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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mlin |
AMC Gremlin
1. 개요
Why is it when the other car companies come out with sporty little cars, the cars come out looking the same?
왜 다른 자동차 회사들이 스포티한 소형차를 선보일 때마다, 다 똑같아 보이는 걸까요?
- 1971년 그렘린 X 출시 당시 지면광고 #
왜 다른 자동차 회사들이 스포티한 소형차를 선보일 때마다, 다 똑같아 보이는 걸까요?
- 1971년 그렘린 X 출시 당시 지면광고 #
아메리칸 모터스 코퍼레이션(이하 AMC)이 1970년부터 1978년까지 생산한 소형차이다.
2. 상세
2.1. 배경
196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에서는 폭스바겐 비틀을 필두로 하는 수입산 소형차들이 파이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동시에 AMC에서는 조지 W. 롬니[2]의 후임으로 1962년에 취임한 로이 애버네시(Roy Abernethy) 회장이 소형차 중심의 회사였던 AMC를 경영하면서 제너럴 모터스, 포드 모터 컴퍼니, 크라이슬러 코퍼레이션의 빅 3을 따라서 대형차급을 라인업에 무리하게 추가하고 디자인도 매년 변경하다가 회사를 적자에 빠뜨리는 바람에 이를 수습하는 동시에 수입산 소형차에 대한 방어구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신임 회장 로이 채핀 주니어(Roy D. Chapin Jr.)가 애버네시의 후임으로 들어온 1967년 이후에도 미국 3사가 1971년 출시를 목표로 폭스바겐 비틀, 토요타 코롤라[3]같은 차들과 맞붙을 소형차를 준비하고 있어서 이를 빠르게 견재할 필요가 생겼다.AMC는 기존의 컴팩트카 라인업인 램블러 아메리칸(Rambler American)의 후속 모델로 이에 기반한 신차 호넷(Hornet)[4]을 준비하고 있었고, 당시 AMC의 수석디자이너였던 리처드 티그(Richard A. Teague)는 동료 디자이너 밥 닉슨(Bob Nixon)[5]과 함께 1966년부터 호넷의 전장을 줄여 만든 소형차를 기획했다. 마침 AMC에서는 작은 규모 대비 효율적인 자원 활용을 위해 부품 공용화를 철저히 준비하고 있었고, 로이 애버네시가 AMC 회장일 시절인 1966년 말에 1,264만 8천 달러의 적자를 기록할 정도로 회사 사정이 매우 나빴기 때문에 AMC에서는 처음부터 신차를 만들 여건이 되지 못했다.
그렘린의 디자인적 모티브가 된 AMC AMX-GT |
이렇게 완성된 그렘린의 2박스 세단 스타일은 후미부가 아주 깔끔하게 잘려나가는 해치백다운 실루엣을 갖추었으며, AMC의 수석디자이너 리처드 티그도 경쟁사들의 소형차들과 겹치지 않는 개성적인 디자인을 살리는 데 집중했다.[7] 리처드 티그에 따르면 그렘린과 함께 AMC의 소형차 프로젝트로 호넷의 휠베이스를 그대로 줄여 만든 2도어 세단 "와스프(Wasp)"도 같이 준비했으나, 실내공간도 별로 안 나고 스타일링도 별로였기 때문에 2박스 스타일의 그렘린을 채택했다고 한다. # 또한 이 2박스 스타일링은 전통적으로 자동차 업계에서 공기역학을 개선하기 위해 적용한 캄백(Kammback) 스타일에 기반하여 연비에도 보탬이 되었다.
이외에도 그렘린은 호넷의 엔진과 변속기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물론, 서스펜션이나 브레이크도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 따라서 4륜 드럼브레이크, 호넷의 후륜 가로배치 리프 스프링을 변형한 서스펜션을 적용했다. 대신 AMC에서는 바디를 최대한 견고하게 만드는 데 집중했으며, 개발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해치백형 트렁크를 넣는 대신 뒷창문만이 해치게이트 형태로 열리도록 조치했다.[8][9] 또한 형제차 호넷이 기존의 준중형 라인 아메리칸을 기반으로 만들었다는 점은 구식 설계라는 한계점을 갖는 대신에 차후 경쟁차로서 각종 품질문제에 시달린 포드 핀토, 쉐보레 베가와 대비하여 그렘린이 신뢰성, 내구도에서 상대적으로 우위를 가져갈 수 있게 만들었다.
