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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07:02:50

가나가와 부모 살인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사건 경위3. 범행에 이르기까지4. 재판5. 쟁점6. 기타

1. 개요

神奈川金属バット両親殺害事件[1]

1980년 일본에서 발생한 존속살인 사건.

2. 사건 경위

1980년 11월 29일 새벽 2시경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 타카츠구의 주택에서 40대의 부부가 살해당한 채 발견되었다. 피해자들은 모두 둔기에 머리를 맞아 숨졌고 천장이 피투성이었으며 피해자들의 두개골이 산산조각났고 특히 부인의 시신은 뇌수까지 사건 현장 일대에 튀어 있는 끔찍한 상태였다. 이것 때문에 수사하던 경찰들도 경악할 정도였다.

당초 경찰에는 강도 사건으로 신고가 접수되었으나 사건 발생 다음날인 11월 30일 범인이 체포되었는데 정체는 피해자 부부의 차남인 재수생 이치류 노부야(一柳展也, 당시 20세)[2]였다.

이치류는 범행 직후 흉기로 사용한 금속 배트의 피를 씻어내고 피가 묻은 옷을 숨기는 등 증거를 은닉한 뒤 날이 밝은 후 경찰에 신고하면서 집에 강도가 들어와 부모를 살해했다고 증언했지만 범행 다음 날 이치류의 행실을 수상하게 여긴 친척의 추궁 끝에 자신이 진범이라고 시인했으며 친척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치류는 경찰 조사에서 범행 일체를 인정하고 범행 동기를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3. 범행에 이르기까지

이치류 노부야의 부친은 도쿄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후 아사히 글래스[3] 도쿄지점에서 근무했으며 모친은 야마구치현의 유명 주가(酒家)의 딸이었고 형도 와세다대학 공학부를 졸업하고 상장기업에 입사한 엘리트 집안이었다. 모친의 증언에 따르면 어릴 때부터 야구에 재능이 있었고 이른바 '손이 안 가는 아이'였다고 한다.

이치류는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성적을 유지했으나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성적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이치류가 자신이 진학한 사립 카이죠 고등학교[4]에 대해 '수준 낮은 학교'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것도 한 원인으로 추측되고 있다.[5] 이치류는 197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을 비롯해 조치대학, 주오대학, 세이조대학, 메이지가쿠인대학[6] 등의 사립대학 수험에 응시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이 예비교[7]에 다녔지만 성적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이듬해인 1980년 와세다, 릿쿄대학, 니혼대학, 호세이대학에 응시했으나 이마저도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엄격한 성격이었던 부친은 그에게 대학 입시를 포기하라며 질책했으나 형과 모친이 부친을 겨우 설득해서 재수를 허락받았다. 이 무렵부터 이치류의 심리적 부담은 점점 심해졌고 여기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해 술에 절어 지내거나 부친의 현금카드를 훔쳐 돈을 인출해서 영화관이나 파칭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이 점점 늘어갔다.[8]

사건 발생 전날인 11월 28일 밤 11시경 술에 취해 귀가한 부친은 이치류가 자신의 현금카드를 훔쳐 돈을 인출한 사실을 알고 격분하여 2층 방에서 술을 마시던 이치류에게 "대학 한 군데도 제대로 붙지 못하는 주제에 이게 무슨 꼬라지냐. 너 같은 도둑놈은 집에 둘 수 없으니 나가라."며 그를 심하게 꾸짖고 걷어차기까지 했으며 그동안 이치류의 편을 들어 주던 모친도 실망하여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부모의 태도에 큰 상처를 받은 이치류는 결국 무서운 선택을 하고 말았다. 약 3시간 후 이치류는 집에 있던 위스키 반 병을 마신 다음 만취한 상태로 평소에 애용하던 금속 배트를 가지고 부모의 방으로 가서 잠을 자던 부모를 금속 배트로 내려쳐 잔인하게 살해했다.

