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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23 15:03:02

가이우스 폰티우스

이름 가이우스 폰티우스
(Gaius Pontius)
출생 미상
사망 기원전 292년?
직위 삼니움 지휘관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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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니움 장군. 카우디움 협곡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굴욕을 안긴 인물이다.

2. 행적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기원전 321년 로마군에 연전연패한 삼니움인들은 자신들을 완전히 정복하려는 로마에 맞서 싸우기 위해 그를 지휘관으로 삼았다. 그는 정면승부로는 로마군을 절대로 이길 수 없으니 유인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먼저 10명 가량의 삼니움 병사들을 양치기로 변장시킨 뒤 일부러 로마군의 진군로 주변에 양을 방목하게 했다. 로마군이 평범한 양치기로 여기고 불러다가 삼니움인들의 동향을 묻자, 그들은 삼니움인들이 로마와 동맹을 맺은 아풀리아의 루케리아를 포위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에 두 집정관은 서둘러 루케리아로 가서 삼니움족을 완벽하게 섬멸하기로 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2개의 도로가 아펜니노 산맥에서 루케리아로 이어졌다. 아드리아 해를 따라 있는 첫번째 도로는 평평하고 장애물이 없었지만 멀리 돌아서 가야 했기에 루케리아까지 가는 데 많은 시간이 들었다. 카우디움 협곡을 통과하는 산길은 훨씬 짧아서 빠른 시일에 루케리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길은 두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좁고 산악지대가 끊임없이 펼쳐졌다. 좁은 산길을 가다보면 중간에 풀이 무성하고 물이 잘 공급되는 평원을 만날 수 있었지만, 평원을 통과하면 루케리아에 이르기까지 좁고 험준한 길을 가야 했다고 한다.

삼니움으로 쳐들어간 두 집정관 티투스 베투리우스 칼비누스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 카우디누스는 적이 도망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카우디움 협곡을 통과하는 산길로 가기로 했다. 로마군은 몇 시간 동안 좁은 길을 강행군한 끝에 평원에 이르렀다. 평원에 숙영지를 세워서 휴식을 취한 뒤 행군을 재개했지만, 두번째 산길을 지나가던 중에 바위 덩어리와 도끼에 베인 나무 줄기로 앞길이 완전히 막혀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때 삼니움인들이 협곡 위의 언덕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로마군은 그제야 함정에 걸렸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돌아가려 했지만, 첫번째 산길마저 막혔다는 것을 곧 확인했다. 그리하여 로마군은 협곡에 갇힌 채 훨씬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적에게 둘러싸여 궤멸될 위기에 몰렸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폰티우스는 수많은 로마군을 협곡에 가둬버리는 작전이 성공한 것에 무척 흥분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을 어찌 처리해야 할지 선뜻 판단하지 못했다. 공격을 시작한다면 궁지에 몰린 저들이 저항을 심하게 해서 막심한 피해를 볼 게 자명했고, 그대로 굶겨죽이자니 언제 끝날 지 기약하기 어렵고 또다른 로마군이 구원하러 달려올 수도 있었다. 이에 삼니움인 중 가장 현명하다는 평을 받던 아버지 헤렌니우스 폰티우스에게 조언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헤렌니우스는 아래와 같이 답했다.
"그들 전원을 정중하게 대접한 후 로마로 살려보내라."

삼니움인들이 "어떻게 잡은 적병들인데 그냥 돌려보내느냐?"며 반발하자, 폰티우스는 아버지에게 재차 서신을 보내 다른 방안은 없냐고 물었다. 그러자 헤렌니우스는 이렇게 답했다.
"그들을 모두 죽여라."

폰티우스는 아까는 모두 살려보내라고 해놓고 이제는 다 죽이라고 하는 아버지의 권고를 이상하게 여기고, 아버지를 전장으로 모셔오게 한 뒤 어찌된 영문이냐고 물었다. 이에 헤렌니우스가 답했다.
"우리가 저들을 잘 대접해서 돌려보낸다면, 저들은 우리가 베푼 선행에 감동할 것이며, 우리는 매우 강력한 국가와 평화와 우호를 확립할 것이다. 반면에 저들을 모두 죽인다면, 로마는 두 집정관의 군대를 전부 잃어버렸으니 힘을 회복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여러 세대 동안 전쟁을 미뤄야 할 것이다."

폰티우스는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고심하다가 재차 물었다.
"둘 중 하나를 택하지 않고 중간의 길을 택하는 건 어떻습니까? 삼니움은 마땅히 받아야 할 승리를 받을 것이며, 로마인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패배를 받을 겁니다."

헤렌니우스가 눈에 띄게 화를 내며 답했다.
"그것은 친구를 구하지도 않고 적을 제거하지도 않는 짓이다. 로마인들은 패배하더라도 가만히 있을 줄 모르는 자들이다."

그러나 폰티우스는 아버지의 충고를 듣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곧 전령을 로마군에 보내 자신의 뜻을 전했다. 로마군은 프레겔라스를 비롯한 삼니움의 영역에 세워진 모든 식민도시에서 철수해야 하며, 병사들은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튜니카만 입은 채 멍에[1] 아래로 기어가라는 것이었다. 두 집정관은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고, 로마 장병들은 삼니움 전사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멍에 아래를 통과해야 했다. 이를 거부한 로마 병사들은 가차없이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로마군은 카우디움에서 맺은 협약을 준수하겠다고 보장하기 위해 장교 및 재무관들, 600명의 기병들을 인질로 넘겼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원로원은 폰티우스와 협약을 맺은 두 집정관을 삼니움인들에게 넘기며 협약이 파기되었다고 밝혔다. 폰티우스는 그들의 인도가 위장된 것이라고 판단해 받아들이길 거부했고, 두 집정관은 로마로 귀환했다. 그 후 재개된 전쟁에서 로마군이 승기를 잡았고, 기원전 318년에 삼니움족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2년 휴전을 맺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리비우스는 다른 사료에서는 로마군이 카우디움에서 맺어진 협약을 존중했다는 내용이 있다고 밝혔고, 에드워드 토고 살몬은 로마군이 기원전 316년에 적대 행위가 재개될 때까지 카우디눔 평화 협약을 존중했으며 기원전 321년과 기원전 316년 사이의 로마와 삼니움의 전쟁은 리비우스가 순전히 꾸며낸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현대 학계에서는 로마가 카우디눔에서 맺은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전쟁을 곧바로 재개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며 확답을 내리지 않고 있다.

리비우스의 역사서를 요약한 페리오케(Periochae)에 따르면, 폰티우스는 기원전 292년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구르게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사로잡힌 뒤 개선식에 끌려나와 참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리비우스가 로마에게 굴욕을 안겨준 폰티우스가 개선식에서 처단되었다는 이야기를 꾸며내어 로마 독자들에게 쾌감을 안겨주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이고, 폰티우스는 그 전에 죽었을 거라고 추정한다.


[1] 리비우스는 의 멍에였다고 밝혔고, 아피아노스는 창을 멍에로 사용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