이렇게 기존 차량의 메커니즘과 각종 부속을 최대한 공용하며 만들어진 덕에, 양산 결정부터 출시까지 총 20개월이라는 당시로서는 아주 짧은 개발기간, 포드 핀토의 절반 수준인 1200만 달러의 개발비로 개발이 완료되었다. #[10]
2.2. 출시 및 판매
1971년식 AMC 그렘린 | 1973년식 AMC 그렘린 X |
여기에 4기통 엔진만 존재했던 경쟁차들과 달리 그렘린은 호넷의 파워트레인을 공용할 수 있다는 이점까지 생겨 128마력(hp 기준)을 내는 3,258cc와 145마력을 내는 3,801cc 직렬 6기통 가솔린 엔진[13]을 준비했다. 변속기는 보그워너제 3단 자동과 3단 수동[14]이 제공되었다. 여기에 당대 AMC의 가격정책에 맞춰 파워 스티어링, 파워 브레이크, 핸들링 패키지, 리미티드 슬립 디퍼런셜, 에어컨, 버킷시트, 틴팅 유리창, 루프랙, 전동 와이퍼[15]와 각종 실내외 트림 패키지를 비롯한 40가지 이상의 옵션을 제공해 선택지를 넓히고 수익성도 키우고자 했다. 마케팅은 빠른 출시기간을 살려 "미국 최초의 서브컴팩트 카(Subcompact car, 소형차급)"[16]로 홍보하고, 동시에 그렘린 특유의 개성적인 2박스 세단 스타일을 어필하여 1970년 전후의 젊은 층들을 고객으로 겨냥해 60% 이상의 고객이 35세 이하라는 유의미한 실적을 거두기도 했다.
그렘린은 폭스바겐 비틀 등과 경쟁하는 소형차 모델로서 3,258cc 엔진 + 3단 자동변속기 모델이 96km/h까지 가속하는 데 15.8초, 최고시속은 160km/h 전후를 기록하여 성능에서 우위를 가져갔고,[17] 비틀보다 훨씬 무거우면서도[18] 공인연비도 23MPG[19]로 미국차로서는 비틀의 26MPG[20]에 크게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여기에 AMC에서는 그렘린의 가성비에도 신경을 썼으며, 대용량의 연료탱크와 함께 회전반경도 비틀보다 작았다. 다만 호넷의 플랫폼과 파워트레인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전장을 줄인 탓에 무게배분이 앞으로 쏠리면서 코너링 성능이 나빠지며 핸들링까지 느려지는 단점이 있었고,[21] 중앙의 구동축이 실내공간을 잡아먹는 구성인 앞 엔진 후륜구동 레이아웃이면서 휠베이스까지 크게 줄인 탓에 2열 뒷좌석이 매우 좁았다. #
1970년 한 해동안, AMC에서는 25,300대의 그렘린을 판매했으며, 1년간의 모델이어를 처음으로 채운 1971년부터 1974년까지 꾸준한 판매량 성장을 기록했다.
- 1971년형 그렘린은 젊은 고객층들을 유치하기 위한 스포티 라인으로 그렘린 X를 출시했다. 300달러짜리 패키지로 준비하여 4인승 모델을 토대로 배기량이 큰 엔진을 얹고 전용 데칼, 크롬도금 대신 바디컬러로 도장한 전면부, 검은색 그릴, 14인치 광폭 휠과 굿이어 폴리글라스(Polyglas) 광폭 블랙월 타이어,[22] 재블린의 버킷시트, 15인치 3스포크 스포츠 스티어링 휠, 전용 외장컬러 옵션 8가지를 추가해 경쟁차들보다 저렴한 2,299달러라는 기본가를 만들어내며 인기 사양으로 등극했다. # 또한 3,801cc 엔진이 그렘린의 기본 엔진으로 승격되었고, 150마력을 내는 4,230cc짜리 직렬 6기통 엔진이 옵션으로 추가되었다.[23] 그 외에 1971년식을 도입함에 따라 그렘린 라인 전체 공통사항으로 배기량을 나타내는 레터링 데칼이 후미부에 추가되어 배기량별로 각각 "3.8 litre," "4.2 litre" 데칼이 들어갔다.[24] 2인승 사양이 판매된 마지막 해이며, 1971년은 출시 12개월을 모두 채운 첫 해로서 총 53,480대의 그렘린이 판매되었다.
