의적인 평가들을 내리고 있다. 반면 외국의 평론가들은 오히려 전쟁중에 발표한 기노시타 감독의 데뷔작을 포함한 4개 작품에 좀더 주목하고 있다.

같은 스튜디오 소속이었던 오즈 야스지로와의 비교평가도 흥미로운 것이 오즈 감독은 쇼치쿠에서의 입사,데뷔가 기노시타 감독보다 10년 빨랐으며(오즈 감독은 1923년 입사, 기노시타 감독은 1933년) 오즈 감독은 입사 초기부터 촬영부 소속으로 카메라 워킹을 일찍부터 배우기 시작했으나 기노시타 감독은 필름 현상부에 입사해 영화 후반부 제작과정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감독데뷔 후 소속사인 쇼치쿠로부터 받았던 대접도 다르다. 오즈 감독의 초기작들은 당시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긴 했어도 제작배급사인 쇼치쿠는 오즈 감독의 흥행성적에 그닥 만족하지 않았다. 반면 기노시타 감독의 흥행성적에는 만족을 표시하고 차기작 일정과 기획,제작에 대부분 호의적이었다. (적어도 1965년까지는)

태평양 전쟁중 행보도 둘은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둘다 중일전쟁 참전을 위해 징집을 당하지만 오즈 감독은 1937년부터 39년까지 2년을 최전선에서 복부했으며 일부 역사학자들의 사료와 연구에 의하면 중국에서 화학전 수행을 담당하는 부대에 배속되어 독가스 살포 작전에도 참여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기노시타 감독은 나고야에서 받은 기초군사훈련 기간을 제외하면 중국본토에서 복무한 기간은 1년도 채 되지 않으며 그나마 비전투 활동(부대내의 공사에 동원되었다가 다쳤다는 게 정설이다.)에서 부상을 입고 귀국후 상해 재대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로 전시총력체제로 변환한 이후 일본 영화 산업도 싫든 좋든 큰 변화를 거치게 된다. 쇼치쿠는 당시로서는 "드라마는 쇼치쿠"이라고 할 정도로 드라마 풍의 영화제작에 몰두했으며 쇼치쿠에 포진한 감독들 역시도 인간애,가족,사랑 등에 각별했던 오즈 야스지로,시마즈 히로시, 나루세 미키오[14][15], 이케다 요시노부 등 드라마 감독등의 흥행세몰이가 대단했었고 쇼치쿠 대부분의 흥행수입은 이들 감독들의 작품들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고 "홈드라마"로서는 극장에서의 흥행이 어렵게 되고, 결정적으로 당시 흑백영화필름은 1933년까지 전량 국외수입에서 충당되어야 했다. 1934년, 후지필름이 간신히 흑백영화필름을 국산화에 성공했지만 생산량은 극히 소량이었으며 성능은 밑바닥 수준. 그나마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미국 코닥사는 당장 일본으로의 모든 필름수출을 중단시켜 버렸다. 주축 동맹국이었던 독일로부터의 아그파 필름 수입도 점점 어렵게 되어버려, 군사목적 및 국책선전영화 제작에 필름조달이 우선하게 되자 국책선전영화 제작에 소극적인 쇼치쿠 역시도 결국 방향을 선회할 수 밖에 없었다. 쇼치쿠 소속 감독들 역시도 전쟁선전영화는 달갑지 않게 생각했지만 국책영화가 아니면 아예 제작 자체가 불가능해지니 생각을 고쳐먹을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이미 거장으로 이름이 나 있던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나 이제 막 감독승격을 하고 2작품을 끝낸 신인 기노시타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태평양 전쟁중 발표했던 두 감독의 영화도 큰 차이를 보이는데 일단 오즈 감독은 공식적으로 일본 제국 육군의 요구를 받아 전쟁선전영화를 개봉/발표한 적이 없다. (몇개의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거나 제작하던 도중 다 엎어짐) 태평양 전쟁중 오즈 감독이 제작, 개봉했던 영화는 "도다 가문의 형제들/戸田家の兄妹"과 "아버지 아리키/父ありき" 이 두 작품이며 둘다 쇼치쿠에서 제작,배급했다. 그러나 민간자본으로 제작한 영화라고 할지라도 당시 일본제국정부는 엄격한 검열과 통제를 가했기 때문에 "아버지 아리키"작품 같은 경우에는 태반이 편집으로 잘려나가 겨우 스토리만 맞춘 채로 개봉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오즈의 영화라고 보기도 힘들었다. 오즈가 전쟁시에 영화제작에 이런 소극적인 자세로 저항에 임했다고 평가한다면 기노시타 감독은 오히려 적극적인 태도로 제작을 이끌면서 일본제국정부의 검열과 통제에 저항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16]