4. 재판

1984년 4월 25일 요코하마 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검찰 측은 징역 18년을 구형했지만 재판부는 부모의 꾸지람이 범행 동기가 된 것은 기본적으로 피고인의 잘못임을 인정하면서도 피고인에게 전과나 비행 이력이 없고 선천적으로 정신적인 발달장애[9]가 있음에 더해 사건 당시 음주로 사리판단 능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벌어진 우발적 범행이라는 점, 체포된 후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했다는 점에서 갱생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하여 징역 13년으로 감형했다. 피고 측은 항소하지 않아 그대로 유죄가 확정되었고 이치류 노부야는 치바 형무소에서 13년 동안 복역한 후 1997년에 만기출소했다.

교도관의 증언에 따으면 교도소에서 복역할 때 이치류는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야구방망이로 살인을 저질러서 교도소로 들어갔는데 운동 시간에 막대기로 야구 연습을 자주 한 점 때문에 다른 수감자들에게선 경계의 대상이 되어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10] 현재 이치류 노부야의 근황은 알 수 없지만 그가 지인을 통해 쓴 일기를 주었고 지인이 이를 밝혔는데 일기에 따르면 저지른 범죄로 인해 심적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으며 사건이 발생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자신의 범죄를 크게 후회한다고 한다.

5. 쟁점

이 사건으로 인해 범인의 형과 유족들이 큰 충격을 받았으며 당시 일본 전역에 큰 충격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한편으로는 당시 일본에서 사회문제로도 비화되었던 입시 전쟁에서 촉발되었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이치류의 학력 컴플렉스, 즉 명문대학 출신의 부친과 형에 대한 열등감과 가족 간의 소통 부재가 원인이라는 견해도 있으며 대입 수험에 따르는 열등감과 정신적인 한계에서 오는 무력감을 범행 동기로 보는 해석도 있다.

한편으로는 위에 언급된 사항들은 사건과 전혀 무관하며 그 외의 심각한 문제가 관련되어 있다는 설도 있었다. 일부 언론인은 이 사건에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모자간의 근친상간이 얽혀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으나 너무 극단적인 분석이었던 만큼 이 설은 큰 설득력을 얻지 못했고 현재로서는 학력 컴플렉스와 입시에 대한 중압감을 사건의 근본 원인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특히 자녀가 아무리 잘못을 해도 자녀한테 화를 인격적으로 내야 하고 나중에 사과도 함께 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고 감정적으로만 하다가 이에 미안하기보다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자식이 결국엔 부모를 살해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결국 부모가 말 한 마디를 잘못 하여 자식한테 비참하게 살해되어 가정이 파멸해 버린 것이다.

6. 기타


[1] 카나가와 금속 배트 부모 살해사건 [2] 1960년생. [3] 現 AGC 주식회사. 아사히 글래스는 2018년까지 사용된 사명이다. [4] 2011년부로 완전히 중고일관제로 전환했다. [5] 중학교 시절에는 도쿄대학 합격률 톱을 자랑하는 도립 히비야 고등학교 진학의 등용문으로 알려진 명문 중학교에 다녔고 고등학교 입시에서 형이 다녔던 와세다대학 부속고등학교와 게이오기주쿠대학 부속고등학교에 응시했으나 실패하고 사립 카이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이치류의 인식과는 달리 카이죠 고등학교도 도쿄 도내에서 손꼽히는 명문 고등학교로 경쟁률이 결코 낮지는 않은 곳이었다. [6] 1863년 창립된 기독교 대학으로 메이지대학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별개의 학교다. [7] 한국의 입시학원에 해당한다. [8] 이 시기 이치류는 예비교에는 한 달에 약 7일 정도밖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정도면 정신질환이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9] 정신감정 결과 밝혀졌다. [10] 교도소에서 같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다른 수감자들이 싫어하고 경계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들이 교도소에서 똑같은 범죄를 저지른 사례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