- 1972년형 그렘린부터는 V8 엔진이 154달러짜리 옵션으로 라인업에 합류했다. 4,978cc짜리 V8 엔진이 추가되어 150마력을 기록했으며, 자동변속기 사양 기준으로 96km/h까지 가속시간 8.5초를 기록하여 당대 소형차로서는 매우 빨랐다. # 변속기도 3단 자동변속기를 보그워너제에서 크라이슬러의 토크플라이트 3단으로, 수동변속기는 싱크로메시가 들어가는 3단으로 교체했으며, 기존의 엔진들도 출력 측정 기준이 변경되어 3,801cc 엔진이 100마력, 4,230cc 엔진이 110마력으로 공인 출력이 다운그레이드되었다. 외양상으로는 바디컬러 전면부가 추가되었으며, 신뢰도 및 내구도를 개선하는 소소한 기술적인 변경 사항과 함께 선택장비로는 캔버스탑 썬루프, 틸트 스티어링, AM/FM 라디오, 실내에서 가동 가능한 보닛 개폐장치, 910kg까지 견인 가능한 트레일러 견인 패키지, 앞바퀴 디스크브레이크, 다단식 전동 와이퍼, 개폐식 후측면 창문 등을 추가했다. 여기에 그렘린을 비롯한 AMC 라인업 전반에 공통적용되는 미국 자동차업계 최초의 12개월/19,000km bumper-to-bumper 메이커 보증수리 서비스[25]까지 더하여 품질에 대한 자신감까지 과시하며 보증수리 수 감소, 고객만족도 항상 등의 성과를 더했다. 1972년 한 해동안 61,717대의 그렘린이 판매되었다.
- 1973년형을 맞아 AMC에서는 미국 내 청바지 유행을 타고 청바지 브랜드 리바이스와 콜라보레이션을 한 특별 사양 그렘린 리바이스를 출시했다. 당시 AMC에서는 차별화를 위해 호넷 스포트어바웃의 구찌 에디션을 출시하는 등으로 자동차업계 최초로 패션 브랜드와 협업을 시작했고, 의류산업 바깥으로 사업확장을 바라던 리바이스와 손을 잡아 1973년 2월 24일 시카고 오토쇼에서 공개한 그렘린 리바이스 에디션은 리바이스 청바지를 오마주한 데님 색상의 나일론 인테리어 마감[26]에 구릿빛 실밥과 단추, 리바이스 상표, 탈부탁형 맵 포켓을 적용했다. # 라인업 전체의 공통사항으로 자동변속기 사양에 플로어 시프트 옵션을 제공하고 앞뒤 범퍼로 5마일 범퍼 및 2.5마일 범퍼[27]를 미국 자동차 법규에 맞추어 추가했으며, 뒷자리의 다리 공간을 넓히는 개선사항이 더해졌다. 그렘린 X는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 미국차의 "콜라병" 스타일링처럼 굴곡을 그리는 데칼이 적용되었다. 1973년 한 해동안 122,844대의 그렘린이 판매되었다.
1974년식 AMC 그렘린 X |
- 1974년형에는 뒷좌석을 개선하고 전면부를 수정, 유압식 실린더가 장착되어 충돌 후 원상복구되는 구조의 대형 범퍼를 추가했다. 뒷범퍼도 5마일 범퍼로 교체하는 동시에 당시 미국 안전법규에 따라 높이를 낮추고, 모델명 레터링도 폰트를 변경했다. 그렘린 X의 데칼도 다시 변경되어 C필러에서 시작하여 창문을 타고 흐르는 하키스틱 모양으로 바꾸었으며 타코미터, 유압계, 전압계, 6기통 사양 전용의 전륜 안티롤바, 검은색 계기판, 전륜 디스크 브레이크를 추가하는 랠리-X(Rallye-X) 패키지가 라인업에 합류했다. 이외에도 전동 발열식 뒷유리, 4스피커 세트가 포함된 AM/FM 스테레오 라디오, 방음설비 세트가 옵션 리스트에 추가되었다. 1973년 10월의 제 1차 석유 파동으로 인한 석유값 급등으로 그렘린의 판매량도 급상승, 총 171,128대를 판매하여 그렘린 역대 최다 판매대수를 기록했다.