3.2. 태평양 전쟁 이전 초기 4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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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 "꽃이 피는 항구"(1943) "살아가는 마고로쿠"(1943) "환호의 도시"(1944) "육군"(1944)

기노시타 감독이 태평양 전쟁중 발표한 작품은 총 4작품이며 그의 데뷔작부터 시작해 1943년부터 1944년까지 2년간 4작품을 쏟아냈다. (4작품 모두 쇼치쿠와 크라이테리온에서 DVD 발매했다.) 개봉한 순서대로 "꽃피는 항구/花咲く港","살아가는 마고로쿠/生きてゐる孫六","환호의 도시/歓呼の町","육군/陸軍". 이 4개 작품중 데뷔작인 "꽃피는 항구"와 "’살아있는 마고로쿠"는 쇼치쿠 제작,배급인 민간자본영화이고 후반기에 만들어진 "환호의 도시","육군"은 일본제국 육군성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선전영화이다. 사실 당시 일본민간자본 영화라고 해도 일본제국정부의 전시 검열 제도는 가혹하기 그지 없었는데 일본제국 군부는 아예 1939년에 이러한 검열제도를 법제화시키기까지 했다. 일부 법제화된 검열 항목을 나열해 보면

* 영화에 등장하는 일본여성은 절대 흡연을 해서는 안된다.
* 영화에 등장하는 일본황국신민(국민)은 절대 외국어로 대사를 말할 수 없다.
* 영화에 등장하는 코미디언(희극인)들은 일본황국신민의 위신을 손상하는 우스꽝스러운 언행을 할 수 없다.
* 영화는 반드시 황국의 산업생산과 농업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을 포함하여야 한다.

오늘날 해외 영화 평론가들이 높이 사는 점은 기노시타 감독이 이런 가혹한 검열들을 통과하면서도 목표로 삼았던 주제의 표현을 모두 달성해 냈다는 점이다.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기노시타의 4개 작품들은 당시 일본 육군정보국 검열을 통과는 하는데 대놓고 검열목적을 비웃기라도 하듯 감독 하고 싶은 말은 다 하면서 검열항목들을 피해나가기가 다반사였다. 서사에 어울리지도 않는 일본제국정부의 전쟁찬양항목을 어거지로 집어넣으면서도 컷의 배치나 시퀀스는 이상하게도 주제의식을 해치지 않는 점도 특이했다. 쉽게 말해 당시 검열관이 영화를 보고 있지만 괜히 찜찜해 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을 정도였다. 기노시타 감독의 초기 4작품을 분석해 보자면

1. 꽃피는 항구(花咲く港)
위 4작품중 유일한 코미디 영화이다. 영화의 주제는 인간군상에 대한 해학과 풍자에 집중하지만 기노시타는 스토리의 설계를 탄탄하게 구성하고 교묘하게 검열을 피할 가벼운 소품들을 군데군데 배치하면서도 주제를 해치지 않는 전개를 선택한다. 교활한 도시출신의 사기꾼들이 시골 사람들에게 접근해 투자를 미끼로 사기행각을 벌일 준비를 한다. 순진하기 그지없는 마을사람들은 아무런 입지조건도 없는 그들의 작은 어촌마을에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자는 허무맹랑한 사기에 꺼리낌 없이 전재산들을 사기꾼들에게 내어주고 이 사기꾼들은 챙겨 달아나려는 와중, 진주만 폭격 뉴스가 전해지고 마을 사람들이 다시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이자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마지막 영화의 결말에서 이 사기꾼들의 결정은 국가의 전쟁 노력의 가치와 일치하면서도 감독의 주제의식인 인간의 구원 이야기를 놀라울만큼 세련된 방식으로 표현해 냈다.

2. 살아가는 마고로쿠(生きてゐる孫六)
위 4작품중 유일하게 과거 막부시대부터 일본제국시기까지 아우르는 대하서사극이다. 영화 초반은 다케다 신겐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이에 벌어진 미카타가하라 전투를 배경으로 시작하는데, 전투를 준비하는 사무라이들이 쇼와시대 태평양 전쟁을 준비중인 제국 육군군인들로 이어진다는 서사는 이 작품의 주요 구성 요소이다. 과거 사무라이 정신을 이어받은 일본군대를 칭송하는 듯한 목적으로 일견 보이기도 한 이 영화는 사실 일본제국의 농업생산활동을 장려하기 위한 선전문구가 주가 되는 사실상 국책장려선전영화이다. 이 영화에서부터 기노시타 감독의 팬이라면 눈치채겠지만 검열제도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감독의 주제의식을 영화 곳곳에 심어놓는다.

