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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9:48:35

A. K. 체스터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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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K. Chesterton
파일:A._K._Chesterton.jpg
본명 아서 케네스 체스터튼
Arthur Kenneth Chesterton
출생 1899년 5월 1일
영국령 남아프리카 크뤼허르스도르프
(現 남아프리카 공화국 하우텡주 크뤼허르스도르프)
사망 1973년 8월 16일 (향년 74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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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서 조지 체스터튼 (아버지)
해리엇 에델 체스터튼 (어머니)
G. K. 체스터튼 (사촌)
직업 작가, 정치인
소속 영국 파시스트 연합 -> 국민전선(영국)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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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파시스트이자 정치인.

2. 생애

2.1. 유년기

A. K. 체스터튼은 1899년 5월 1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서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크루거도르프에 있는 Luipaards Vlei 금광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직후 보어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어머니와 함께 런던으로 보내져 친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원래는 그의 아버지도 런던에서 함께 지내기로 하였으나 아프리카에서 오랜 시간 걷는 동안 결핵 폐렴에 걸려 사망하고 만다. 1904년 체스터튼과 그의 어머니는 다시 남아프리카로 돌아오고 해리엇 에델 체스터튼은 광산 감독관 조지 혼과 재혼하게 된다.

2.2. 제1차 세계 대전

1911년 체스터튼은 영국으로 돌아가 학교에 다녔지만 1915년 남아프리카로 돌아와 16세의 나이에 스무트의 동아프리카 전선에 지원하여 복무하였다. 전선에서는 말라리아, 이질등 여러 풍토병으로 인해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 나갔고 체스터튼도 병에 걸려서 길가에 버려졌으나 원주민의 도움으로 생존하게 된다. 체스터튼은 여전히 싸우고 싶었고 1916년 아일랜드 페르모이에서 장교 훈련을 받고 같은 해 말에 서부전선에 배치되었다. 체스터튼은 프랑스에서 뛰어난 활약을 했으며 에페히에서 힌덴부르크 방어선에 대한 공격 중에 모범적인 용기와 리더십을 보여준 후 1918년에 십자 군사 훈장을 받았다.

2.3. 전간기

1920년 4월 남아프리카로 돌아온 그는 요하네스버그 스타의 기자로 취직했다. 체스터튼은 저널리즘 글쓰기에 대한 타고난 재능을 발견했지만 어머니의 닭 농장 운영을 돕기 위해 신문사를 떠났다가 1924년 영국으로 돌아와 스트랫퍼드 헤럴드의 일반 기자 겸 축제 평론가 자리를 맞게 된다. 그 후 몇 년 동안 체스터튼은 주로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서 드라마 연극에 전념했다. 그는 뛰어난 작가이자 현대 및 셰익스피어 드라마의 뛰어난 비평가로 빠르게 명성을 얻었고, 1929년 3월 데번주 토키로 이사하여 토키 타임즈 신문 그룹의 편집장이 되었다. 그는 곧바로 지역 내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고 비평가이자 배우로서 지역 극장에 참여했다. 그곳에서 만난 도리스 테리와 결혼하여 아내로 맞는다. 또한 이 시기에 체스터튼은 토키 시민 방위 동맹을 결성하면서 정치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다.

1933년 초, 편집장직을 사임하고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서의 경력을 추구하기 위해 런던으로 이사했을 때, 체스터튼은 극우 정치에 전적으로 헌신했고 같은 해 11월 영국 파시스트 연합(BUF)에 가입하여 여러 파시즘 운동으로 자신의 유능함을 증명한 후 당 내에서 가장 반유대주의적인 인사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1936년 동안 체스터튼은 과로, 피로,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신경 쇠약을 겪었다. 오스왈드 모슬리의 추천으로 그는 독일로 여행을 갔고, 그곳에서 6개월 동안 나치 치하의 삶을 관찰하며 요양을 했다. 체스터튼은 복귀 후 홍보 선전부장으로 승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BUF 출판물인 블랙셔츠의 편집자가 되었다.

2.4. 제2차 세계 대전

1938년, 운동 관료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과 모슬리의 약한 리더십을 비판하는 데 좌절한 체스터튼은 BUF에서 사임하여 '내가 모슬리를 떠난 이유'라는 제목의 팜플렛에서 자신의 불만을 토로하고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했다. 1939년 3월, 히틀러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나치 독일과 손절하고 영국군에 입대하게 된다. 체스터튼은 잠시동안 잠재적 배신자라는 의심을 받아 몇 달 동안 감시를 받다가 해외 현역 복무에 자원하여 케냐 북부로 파견되었다. 그는 1943년 대장염 말라리아로 인해 군에서 제대했다. 그러나 그의 반유대주의 성향은 여전하여 민간인으로 돌아온 후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여 London Tidings, People's Post, Patriot와 같은 반유대주의 출판물에 기사를 기고했고 1944년에는 극우 보수주의의 오랜 저널인 Truth의 부편집장이자 수석 작가로 자리를 제안받았다.

2.5. 전쟁 이후

체스터튼과 Truth의 관계는 1953년에 끝났다. 그 후 그는 잠시 비버브룩 경의 '문학 고문'으로 일하면서 자서전 Don't Trust to Luck을 대필한 후 자신의 견해서인 Candour를 만들어 인종적 민족주의 반유대주의적 음모 이론에 대한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옹호할 수 있었다. 1954년 체스터튼은 제국 충성파 연합을 설립했는데, 이는 직접적인 행동 스턴트와 '개입'이 널리 알려졌고 새로운 세대의 파시스트, 민족주의자, 우익 극단주의자의 관심을 끌었던 정치적 압력 단체가 되었다.

1967년 제국 충성파 연합이 영국 국민당, 그레이트 브리튼 운동, 급진적 보존 협회와 합병하여 국민전선을 형성했을 때, 체스터튼은 당의 초대 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적극적인 참여는 항상 건강이 좋지 않은 관계로 짧았고, 1971년 다른 국민 전선 지도자들이 지지한 거리 폭력과 나치즘 지지에 반대하며 사임했다. 그는 남은 인생을 자서전을 쓰고 자신의 저널 Candour 편집을 하는 것으로 보냈다.

1973년 8월 16일 향년 74세의 나이에 폐기종으로 사망하게 된다.

3. 여담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