- 1975년형부터는 프레스토라이트(Prestolite)의 전자점화장치를 기본 사양으로 채용했으며,[28] 미국 시장용 그렘린 전반에 촉매변환장치가 적용됨에 따라 연료주입구 및 계기판에 "Unleaded Fuel Only(무연휘발유 전용)" 문구가 추가되고 엔진 세팅도 변경되어 성능과 연비가 항상되었다. 6기통 + 수동 조합에는 레이콕 드 노먼빌(Laycock de Normanville)의 전자식 오버드라이브가 옵션으로 추가되었으며, 방향지시등 칼럼 끝의 버튼을 통해 사용할 수 있었다.[29] 그렘린 X에는 금속 벨트가 적용된 레이디얼 타이어를 기본 장비로 적용했고, 그렘린 라인 공통의 옵션으로 그렘린 X의 금속 벨트 레이디얼 타이어와 크루즈 컨트롤, 연비 게이지가 추가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비틀의 후속으로 전륜구동 해치백인 골프가 미국에 도입되고 혼다기연공업도 같은 구성의 시빅을 출시하는 등, 미국의 소형차 시장이 보다 가벼운 전륜구동 해치백 위주로 편성되기 시작하며 그렘린의 판매량도 떨어졌다. 여기에 그렘린의 후속모델 페이서도 등장하며 그렘린의 판매량을 깎아먹었고, 1975년 한 해동안 56,011대를 판매하는 데서 만족해야만 했다.
1976년식 AMC 그렘린 |
- 1976년형에는 페이스리프트가 한 차례 더 이루어져 헤드램프 베젤을 원형에서 세로로 긴 각진 타원형으로 바꾸었고, 그릴 형상도 변경되어 두꺼운 가로줄 바 하나와 원형 방향지시등 한 쌍을 추가했다. 또한 신규 트림으로 "포토맥(Potomac)" 스트라이프 인테리어 마감과 스페어타이어 커버 등의 장비들을 추가한 그렘린 커스텀을 추가했다. 옵션으로는 비닐 루프와 알루미늄 휠이 추가되었으며 데칼 디자인은 이전의 하키스틱 모양을 유지하되 그렘린 X는 가로줄 삐침을 추가한 새 데칼이 들어갔고, 그렘린 X도 커스텀 트림 전용으로 정리되었다. 판매량이 줄어듦에 따라 그렘린의 V8 엔진 옵션도 1972년부터 1976년까지의 총 40,994대를 마지막으로 연식 중간에 단종시켰으며, 4단 수동변속기를 옵션으로 추가했다. 총 52,941대의 그렘린이 1976년에 판매되었다.
1977년식 AMC 그렘린 X |
- 1977년형에는 역대 그렘린 사상 가장 폭넓은 페이스리프트가 이루어져 동 시기의 콩코드를 닮은 매끈한 새 전면부가 추가되었다. 이 변화로 펜더 길이를 줄이고 보닛, 범퍼도 교체해 전장이 10cm 가량 줄어들었다. 이외에도 후미등과 뒷창문[30]을 키우고 조명류를 교체하는 등, 여러 가지의 변경사항이 더해졌다. 기본형 그렘린에는 카펫과 함께 락커 패널 등에 몰딩을 추가했으며, 그렘린 X 패키지도 물결치는 모양의 새 데칼을 추가하고 앞바퀴 디스크브레이크는 기본 장비로 승격되었다. 기존의 3,801cc와 4,230cc 엔진에는 실린더헤드를 업데이트하고 2배럴 카뷰레터를 추가했으며, 폭스바겐으로부터 포르쉐 924에서 사용하던 아우디 설계의 1,984cc EA831 4기통 엔진을 카뷰레터식으로 도입해 옵션[31]으로 추가했다. 기존의 6기통 그렘린 대비 중량이 113kg까지 줄어들어 공인연비도 항상되고 핸들링도 개선했으나 대신 가속성능을 희생해야 했다. 1977년 내내 총 46,171대의 그렘린이 만들어졌으며, 7,558대가 4기통 엔진을 장착했다.