3. 환호의 도시(歓呼の町)
이 작품부터 일본 육군성이 정식으로 국책홍보영화로 쇼치쿠에 의뢰해 기노시타 감독이 제작하게 된다. 이 작품은 미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한 희생을 줄이기 위해 도심 밀집 지역으로부터 민간인들을 강제 소개하기 위한 국책을 홍보하기 위한 영화였다. 국가시행홍보 영화이지만 쇼치쿠내부에서 기노시타 감독에 대한 평가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작품이기도 한데 열악한 제작환경과 예산에도 불구하고 세련되고 매끈한 영화 하나가 나왔다고 쇼치쿠 내부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보아도 믿기 여러운 것이 이 영화는 세트촬영 영화이고 세트크기가 100제곱미터가 채 되지 않는 곳에서 영화를 촬영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정교한 카메라 워킹과 초단위 편집으로 전혀 갑갑함이 느껴질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사랑하는 연인사이였던 신고(극중 타카코의 아들)의 전사통보부분은 명백히 검열에서 걸려질 부분인데도 걸려지지 못했고 그 당시에 국책홍보영화에 뜬금없는 폭격사운드가 30초간이나 삽입되기까지 했다.

4. 육군(陸軍)

"육군" 항목 참조

3.3. 태평양 전쟁 이후 주요 작품들

3.3.1. 내가 사랑한 그녀(わが恋せし乙女,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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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야스미, 이가와 쿠니코 주연
기노시타 감독의 첫 로맨스 영화. "오손가족을 위한 아침" 제작을 마치자 마자 기노시타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해 7개월만에 완성해서 다시 한번 쇼치쿠 경영진들이 기노시타의 연출력에 감탄했으며 이때부터 쇼치쿠의 드라마 전성시대를 여는 출발점이 시작됐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정통 로맨스 영화이다. 서로 피가 다른 남매가 성장하여 오빠가 여동생을 향한 연심을 키워나가지만 현실의 장벽에 부딪혀 좌절하는, 현재에는 흔해빠진 전형적인 로맨스물이지만 당시에는 파격적인 소재의 영화였다. 흥행에도 성공해서 당시 제작배급사인 쇼치쿠에서도 흥행의 결과를 받아들고서는 "기노시타 감독이 대체 못하는 게 뭐냐?" 라고 내부에서 찬사에 가까운 반응을 얻었을 정도로 기노시타 감독의 입지를 다져준 작품.

기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친동생인 기노시타 타다시 음악감독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기노시타 감독은 동생과 대부분의 그의 작품에서 영화음악 작업을 같이 하게 된다. [clearfix]

3.3.2. 초상(肖像,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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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각본, 이가와 쿠니코 주연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극본을 쓰고 기노시타가 감독한 유일한 협업영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기노시타 감독의 "한번 같이 협업해 보는 건 어때?"라는 제안을 받아들여 각본을 썼다고 한다. 영화의 시나리오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느낌이 그대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색채이지만 기노시타의 연출때문인지 그닥 임팩트가 있는 영화는 아니라는 평가가 나왔다.

개봉이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기노시타 감독에게 "나같으면 이렇게 찍었겠다"라고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많이 했다는 후문. 사실 당시 언론에서는 구로사와 감독과 기노시타 감독을 라이벌처럼 몰아가는 분위기를 만들었지만 실상은 그 둘의 친분도 꽤 있었던 모양이다. 둘은 데뷔년도도 같고 각각 쇼치쿠, 도호에서 잘나가는 영화감독으로 성장하고 있었기에 경쟁의식도 있었지만, 둘의 친분도 남달랐다. 기노시타 감독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지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던지 아쉬움도 많이 토로하고 구로사와에게 다음 작품의 각본도 요청, "낙성(落城)"이라는 대하시대극을 기획하기도 했지만 성사되지는 못했다.[clearfix]

