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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21:42:36

강화 곤릉

{{{#!wiki style="margin: -15px -10px -15px"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colbgcolor=#315288> 강화 곤릉
江華 坤陵
Golleung Royal Tomb, Ganghwa
소재지 <colbgcolor=#fff,#1f2023>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75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고려시대
수량/면적 96,260㎡
지정일 1992년 3월 10일
시대 고려 고종[1]
소유단체 산림청
관리단체 강화군 }}}
파일:강화 곤릉 전경1.jpg
강화 곤릉[2]
1. 개요2. 상세3. 구조

1. 개요

고려 제24대 국왕 강종의 제2비 원덕태후 유씨가 안장된 왕릉.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위치하고 있다.

2. 상세

원덕태후는 고종의 어머니로 강종 1년(1212)에 왕비가 되고 연덕궁주에 봉해졌다. 이후 원덕태후로 추존되고 1253년에 정강의 시호가 더해졌다는 고려사 기록이 존재하는데, 정확한 사망 시기가 확인되지 않아 조성 연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학계에서는 1239년(고종 26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시간이 흐르고 왕조가 바뀌며 두 번의 이 온 국토를 휩쓰는 동안 존재가 잊혀졌다가, 현종 5년(1664년) 강화유수로 재직하던 조복양(趙復陽)[3] 현종의 명을 받아 보수하였다. 이후 관원들이 해마다 순찰을 돌며 능역을 관리하였고, 고종 4년(1867년) 위치가 확인된 고려왕릉 전체를 일시에 정비하면서 '고려원덕왕후곤릉(高麗元德王后坤陵)'이라 적힌 표석이 세워졌다.

현재의 모습은 1974년 무너진 봉분을 보수한 이래 2004년 발굴조사 및 정비를 거쳐 완성되었다.

1992년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4]

고려 고종 홍릉, 고려 희종 석릉, 고려 원종 제1비 순경태후의 가릉과 함께 남한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고려왕릉 중 하나이다.

3. 구조

파일:곤릉 발굴 전경 (1).jpg
발굴조사 당시 촬영된 곤릉의 능역[5]
곤릉은 전통적인 고려왕릉의 석축구조인 3단 구조를 따르고 있다. 최상단인 1단에는 봉분과 석실이 자리하고 있으며, 봉분의 뒤쪽으로 야트막한 잉(孕)[6]이 조성되어 있다. 원래는 봉분 주위를 두르는 곡장이 '⊓'모양으로 설치되어 있었으나 발굴조사 과정에서 1974년 보수공사 당시 임의로 설치된 것이라 판단되어 없어졌다.

파일:곤릉 석실 입구 모습.jpg
파일:곤릉 석실내부 모습.jpg
석실 입구와 내부 모습[7]
석실은 길이 310cm, 너비 250cm, 높이 220cm 규모의 단실구조로 지하에 조성되었다. 벽면은 부정형 할석의 면을 고르게 하여 8단 이상 쌓아올렸으며 천장은 커다란 판석 3매를 덮어 마무리하였다.[8]천장의 상부에는 8각으로 병풍석을 두르고 봉분을 쌓아올렸는데, 이 8각 병풍석은 현재까지 석릉과 곤릉에서만 확인된 독특한 양식이다.[9]

석실 바닥에는 길이 30cm의 전돌을 깔아 포장하였으며, 가운데에 4개의 장대석을 조립한 관대를 마련하였다.[10] 입구는 문지방석과 문기둥석을 세워 조성한 다음 커다란 판석 1매를 세워 폐쇄하고 지지석 2개를 괴어 보강하였다.

파일:강화 곤릉_비석.jpg
파일:곤릉석인상머리.jpg
표석과 석인상 머리[11]
2단에는 동서 1,030cm, 남북 5,240cm의 정면 3칸 규모로 추정되는 정전이 확인되었다. 주변 바닥에는 전돌이 넓게 깔려 있는 것 또한 확인되었다. 정전 아래에는 동서 12m, 남북 1,010cm 규모로 쌓은 축대 위에 동서 740cm, 남북 880cm 규모로 건물이 건설된 흔적이 확인되었다. 하단 건물지인 배전은 정전과 '丁'자형으로 연결되어 전체적으로 정자각(丁字閣)의 형태임이 밝혀졌다.

그 외에 고종 때 제작된 '고려원덕왕후곤릉(高慮元德王后坤陵)' 표석이 세워져있다.

파일:20. 청자사자삼족향로.jpg
파일:곤릉 귀목문 암수막새.jpg
곤릉에서 출토된 유물들[12]
석실의 입구에선 제례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청자 8점이 발견되었다. 이 밖에 당송시대 동전과 금동 장식품, 구슬, 동곳 등이 다수 출토되었으며, 주변에서는 암수막새와 함께 왕릉 주변을 지키던 석인상의 머리 3기, 석양 1점 등 다량의 석재 유물이 출토되었다.



[1] 정확한 조성 시기가 확인되지 않는다. [2]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3] 형조판서,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한 조선 후기의 문신. 강화도 내 잔존 고려왕릉 전체의 관리가 이 사람 대부터 시작되었다. [4] 지정 당시 사적 제371호. 현재는 번호를 매기는 것이 문화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다는 이유로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는다. [5]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6] 주산으로부터 내려온 좋은 기운을 능침에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하는 언덕. [7]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8] 이때 벽면과 천장 전체에 회칠을 하였으나 현재는 흔적만 남아있다. [9] 일반적인 고려왕릉은 12각으로 병풍석을 둘렀다. [10] 관대 내부에서 전돌 1매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관대 내부 또한 전돌을 깔아 포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1]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12]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