- 1978년형은 그렘린의 마지막 모델이어로, 그렘린 커스텀은 4기통과 6기통 엔진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으며 4단 수동변속기와 신규 비닐 버킷시트, 펜더 몰딩 등을 기본장비로 적용했다. 대시보드도 콩코드의 것을 가져와 에어벤트의 높이를 끌어올린 레이아웃에 기존의 원형 유닛을 대신하는 대시보드 양 끝의 각진 에어벤트, 사용성을 개선한 라디오 조작계 등이 들어갔다. 그렘린 X의 데칼도 콩코드의 스포트 패키지의 것과 스타일링을 맞춰 차체 하단을 가로지르는 두툼한 가로줄 하나에 앞뒤 펜더를 감싸는 구성으로 변경되었다. 호넷 AMX에 들어가던 광폭 펜더와 프런트 스포일러가 적용되는 GT 패키지도 라인업에 합류, 4,230cc 엔진과 차체 중앙을 가로지르는 전용 데칼, 콩코드의 방음설비 패키지 등을 장착하여 3,000대 이하가 출고되었다. 22,104대의 그렘린이 1978년에 판매되었다.
1978년에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671,475대의 그렘린이 만들어졌으며, 주로 AMC의 주력 공장이 위치한 미국 위스콘신 주 커노사(Kenosha)에서 만들어졌다.이외에도 캐나다 온타리오 주 브램턴(Brampton)과 멕시코 멕시코시티에서도 그렘린의 현지생산이 이루어졌으며, 그렘린을 고급화하고 좀 더 보편적인 스타일로 다듬은 스피릿이 후속모델로 도입되었다.
2.3. 컨셉트카
- 그렘린 보이저(1972)
컨셉트카는 이후 살아남아 2020년 2월 9일에 기사를 통해 커노샤 히스토리 센터에 보존전시된 모습이 확인되었다.
- 그렘린 XP(1974)
원래는 폐기될 예정이었으나 디자이너 리처드 티그의 요청으로 보존되었으며, 리처드 티그 개인이 보유하다가 업계에서 은퇴하면서 여러 차례 매각되었다. 2022년 8월에는 커노샤 히스토리 센터에 전시된 모습이 공개되었고, 2023년 12월 4일에는 페이스북을 통해 생존이 확인되었다.
- 그렘린 G-II(1974)
그렘린의 후속이자 업데이트 사양인 스피릿, 그리고 이에 기반한 4륜구동 크로스오버인 이글 SX/4에 비슷한 스타일의 패스트백 바디가 반영되었다.
3. 미디어에서
포르자 호라이즌 4에 등장하는 1973년식 AMC 그렘린 X |
- 카 2의 조연 악역인 그렘은 1974년식 AMC 그렘린 X를 캐릭터화한 인물이다. 이외에도 비슷한 연식의 그렘린들이 그렘의 조력자들로 등장한다. #
- 영화 그렘린에 1974년식 그렘린이 배경소품으로 등장한다. #
- 스타스키와 허치의 비디오게임 버전에 그렘린이 주요 트래픽카로 등장한다. #
- 포르자 모터스포츠 4, 포르자 호라이즌 3과 4, 5에 1973년식 그렘린 X의 V8 사양이 플레이어블 차량으로 등장한다.
- 터미네이터(영화) - 중후반 카일과 사라가 경찰서에서 타고 도망쳤다 기름이 떨어져 유기한 차량으로 1972년식이 등장한다. 최후반 사라가 T-800이 탄 인터내셔널 하베스터로부터 도망칠때 지나친 차량으로도 등장한다.