3.3.3. 파계(破戒,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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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니치 영화 콩쿨 감독상 수상
일본의 대문호 시마자키 후지무라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영화화한 작품. 1948년 기노시타 감독은 3개의 영화를 동시에 제작/개봉하는 괴력(?)을 발휘하는데, "여자","초상","파계" 3작품으로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감독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수상란에 3개작품 감독으로 수상기재되어 있다!) 소속 쇼치쿠에서의 신임과 입지가 더해지는 것은 기본. 이 영화로 신예 여자배우 가츠라기 요코가 일본 영화계에 신데렐라처럼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이 영화는 좀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당시 "파계"영화는 도호영화사가 판권을 일찌감치 확보하고 기획을 거쳐 감독 아베 유타카, 주연배우 다카미네 히데코를 캐스팅해서 제작발표회까지 마치고 한창 촬영중에 있었다. 그러나 1946년부터 도호영화사에 불어닥친 노동조합 파업여파로 인해 영화촬영이 기약없이 지연되고 있던차에 도호영화사가 쇼치쿠에게 판권 및 제작권리를 넘겨버린 유례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사실 영화제작권리를 영화사끼리 거래하는 것은 당시 일본 영화업계에서는 그닥 큰일이 아니었는데 문제는 제작중인 영화, 그것도 주연배우 캐스팅이 끝나있는 데다 촬영이 시작되어 버린 영화를 중간에 다른 영화사에게 팔아버린 것은 지극히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다카미네 히데코는 일본 영화계에서는 거물급 배우였던지라 누가 보더라도 다카미네 히데코가 주연으로 캐스팅된 것을 뒤엎을 수는 없었지만 히데코는 도호소속 영화배우라 쇼치쿠출연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쇼치쿠는 아예 처음부터 다시 촬영하기로 하고 감독을 기노시타에게 맡긴다. 누가 봐도 이 영화를 중간에서 다시 제작하는게 모양새가 좋지 못해서 쇼치쿠의 많은 감독들이 손사래를 치며 감독직을 사양했다고. 쇼치쿠 경영진의 간청반 강압반으로 기노시타 감독이 대타로 기용되는데, 기노시타 감독 입장에서는 중간에 끼어서 매우 불편한 처지가 되었지만 결국 감독직을 수락하고 신인 여배우 가츠라기 요코를 발탁해 촬영을 마치고 흥행까지 성공하고, 평단의 호평까지 이끌어내며 생애 첫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감독상의 수상도 맛보며 감독으로서의 능력을 확고히 인정받게 된다. 키네마 준보 6위 선정. [clearfix]

3.3.4. 아가씨 건배!(お嬢さん乾杯,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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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여자주연상 수상
기노시타 감독의 첫 로맨스코메디 작품이자 하라 세츠코가 기노시타 감독 작품에 유일하게 출연한 영화이다. 이 영화와 "푸른산맥", 그리고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 만춘" 3작품으로 하라 세츠코는 생애 첫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영화줄거리는 전쟁직후 자수성가한 자동차 수리점 노총각 사장인 '케이조(사노 슈지 분)'가 몰락한 귀족 출신 아가씨인 야스코( 하라 세츠코 분)와 맞선을 본다. 사실 케이조는 신분차이 및 노총각인 자신의 열등감에 맞선을 그리 달갑지 않게 생각하지만 막상 만나본 야스코는 매우 미인에다가 성격또한 전형적인 내조형 여인인지라 한눈에 사랑에 빠지게 되고 야스코 역시 그리 싫지 않는 눈치인듯. 그러나 야스코에게도 숨겨진 사연이 있으니 그녀의 집안이 경제적 사정으로 몰락해 가는 중에 출신성분은 아래이지만 자수성가한 케이조의 재산을 눈여겨본 것. 서로의 동상이몽 사이에 서서히 진실한 감정이 싹트지만, 케이조가 우연히 야스코의 아버지가 사기사건으로 감옥에 갇히고, 야스코의 집이 저당잡히게 되는 사연을 알게 되면서 실망하지만 서로가 진실을 털어놓으며 사랑을 확인한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전형적인 로코물 드라마 범주에 속하는 소재를 주제로 했지만 하라 세츠코의 티켓팅파워와 쇼치쿠의 마케팅이 흥행에 일조했다. 또한 같은 해에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만춘(제작배급 쇼치쿠)의 동시개봉으로 영화에 대한 관심과 흥행은 꽤 높았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로맨스코메디 영화인데다 진행이 유럽영화풍의 코메디 성향도 있었던지라 일본관객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다만 이 영화 이후로 하라 세츠코 오즈 야스지로 감독, 시마즈 호지로 감독과 주로 작업하면서 기노시타 감독의 영화에는 마지막 출연작이 되었다.[clearfix]

