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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9:12:07

고수선

파일:고수선.jpg
성명 고수선(高守善)
생몰 1898년 8월 8일 ~ 1989년 8월 11일
출생지 전라남도 대정현 가파리
사망지 제주도 서귀포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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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고수선은 1898년 8월 8일 전라남도 대정현 가파리에서 부친 고석조와 모친 오영원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교육열이 높아 딸이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줬고, 그녀는 이 덕분에 집에서 10리 떨어진 야학에 다녔으며 대정공립보통학교와 신성여학교를 졸업했다. 또한 그녀는 강평국, 최정숙과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냈고 함께 서울로 유학가서 공부하기로 약속했다. 1915년 서울로 상경한 고수선은 1918년까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일본 교사가 조선인 학생들을 차별대우하는 것에 반감을 가져 배척 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이 발발했을 때 박희도의 지시에 따라 학생을 동원, 인솔하여 탑골공원으로 가서 시위에 참여했다.

이어 유철향 집 지하실에서 신경우 등 동지 학생들과 모여 조국에 대한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붉은댕기를 수천 개 만들어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통하여 각 학교에 배포했으며, 신경우ㆍ김숙정과 항일 벽보를 붙이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3월 중순에는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했고, 군자금 모집 임무를 맡아 1919년 11월에 귀국해 370원을 모급하여 박정식을 통해 상하이로 송금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간주되어 감시를 받게 되자, 그녀는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장두철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요시오카의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921년 도쿄 우에노공원에서 동지 이덕요, 이낙도, 이의향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모의했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고 중거불충분으로 겨우 풀려난 뒤 귀국했다.

1922년 항일용의자로 지목되어 고광수(高光洙)와 함께 체포되어 경찰에게 가혹한 고문을 받아 손가락이 불구가 되었다. 그녀는 후에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놓고 손을 비틀었던 고문이 가장 참기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그녀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해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된 뒤 역시 의사인 김태민과 결혼하고 조천, 한림, 서귀포, 고산 등지에서 환자들을 진료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충청남도 강경읍으로 옮겼다가 1.4 후퇴 때 다시 제주도로 귀향한 뒤 의사 생활을 접고 사회복지활동을 펼쳤다. 전쟁고아들을 거두고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 강습소 제주모자원을 설립한 이래 1951년엔 송죽보육원을 설립했다.

고수선은 1969년에 어린이집의 시초인 선덕어린이집을 설립, 운영했으며, 말년에는 제주도 노인회를 설립해 노인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섰고, 1978년 용신 봉사상, 1980년 제1회 만덕 봉사상[1]을 수상했다. 1989년 8월 11일 서귀포시에서 병사했다.

그녀가 살던 제주도 자택 터는 본래 조선시대 제주목 관아의 부속건물인 운주당의 건물 터임이 확인되어 유구가 복원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고수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5년에 그녀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후에 경제인 부문이 신설되어 김만덕 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