4. 기타
- 후속 차종인 페이서와 함께 역대 가장 못생긴 자동차 리스트에 자주 언급되는 차종이다.
- 미국의 튜닝 업체인 허스트 퍼포먼스(Hurst Performance)는 1972년부터 1974년까지 그렘린을 기반으로 개조한 응급 구조차를 '허스트 레스큐 시스템 1' 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했다. 주로 고속도로나 레이싱 서킷에서 구조용 차량으로 사용되었으며, 전/후면 푸시 범퍼, 25갤런[32]의 물을 실을 수 있는 물탱크, 윈치, 들것, 소화기, 각종 연장과 응급 처치 물품 등 다양한 응급 장비를 갖추었다.
- 휴스턴 경찰청에 의해 1975년형 그렘린이 경찰차로 시범 운용된 사례가 있으나, 실제로 도입까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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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카피의 "American"을 중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미국 업체에서 만든 첫 서브컴팩트급 차량이라는 뜻, 그리고 아메리칸 모터스의 신차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아들인
미트 롬니가 미국의 정치인으로 일하고 있다. 정계 입계를 위해 1962년에 퇴임할 때까지 AMC 창립 전후로 1950년대 내내 소형차 생산과 개발에 집중했으며, 1958년 미국 경제 불황 속에서 미국 자동차 회사들 중 유일하게 매출 상승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다만 램블러 아메리칸을 비롯한 소형차를 중심으로 생산하고 당대 미국 자동차 회사에서 자주 단행하던 리스타일링에도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여성 운전자들의 마실차" 취급을 받기도 했으며, 후임인 로이 애버네시가 미국 3사의 컴팩트카 시장 진출로 인한 시장의 레드오션화를 계기로 이를 갈아엎고자 미국 3사를 모방하려고 하는 계기가 된다.
[3]
단, 당시 미국에서 일본차를 비롯한 일본 제품은 21세기의 중국과 비슷한 대접을 받았고, 따라서 폭스바겐이 1970년대 후반까지 미국의 소형 수입차 시장을 평정했다. 하지만 1960년대 중후반기에
닷선 510이나 코롤라같은 차들이 호평을 쌓아가기 시작하는 등으로 일본차들의 성장 속도도 매우 빨랐기 때문에 AMC를 비롯한 미국 업계들이 일본 소형차를 경계할 이유가 여전히 존재했다.
#
[4]
이 차의 1974년식 해치백 모델이
007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에서 활약했다.
[5]
2019년 2월에 86세로 타계. 크라이슬러에 입사해 테크니컬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고 닷지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근무하다가 1959년에 AMC에 입사, 1960년대부터 수석디자이너 리처드 티그의 신임을 얻어 AMC의 소형차 디자인을 지휘하거나 1974년식
마타도어 쿠페,
지프 그랜드 체로키의 디자인을 이끄는 등, AMC가
르노와
크라이슬러로 인수되는 과정을 모두 겪으며 1992년까지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
#
[6]
금형값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7]
리처드 티그는 경쟁사들과 별 차이 없는 모습이라면 아무도 AMC에 눈길을 주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렘린의 스타일링을 옹호했으며,
모터트렌드 지와의 인터뷰에서도 "디자인 상을 딸 일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최소한 색다른 이미지의 개성있는 차이며, 우스꽝스럽게 생긴 세단이 아닌 우리가 의도한데로 제역할을 할 모습의 작고 귀여운 왜건"이라고 답변했다.
[8]
리처드 티그는 해치게이트의 부재에 대해 묻는 모터트렌드 지의 질문에 내구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해치게이트를 제외했다고 설명했으며, AMC에서 개발한 차들 중 가장 튼튼한 차량이라는 반응을 얻었다고 해명했다. 대신 AMC에서는 1973년식 AMC 호넷에 2도어 패스트백 쿠페 스타일의 해치백 라인업을 추가했고, 1971년식 호넷 역시 1피스 해치게이트가 부착된 왜건 라인업인 스포츠어바웃(Sportabout)을 제공했다.