3.3.5. 약혼반지(婚約指輪,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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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후네 토시로, 다나카 기누요 출연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페르소나 미후네 토시로가 처음으로 기노시타 감독 작품에 참여했다. 상대역은 불륜으로 엮어지는 여주인공으로 다나카 기누요. 당시 다나카 기누요를 둘러싸고 일본 연예계는 한바탕 떠들석 난리법석이 났었는데, 당시 일본 연예계의 3대 여배우인 하라 세츠코, 다카미네 히데코와 함께 다나카 기누요는 명실상부 일본을 대표하는 국민여배우 대접을 받고 있었다. 육군(영화)에서도 보여주었던 이미지가 그랬듯 '단아한 어머니상','품격을 갖춘 일본여성'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다나카 기누요는 1949년 미일 친선대사로 위촉되어 3개월동안 미국방문길에 오르게 된다. 하와이 호눌룰루를 거쳐 LA를 방문하고 헐리우드에서 수십차례의 공연도 갖는 등 해외에서의 활약상도 선보였다. 사단은 귀국길에 터졌는데 미국 방문시에 수수하고 단정한 원피스 정장차림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해 하네다 공항에 도착해 일본을 나서던 그녀가 귀국시 공항에서 보인 외모는 180도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보통이었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충격이라 할 정도로 노출이 심한 이브닝 드레스에 모피 반코트를 입고 메이크업은 도저히 대중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을 정도로 수위가 높았다. 거기다가 오픈카로 동경 긴자 한복판 거리에서 카 퍼레이드를 하는 기행까지 벌였는데 가히 일본국민들에게는 국민여배우라고 칭송받던 지적인 이미지의 여배우가 한순간에 짝퉁 마를린 먼모로 귀국하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당장 일본의 언론들은 "대체 아메리카(!)가 뭐길래 사람이 이리 변하나" 라며 융단폭격을 날려대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다나카 기누요를 욕하지 않는 건 미국방문을 후원했던 마이니치 신문 하나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여론이 험악해졌다. 거기다 다나카 기누요의 팬들은 "일본을 배신한 일본국민배우"라며 맹비난하기 시작했고 다나카는 주변 지인들에게 "대문밖을 나서기가 무섭다","미국방문전 수만통이었던 팬래터가 단 한통도 오지 않는다"며 우울해 하기도 했다고.

이런 다나카 기누요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다나카를 캐스팅해서 의리를 보여준 감독들이 오즈 야스지로와 기노시타 감독인데 다나카의 귀국 후 두문불출하던 다나카를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격려와 설득을 해서 캐스팅을 성사시켰다. 더군다나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쇼치쿠를 벗어나서 신토호에서 처음으로 감독직을 맡은 "무네카타 자매들"에 다카미네 히데코와 같이 출연을 성사시킬 정도로 다나카 기누요를 신경써주었다. 그러나 흥행은 별개로 그리 성공하지는 못했으며 당시 기누요의 상황과 맞물려 젊은 미남스타 미후네 토시로와의 러브라인 설정까지도 "다나카 기누요의 노욕"이라며 몰아가는 등 언론들은 살기등등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기를 신경써주던 기노시타,야스지로 감독에게 다나카 기누요는 이후로도 고마움을 종종 표시하기도 했으며 이후 다나카 기누요가 감독에 데뷔할때 미조구치 겐지 감독이 자신의 감독데뷔를 반대할때도 기노시타,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응원해 준 것도 잊지 않고 고마움을 나타냈다고.[clearfix]

3.3.6. 카르멘, 고향으로 돌아오다(カルメン故郷に帰る,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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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미네 히데코가 기노시타 감독 영화에 첫 출연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4위 기록
쇼치쿠가 "일본 최초 국산컬러필름 장편영화" 타이틀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하여 제작한 영화. 일본 영화 역사에 기술적인 업적을 세운 영화이다. 컬러필름은 일본 후지필름사가 최초로 개발한 컬러 포지티브 필름을 사용해 촬영했다. 참고로 일본 최초로 컬러 네거티브 필름을 사용한 영화 역시도 기노시타 감독의 1958년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이다. 일본 최초 컬러 포지티브,네거티브 필름 영화 기록 두 개를 한 감독이 세웠다. 다카미네 히데코가 기노시타 감독영화에 첫 출연한 영화이다.

