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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의 주요 유적인 요릉 (요왕묘)
1. 개요
鄄城영어 Juancheng
산둥성 허쩌시의 현. 황하 남안의 평지에 위치하며, 인구는 약 75만명이다. 삼국지에서 연주자사부이자 조조의 초기 거점으로 등장하는 견성 (鄄城)으로, 남북조 ~ 원대까지 복양군 (濮陽郡) 및 복주 (濮州)의 치소로 중시되었다. 약 천년 가까이 북쪽 10km 지점의 주청진 (旧城镇)이 복주의 중심지였다가, 명대에 황하 건너편의 복현 (현 푸양현)으로 이전되며 견성현이 폐지되는 등 쇠퇴하였다. 그러다 1930년대, 현 시가지에 견성현이 재설치되어 현재에 이른다.
출신 인물로 3황 5제 중 제요[1], 전국시대의 명장 손빈, 조위의 관료 오질과 왕관, 전인대 상무부위원장 및 산둥성장을 지낸 리젠궈 등이 있다. 동쪽 10km 지점의 손빈묘 (孙膑墓) 및 기념관, 서남쪽 10km 지점의 요왕묘 (尧王墓) 등의 유적이 있다. 동북쪽 20km 지점의 옛 늠구현 자리인 지산진에는 손빈여행성 (孙膑旅游城)이 있다.
2. 역사
손빈묘
좌전에 의하면 순임금이 시가지 동남쪽 10km 지점의 역산 (歷山)에서 거주했다 한다. 춘추시대 무렵 남쪽에는 수읍 (垂邑)과 그를 이은 수도 (垂都), 동남쪽에는 성나라 (郕)를 계승한 성양 (成陽), 남쪽에는 늠구 (廪邱)가 있었다. 전국시대에는 노나라를 거쳐 제나라 시기 견읍 (鄄邑)이 세워졌고, 그곳에서 손빈이 출생하였다.
2.1. 고대
진나라 시기에 견읍은 견성 (鄄城)으로 개칭되어 황하 북안의 현 푸양현인 복양 (濮陽)[2]을 중심으로 한 동군 (東郡)에 속했다. 전한 시기에는 연주 (兗州) 제음군 (濟陰郡) 산하 견성현 (甄城縣)이 설치되었다. 견성은 시가지의 북쪽 10km 지점의 현 주청진에 있었고, 시가지 동북쪽 20km 지점의 쉬가이촌에 늠구현 (廩丘縣)이 설치되어 동군에 속했다. 신나라 시기 견성현은 견량현 (甄良縣)으로 개칭되었다가 후한 대에 기존으로 환원되었다. 한편 후한 시기 늠구현이 견성이 속한 제음군으로 이관되었다.194년, 조조의 서주 원정을 틈타 여포가 연주 정복을 시도할 때에 순욱이 견성을 중심으로 범현 (현 량산현), 동아현 (현 양구현)을 사수하며 반격의 기반을 놓았다. 이듬해 여포를 몰아내고 정식으로 연주목에 오른 조조는 기존의 창읍현[3] 대신 충성심이 강한 견성을 연주자사부로 삼았다. 관도대전 기간인 200년경 견성현은 제음군에서 동군으로 이관되었고, 204년 연주자사부도 늠구현으로 이전되었다. 다만 동남쪽 20km 지점의 성양현 (成陽縣)은 그대로 제음군에 남았다.
2.2. 위진 시기
조위 건국 후 221년, 조조의 아들 조식이 견성후 (鄄城侯)에 봉해졌고 이듬해 견성왕 (鄄城王)으로 승격되었다. 223년 조식이 옹구왕으로 이전된 후, 226년 조조의 다른 아들 조림이 견성왕이 되었다가 232년 패왕으로 전임되었다. 264년 조식의 아들 조지가 견성현후로 봉해졌고, 265년에는 조조의 손자 조흡이 늠구현공에 봉해졌다.서진 시기인 277년, 동군은 사마염의 아들 사마윤이 봉해지며 복양국 (濮陽國)으로 개편되었다. 289년 사마윤이 회남왕으로 이전되며 동군으로 환원되었다가, 301년 사마륜이 제위를 찬탈하며 1살배기 황태손 사마장을 복양왕에 봉하였다.[4] 다만 같은해 사마장과 사마륜 모두 사망하며 복양국이 폐지되었고, 이후 복양군 (濮陽郡)으로 개편되었다. 그 치소는 황하 북안의 복양현이었고, 연주자사부는 계속 늠구현에 있었다.