[9]
참고로 해치백은 단순히 트렁크를 줄이고 해치게이트를 다는 형태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치게이트가 추가로 들어가는 만큼 보강이 필요하기 때문에 들어가는 노고가 생각보다 큰 편이다. 해치게이트를 뚫으면서 이를 지지하는 골격의 면적이 좁아지는만큼 서포트가 약해지고, 약해진 만큼의 보강이 추가로 들어가야 한다.
[10]
단, 실제 제조단가는 준중형급 호넷과 별 차이가 없어서 가격까지 훨씬 싼 그렘린의 마진폭이 좁은 편이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낮은 수익성을 근거로 AMC가 그렘린으로 소형차 시장에 뛰어드는 대신 호넷같은 준중형차 시장에 집중하는 게 나았다고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
#
[11]
1972년에 단종될 때까지 18개월동안 총 3,017대가 판매되었다.
[12]
2020년 환율로 13,055달러. 이후 그렘린의 경쟁차로 등장한 쉐보레 베가는 1971년식 기준 2,090달러였으며, 베가가 출시되기 전 호넷의 경쟁차종이자 쉐보레의 준중형 라인으로 판매되던 노바는 1970년형 기본 트림 기준 2,335달러였다. 참고로 그렘린이 출시되었을 당시 먼저 출시된 AMC 호넷의 기본 트림은 1,994달러, 그렘린의 주요 경쟁차종인 비틀은 1,874달러였다.
[13]
둘 다 1배럴 카뷰레터가 적용되었다.
[14]
1단 싱크로메시가 없는 칼럼식 수동변속기이다. 플로어 시프트식은 옵션.
[15]
기본 와이퍼는 진공식이었다.
[16]
단, AMC의 전신인
내시에서 출시한
오스틴 기반의 2인승차
내시 메트로폴리탄, 그리고 미국의 경자동차 전문업체
크로슬리 모터스가 출시한 경차 라인업이 그렘린보다 먼저 나온 바 있다.
[17]
카앤드라이버 지가 시승한 3,801cc 수동변속기 사양은 1971년 1월 시승기 기준 96km/h까지 10.5초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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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800파운드(약 362.9kg)가 더 나갔다. AMC에서는 오히려 무거운 공차중량을 안정적이고 부드러운 승차감, 그리고 안전에서 유리하다고 역으로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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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9.8k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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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1.1k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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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앤드라이버 지의 시승기에 따르면 노파워 스티어링 사양의 록투록, 즉 스티어링을 끝까지 돌리는 데 걸리는 횟수가 6.25바퀴었다고 한다. 참고로 기아 로체 이노베이션, 제네시스 GV80의 록투록은 각각 2.6바퀴와 2.5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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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 텍스트가 들어가는 타이어가 선택 사항으로 제공되었다. 일반 그렘린은 화이트월 타이어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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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엔진의 압축비가 8.5:1에서 8:1로 낮춰져 3,801cc 엔진의 최고출력이 145마력에서 135마력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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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추가된 그렘린 V8 사양은 X 한정으로 들어가는 "5-litre V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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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C에서의 공식 명칭은
바이어 프로텍션 플랜(Buyer Protection Plan). 파워트레인만 보증수리가 이루어지던 시절에 "범퍼에서 범퍼까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타이어를 제외한 모든 문제사항을 보증수리했으며 정비시간이 길어질 때를 대비한 예비차량 무료제공, AMC 측으로 연결 가능한 수신자 부담번호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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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데님은 화제에 취약하다는 이유로 사용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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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속도(5마일과 2.5마일, 즉 8km/h와 4km/h)에서 찌그러지지 않는 고강성 범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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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C 그렘린 관련 정보 웹페이지인 gremlinx.com에 따르면 프레스토라이트 점화장치에 신뢰성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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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이 작동될 시에는 56km/h 이상의 속도에서 동작, 51km/h 이하의 속도에서 동작이 중단된다. 600~700대 정도가 이 전자식 오버드라이브를 적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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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그렘린 대비 뒷창문의 면적이 23%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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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선스비가 들어가는데다가 AMC 페이서가 상업적으로 실패하고 중~대형차 라인도 단종되어가는 등, 1970년대 말의 AMC는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4기통 엔진을 기본사양으로 넣을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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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94.6리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