항목 참조.[clearfix]

3.3.7. 일본의 비극(日本の悲劇,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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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치즈키 유코 주연.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6위 기록
기노시타 감독이 감독을 맡은, 코미디,로맨스물이 아닌 비극으로 끝나는 첫 영화. 당시 쇼치쿠에서는 처음 시놉시스를 받아들고, 기노시타 감독에게 수차례 “당신이 쓴거 맞냐?”고 확인하기까지 했다고. 또한 쇼치쿠의 경영진들은 “이런거 만드는 감독들은 따로 있는데 왜 당신이?” 라는 투로 기노시타 감독의 제작결심을 만류했지만 기노시타 감독은 제작의지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기노시타 감독에게도 “일본의 비극” 영화제작은 처음으로 시도해 보는 장르의 영화였다. 한 전쟁미망인이 살아가면서 삶이 붕괴되고 자식들에게도 버림받아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는 줄거리는 당시 행복한 가족,희망찬 미래,기운찬 현재 등을 캐치프레이즈로 홈 드라마를 추구하는 쇼치쿠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태평양 전쟁 패망 이후 일본이 한국전쟁을 통해 급격한 사회재건을 이끌면서 빈부의 격차, 전쟁 전사자 가족들의 피폐. 진보세력 탄압 등 일본 사회의 어두운 면 역시나 크게 곪아가고 있었다. 그런 식의 무거운 분위기를 내는 영화를 만드는 쇼치쿠 소속 감독들은 따로 있었고 기노시타 같은 쇼치쿠의 간판 감독이 제작할 영화는 더더욱 아니었다. 기노시타 감독의 과거 필모그래피를 보더라도 결코 어울리지 않는 주제였음은 분명하다.

주연여배우는 모치즈키 유코(望月優子)를 캐스팅했는데 연극 전문 극단 출신의 여배우였다. 극단 소속 연극배우 시절부터 사회참여 성향이 강했으며 이후 1971년 참의원 통산 선거에 사회당 출신 전국구 후보로 출마, 당선까지 할 정도로 정치적으로는 좌파적 노선을 견지했다.

이 영화로 기노시타 감독은 이후 자신의 평가에 “사회파 영화감독”이라는 딱지가 붙을 정도로 정치시사적으로 진보 노선을 표현하는 것을 숨기지 않았는데 영화사인 쇼치쿠는 딱히 호의적으로 보지도 않았고, 이 영화에 대해서는 이전 기노시타 감독의 영화만큼의 마케팅이나 홍보에도 미온적으로 임해서 감독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고.[clearfix]

3.3.8. 여자의 정원(女の園,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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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감독상,여우주연상,여우조연상,각본상,음악상,녹음상 수상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2위 기록
기노시타 감독에게 본격적으로 "사회파 감독"이라는 인증도장을 박아준 작품. 이전 "일본의 비극"작품으로 기노시타 감독의 정치 및 시사성향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했다면 이 작품으로 기노시타 감독은 진지한 사회고발성 영화제작도 뛰어남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에 24개의 눈동자 영화같은 성격이 정반대의 영화도 제작해서 같이 개봉했었기에 영화계 및 대중에게는 확실하게 쇼치쿠 간판 스타 감독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영화내용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대변하듯 여성에게 부조리하고 강합적인 환경을 강요하고, 그러한 여학교내의 환경아래에서 한 학생이 현실을 극복하려 몸부림치다 결국 자살하고 동료 여학생들은 그녀의 죽음을 계기로 각성하여 학교측의 부당한 처사에 연대해 저항한다는 것으로 죽은 시인의 사회와 유사한 내용의 영화이다.[17] 기노시타 감독은 사실 이 영화에서 사회적 의미를 담는 게 아닌 당시 청소년기의 소녀들의 학원물 정도로만 기획했다가 제작단계에서 방향을 바꾸었으며 이게 흥행과 평가에 더 좋게 반영되었다고 이후 말한 바 있다. 평론가들도 내용을 높이 평가했으며 기노시타 감독은 이 영화와 24개의 눈동자 두 작품으로 생애 첫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감독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clearfix]

3.3.9. 24개의 눈동자(二十四の瞳,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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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대상,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1위 기록
기노시타 감독 필모중 최고의 평가와 위치를 안겨준 작품. 다카미네 히데코의 필모에도 역시나 같은 의미를 가진다. 1954년 일본 영화계를 휩쓴 작품이며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대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각본상, 녹음상을 수상했으며 블루리본상 역시도 대상,감독상,여우주연상,각본상을 거머쥐며 당해 일본 영화계의 원탑 영화로 군림했다.[18] 쇼치쿠에게도 어마어마한 흥행수입을 안겨주었으며 미국의 골든글로브 외국 영화상을 일본 영화로선 최초로 수상한 작품이다.