2.3. 남북조 시기의 전장
5호 16국기에 복양군은 주요 전장 중 하나였다. 전조(호한)의 유총은 315년 복양현, 이듬해에는 황하를 건너 견성현을 함락하였다. 319년, 석륵이 복양군을 포함한 연주 일대를 석권하여 후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325, 남조의 동진은 복양 일대의 피난민들을 현 전장시 일대에 수용하고 남연주 (南兗州) 산하의 남복양군 (南濮陽郡)을 두었다. 350년, 후조의 멸망 후 잠깐 염위에 속했다가 352년 은호의 북벌군이 다가오자 늠구의 악홍이 투항하여 동진령이 되었다. 다만 358년에 전연, 370년에 전진이 일대를 정복했다.비수대전 후 384년, 북벌에 나선 사현이 부관 유뢰지를 파견하자 연주자사 장숭이 견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이후 유뢰지가 견성에 주둔하니, 연주 지역이 전부 항복하여 동진령이 되었다. 386년 본래 동진에 복속했던 정령부 족장 적료가 여양 태수 등념을 배신, 견성에서 그를 사로잡고 자립하였다. 적료는 388년, 활대 (현 화현)를 수도로 삼아 적위 (翟魏)를 건국했다. 390년, 유뢰지가 적료를 격파하여 견성을 회복하였다. 392년 적위는 후연의 모용수에게 정복되었다. 이후 모용수는 394년, 늠구에서 동진군을 격파하고 연주를 정복하였다. 이후 복양군은 연주에서 서주 (徐州)로 이관되었다.
398년 복양군은 북위에 정복되었고, 401년 연주로 환원되었다. 416년, 북벌에 나선 유유가 복양군을 점령하여 북연주 (北兗州)에 편성했다가 420년 연주로 개칭하였다. 이때 복양군의 치소는 최전방이 된 복양현 대신 견성현으로 이전되었다. 435년에는 늠구현이 견성현에 병합되었다. 467년, 북위가 연주 전역을 정복하며 복양현은 현 허쩌시를 기반으로 한 서연주 (西兗州)에 소속되었다. 전란기 동안 폐지되었던 견성현은 477년에야 늠구현과 함께 재설치되었다.
이후 복양군은 487년 제주 (齊州)로 이관되었다가, 527년 제음군과 함께 재설치된 서연주에 속하였다. 동위 성립 직후인 534년, 복양군은 사주 (司州)로 이관되었고 4개[5] 현을 거느렸다. 북제 시기인 556년, 황하 북안에 서복양현 (西濮陽縣)이 신설되었고 560년에는 늠구현의 동부가 청택현 (清澤縣)으로 자립해 제주로 이관되었다. 577년, 북제를 멸한 북주는 복양군의 치소를 견성현으로 고정시키고 노주 (魯州)로 이관시켰다.
