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베를린 영화제 | ||||
은곰상 - 여우주연상 | ||||
제24회 ( 197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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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 197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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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 1976년) |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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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기누요 (산다칸 8번 창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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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드비가 바란스카 (밤낮) |
<colbgcolor=#151538><colcolor=#fff> 다나카 기누요
[ruby(田中, ruby=たなか)] [ruby(絹代, ruby=きぬよ)] | Kinuyo Tanak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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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9년 11월 29일 |
일본 제국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現 일본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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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7년 3월 21일 (향년 68세) |
일본 도쿄도 분쿄구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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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영화감독, 영화배우 |
활동 | 1924년 – 197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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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일본 여배우인 하라 세츠코, 다카미네 히데코와 함께 일본 국민여배우로 인정받는 일본 영화사를 대표하는 대배우이며 후기에는 감독으로도 활약했다. 2010년대 이후 영화 감독으로서의 면모가 재조명되는 추세다.1920년대 중반 일본 무성영화부터 1970년대 TV 드라마까지 그녀의 행보는 일본 영화계의 산증인이다. 쿠마이 케이 감독의 1974년작 <산다칸 8번 창관>을 통해 베를린 국제 영화제/은곰상 :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그녀의 오랜 커리어는 국제적인 권위의 영화제에서도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베를린 국제 영화제 수상의 기쁨도 잠시, 1977년 1월 뇌종양 확진을 받고 일본 도쿄도 분쿄구 소재 순천당대학 부속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3월 21일 사망했다.
인간의 조건의 감독인 고바야시 마사키의 사촌누나다. 마사키가 영화계에 입문한 것도 기누요 때문이었다고 한다.
2. 상세
1924년 14살의 나이로 쇼치쿠 영화사의 아역배우로 데뷔한다. 기누요의 가족은 시모노세키의 대지주로 기누요가 태어났을 땐 매우 부유했지만 기누요가 채 5살이 되기도 전 아버지가 사망하고 가세가 빠르게 기울기 시작하면서 가난으로 가족들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기누요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본전통악기인 비와를 배우면서 비와전문 가극단활동을 시작하는 등 음악적 재능도 보였다. 당시 어머니는 기누요를 비와소녀가극단에 입단시키면서 출세를 지원했으나 가극단이 당시 경기침체와 더불어 일본전통음악의 쇠퇴와 맞물려 해산을 당하자 결국 기누요의 뜻대로 영화계 활동을 허락한다. 당시 극단활동을 통해 어느정도 그녀의 재능을 눈여겨 본 쇼치쿠 관계자와 쇼치쿠에서 당시 직원으로 근무하던 기누요의 오빠의 주선으로 오디션을 보고 1924년 정식으로 쇼치쿠 전속 배우로 데뷔한다. 데뷔작은 1924년 노무라 호테이 감독의 “겐로쿠의 여자”다.
데뷔와 동시에 다나카 기누요는 1925년부터 다수의 조역역할을 맡아 맹활약했다. 그러다 시미즈 히로시 감독에게 발탁, 시미즈 감독의 작품에 매번 역할을 맡게 되며 점점 인지도를 넓혀간다. 1928년에만 16편의 쇼치쿠 작품에 준조연으로 출연하며 스타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마침내 1929년,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대학은 나왔지만(大學は出たけれど, 1929)”작품에 주연으로 캐스팅됨으로서 쇼치쿠 간부급 주연배우로 승격된다.[2] 오즈 감독의 이 작품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다나카 기누요는 1920년대를 마무리하는 일본 무성 영화 시대에 쇼치쿠의 간판 스타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어린시절 가난과 빈곤, 학창시절의 설움을 모두 뒤로한채 일본 최대 영화사의 간판 여배우가 된 것이다.
3. 필모그래피
3.1. 연출작
연도 | 제목 | 역할 | 비고 |
1953 |
연애편지 恋文 |
연출 | 장편 데뷔작 |
1955 |
가슴이여 영원히 乳房よ永遠なれ |
연출 | |
1955 |
달이 떠오른다 月は上りぬ |
연출 | |
1960 |
방랑하는 왕비 流転の王妃 |
연출 | |
1961 |
여자들만의 밤 女ばかりの夜 |
연출 | |
1962 |
오긴 お吟さま |
연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