24개의 눈동자 항목 참조 [clearfix]


[1] 작전중 부상이 아니라는 것만 확인되었다. [2] 당시에는 PCL영화제작소 [3] 후대에서는 일본 육군성이 기노시타를 콕 집어 지명했다는 말도 있고, 쇼치쿠에서 맡기 싫어하는 기노시타에게 강압적으로 권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확인된 바는 없다. [4] '일본 최초 컬러 필름 영화'라는 기록을 쓰기엔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일본엔 1914년에 설립된 "천연컬러활동사진 주식회사/天然色活動写真" - 줄여서 '텐카츠' 라는 영화제작회사가 있었는데 이 회사는 컬러영화만을 전문적으로 제작하기 위해 설립된 회사였다. 이 회사가 1937년도에 제작한 "천인침" 이라고 하는 단편영화가 컬러필름으로 만들었고 실제로 개봉도 했었다. 문제는 필름이 모두 소실되어 진위여부를 확실하게 증명할 수 없었던 것. 이후 1945년에 "봄의 노래"라는 단편영화도 컬러필름으로 촬영해서 개봉했지만 이 역시 원본촬영본은 물론이고 프린트마저 남아있지 않아 증명이 어려웠고, 이 두 영화는 외국에서 수입한 테크니컬러 필름과 후지필름에서 시험적으로 소량생산한 프로토타입 필름으로 촬영했기에 순수 일본 국산 컬러영화라고 우기기에도 일본 영화산업의 체면이 서지 못했다. 결국 1951년 쇼치쿠에서 제작한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 를 "일본 최초의 컬러 필름 영화"라고 기록에 등재시켰지만 2003년에 모스크바의 러시아 국립 필름 보관소에서 "천인침"의 상영프린트 본이 발견된다. 이 때문에 다시 "일본 최초 컬러 영화" 타이틀을 바꾸기엔 뭐했던지 "일본 국산 컬러 필름" 문구를 끼워넣어 '일본 최초 장편 국산 컬러 필름 영화' 인 "카르멘, 고향으로 돌아오다"로 정리되었다. [5] 후지필름의 컬러 포지티브 필름을 사용했다. 또한 상영시스템 역시도 후지필름사에서 개발한 전용 영사기를 써야 했다. 덕분에 컬러 상영이 가능한 극장이 제한적이고 보급도 더뎌서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 영화는 촬영을 컬러로 하고나서 다시 흑백으로 촬영하는 이중프로세스로 만들어졌다. 가령 언덕위 장면을 촬영한다고 하면 첫번째 촬영에 컬러로 한번찍고 같은 자리 같은배경에서 똑같은 장면을 다시 흑백으로 촬영하는 식이다. 자세히 보면 주인공인 다카미네 히데코를 비롯해 출연진들의 연기가 컬러본, 흑백본이 조금씩 다르다. 컬러프린트,흑백프린트 둘다 감상한 평론가들은 2번째 촬영본인 흑백프린트에서의 배우들의 연기가 조금은 힘이 빠져 보인다는 평가가 있다. [6] 사실 하라 세츠코는 특이하게도 쇼치쿠(松竹)에서 배우생활을 시작했지만 1937년에 도호로 이적하고 1947년에 프리선언을 한다. 당시 일본 영화계에서 프리선언은 커녕 이적을 한다는 것 자체도 상상하기 힘들 정도이다. 프리선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배우가 엄청나게 유명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그만큼 하라 세츠코의 티켓팅 파워가 대단했다는 걸 방증하는 것일수도 있다. [7] 프리선언 이후 하라 세츠코 도호 쇼치쿠(松竹) 양대 영화사 눈치 보지않고 자유롭게 감독과 시나리오에 따라 출연했다. [8] 하라 세츠코만의 일은 아니었다. 당시 1946년은 일본 영화계를 넘어 일본 노동계를 강타한 도호 노동조합파업으로 시끌벅적한 해였는데 1946부터 1948년까지 3차례 걸쳐 도호에 소속된 영화인,스텝,관계자들이 파업을 일으킨 사건이다. 파업 참가 인원만 2500명이나 되었다. 특히 1948년도에 발생한 3차 파업은 규모가 꽤 커서 일본 경찰(당시엔 경시청 예비대)이 출동하는 것도 모자라서 일본에 주둔중인 미군 육군제1기병사단 소속 1개 소대와 장갑차,전차까지 동원해서 진압해야 했을 정도로 파업강도가 극심했다. 이때 하라 세츠코를 비롯한 다카미네 히데코, 야마네 스즈코, 덴지로 오우코치 등 당시의 끝발 날리던 도호 소속 영화배우들이 성명을 내고 "파업도 반대하지만 도호 사측에도 찬성하지 않는다. 독자적인 길을 가겠다!"며 도호와의 계약해지 및 탈퇴를 선언했다. 그때의 선언문에 가담한 10명의 배우들을 "10명의 깃발모임"이라 언론에서는 보도하며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이들은 도호 탈퇴 이후 신도호를 설립하여 5개로 회사로 나뉘어있던 일본영화업계를 6개로 재편되는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9] 쇼치쿠와의 결별은 쇼치쿠 경영진이 자초한 게 크다. 