2.4. 수당 시기
수나라 건국 직후인 581년, 복양군이 폐지되고 일대는 동평군 (東平郡)으로 이관되었다. 그러다 596년, 동평군에 남은 늠구현을 제외하고 5개[6] 현이 복주 (濮州)로 편성되었다. 606년, 복주가 폐지되어 다시 동평군에 속했고 그 후신인 운주 (鄆州)에도 잠깐 소속되었다.[7] 당나라 시기인 621년, 하남도 (河南道) 산하에 복주가 재설치되며 견성현은 다시금 그 치소가 되었다. 625년, 영정현을 견성현에 병합시켰다.[8] 742년 복주는 복양군이 되었다가 758년 환원되었다.후량 시기 복주는 의성군절도사 (義成軍節度使)의 관할이었고, 후당 시기부터는 천평군절도사 (天平軍節度使)에 속하였다. 918년에는 견성현 서북쪽의 황하 연안에서 사타족의 진나라 ( 후당의 전신)와 후량 간의 호류파 전투가 벌어졌다. 후진 시기인 939년, 복양현 등 황하 북안 지역은 복주에서 전주 (澶州)로 이관되었다.[9]
2.5. 중근세
북송 시기 복주는 경동동로(京東西路)에, 금나라 시기에는 산동서로 (山東西路)에 이어 대명부 (大明府)에 속했다. 1154년, 인근 임복현과 뇌택현이 견성현에 병합되었다. 원나라 시기 복주는 동평로 (東平路)에 소속되었고, 1268년 중서성 (中书省)에 직속되었다. 1339년에는 중서성 제녕로 (济寧路)에 속했다.명나라 건국 직후인 1369년, 견성현이 폐지되어 복주에 직할되었고 천호 (千户)가 설치되었다. 동시에 복주는 산동승선포정사사 (山東承宣布政使司) 휘하의 현 랴오청시인 동창부 (東昌府)에 소속되었다. 1451년, 황하의 잦은 범람으로 복주의 치소는 기존의 견성에서 황하 건너편의 현 판현의 푸청진로 이전되었다.
청나라 시기에 산동성 동창부 복주에 속하다가, 1730년 산동성의 직예주가 되었다. 다만 1735년 재차 산주 (개별주)가 되어 조주부 (曹州府)에 속했다. 1905년에는 조제도 (曹齊道) 조주부에 속했다.
2.6. 근현대
신해혁명 후 복주가 폐지되며 복현 (濮縣)에 속했다. 1931년, 복견분치 (濮鄄分治)가 이루어지며 복현의 황하 남안 지역에 5세기만에 견성현이 재설치되었다. 다만 1936년에 재차 복현에 병합되어 산동 제12행정독찰구 (랴오청)에 속했다가 1938년 제16행정독찰구 (허쩌)로 이관되었다.중일전쟁기인 1940년, 견성항일현정부가 설립되어 노서 제2전구에 속했다가 이듬해 진기노예변구 제17전서에 속했다. 1944년에는 기노예 제8전서, 1946년에 기노예 제2전서에 속했고 1948년 7월 인민해방군이 견성에 진주했다. 1949년 쥐안청현은 핑위안성 허쩌지구에 편성되었다가 1952년 핑위언성 폐지 후 산둥성으로 돌아갔다.
1958년에는 지닝전구에 속했다가 이듬해 허쩌전구로 돌아갔다. 한편 황하 북안에 남은 푸현은 1956년 폐지되어 판현에 병합되었다. 1967년 ~ 1978년에는 문화대혁명을 겪었고, 2000년 허쩌시에 편성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1]
제음군에 해당하는 도 (陶) 지역 출신. 허쩌시 일대인데, 견성현에 그의 무덤이 있어 유력하다고.
[2]
옛 위나라 (衛)의 수도로, 기원전 241년 동군의 치소로 설치되었다. 위나라 왕실은 야왕현으로 이주되었다
[3]
현 쥐예현 남쪽 50km 지점, 산양군 소속
[4]
사마장 (司馬臧). 사마염의 증손이자 사마휼의 아들. 사마륜에게는 현손 뻘이었다...
[5]
廩丘, 濮陽, 城陽, 鄄城
[6]
鄄城縣、濮陽縣、范縣、雷澤縣、臨濮縣
[7]
한편 같은해 늠구현은 운성현에 병합되었다
[8]
당현종의 재상
두섬이 복주 복양현 출신이었다.
[9]
이후 복양현에서는
시종훈이 태어나고
전연지맹이 맺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