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내란 | 주도 세력 |
왕규의 난 | <colbgcolor=#ffffff,#670000> 왕규 | |
김훈 최질의 난 | 김훈, 최질 | |
이자의의 난 | 이자의 | |
이자겸, 척준경 암살 미수 사건 | 인종, 지녹연, 안보린 | |
이자겸의 난 | 이자겸 | |
묘청의 난 | 묘청 | |
김보당의 난 | 김보당 | |
이고의 난 | 이고 | |
조위총의 난 | 조위총 | |
망이 망소이의 난 | 망이 , 망소이 | |
관노비의 난 | 죽동 | |
동경민란 | 이의민 | |
김사미 효심의 난 | 김사미, 효심 | |
이비 패좌의 난 | 이비, 패좌 | |
만적의 난 | 만적 | |
수창궁 사변 | 희종 | |
최광수의 난 | 최광수 | |
이연년 형제의 난 | 이연년 | |
삼별초의 난 | 삼별초 | |
정세운 암살 사건 | 김용, 안우, 이방실 | |
흥왕사의 변 | 김용, 기황후 | |
김저의 난 | 김저 | }}}}}}}}} |
1. 개요
전주 관노비의 난 / 죽동의 난1182년 전주에서 군사들과 관노들이 일으킨 난이다.
괸노들이 일으켰으나 당시 지방관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도 참여 하며 규모가 커지기도 했다.
2. 상세
고려의 명종 12년, 전주의 지방관이었던 진대유(陳大有)는 자신은 강직하다고 백성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려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나라에서 배를 만들어 보내달라 요청했을때 진대유는 상호장(上戶長) 이택민(李澤民)과 함깨 백성들에게 일을 빨리 하라고 재촉하였다.그러자 주현군의 우두머리중 죽동 외 6명이 관노에 큰 불만을 가져 봉기를 일으켰다.
죽동은 진대유를 산에 있는 절로 쫒아냈고, 이택민 등 지방관들의 집에 불을 질렀고 판관 고효승(高孝升)을 협박하여 지방관을 바꾸었다.
일이 생긴것을 알아차린 안찰사는 박유보(朴惟甫) 파견시켰는데 박유보가 진주에 오자 관노들은 잠시 군세들 가담듬고 박유보에게 진대유의 만행을 말하였다.
박유보는 진대유를 개경으로 압송하고 반란군에게 멈추라고 하였으나 관도들은 듣지 않아 군대를 동원 했지만 40일째 제압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관노들의 내부분열이 생겨 관노들끼리 서로를 죽여 알아서 제압된 것이다. 그 이후 남아있는 관노들도 모두 처형되어 이 봉기는 끝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