쇼치쿠는 "향의 향기" 이후 다음작품을 "전쟁터에서의 굳은 약속(가제)"로 정하고 기노시타에게 제작을 약속했지만 영화내용이 반전을 주제로 한 것이 경영진의 심기에 거슬렸다. 기노시타 감독 쯤 되면 쇼치쿠의 간판스타급 감독이며 기노시타는 구로사와처럼 제작비에 신경안쓰고 자기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하는 자유로운 영혼도 아니었다. 쇼치쿠와 30여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해오면서 한번도 쇼치쿠에 반기를 들지 않았던 기노시타에게 영화주제를 걸고 넘어지는 일은 분명 모욕으로 받아들여 졌을 것이다. [10] 한국으로 치면 기노시타 케이스케 프로덕션이 독점으로 MBC베스트극장 혹은 KBS TV문학관 같은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TBS채널을 통해 방송하는 것으로 비교할 수 있다. [11] 마츠야마 젠조 감독은 1955년 다카미네 히데코와 결혼했다. 당시 두사람의 결혼은 "기노시타 사단 출신 영화인의 만남"이란 제목으로 언론의 대서특필 된 바 있다. 이후로도 이 두사람은 기노시타 감독의 영화에 자주 관여하고 출연했다. [12] 해외에서 제대로 소개된 기노시타 영화는 블루레이로 나온 나라야마 부시코 24개의 눈동자 정도라 봐도 무방하다. 후술하겠지만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이 그나마 초기작들을 DVD 박스셋으로 내주는 등 약간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그렇게까지 적극적이진 않다. [13] 이 시기 쇼치쿠는 기노시타 뿐만이 아니라 오시마 나기사 시노다 마사히로, 요시다 요시시게 같은 쇼치쿠 소속 젊은 감독들도 대거 독립하던 시절이었다. [14] 1934년 도호영화사의 전신인 PCL로 이적하게 되는데, 이것 역시도 쇼치쿠의 삽질이 원인이 컸다. 사실 쇼치쿠 및 영화 평론계의 평가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과 맞먹을 만큼 나루세 감독의 활약도 대단했었다. 그러나 감독 승격이후 쇼치쿠 카마타 스튜디오의 불문율이었던 개인감독실도 내어주지 않고 조감독들과 같이 작업실을 쓰게 하고, 나루세 감독에게 약속한 극본들의 영화화도 몇번이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엎어지는 등 나루세와 쇼치쿠와의 불화는 계속되었다. 결국 신생영화사였던 PCL에서 러브콜을 받고 조감독이었던 야마모토 사츠오를 데리고 냉큼 이적하게 되어 이후 도호 영화사의 간판 감독으로 성장하게 된다. [15] 오즈 야스지로 감독 역시도 나루세 미키오과의 경쟁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나 나루세 감독을 응원하고 있던 것도 확실하다. 당시 쇼치쿠 카마타 스튜디오의 사장인 기도 시로(城戸四郎)는 "쇼치쿠엔 오즈 야스지로가 2명이나 필요없어"라며 대놓고 나루세 감독을 박하게 대했기 때문에 나중, 나루세 감독의 PCL로의 이적을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차라리 나루세에게 잘된 일이다. PCL에서 크게 성공할 것이다"라며 응원해 주었다고 [16]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역시도 선전영화 제작요구를 피해갈 수는 없었던지 1944년에 "가장 아름다운(一番美しく)" 이라는 전쟁선전영화를 제작한다. 영화의 배경은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정신대 소속 여성들의 이야기. 도호배급 [17] 마지막 장면에서 자살한 요시에(다카미네 히데코 연기)을 추모하는 노래를 다같이 부르는 장면은 죽은 시인의 사회의 '오 캡틴 나의 캡틴' 장면과 똑같은 설정으로 등장한다 [18] 같은해에 개봉했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7인의 사무라이 역시도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기노시타 감독의 이 두 작품에 눌려 아예 도호영화사가 마케팅을 체념했다는 후문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