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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93년 5월 31일부터 6월 2일까지 자코뱅과 파리 코뮌의 주도로 파리 시민들이 봉기하여 지롱드당을 국민공회에서 축출한 사건.2. 전개 과정
국민공회가 출범한 이후, 주도권을 쥔 지롱드당과 거기에 맞선 자코뱅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지롱드파 정권은 인심을 잃어갔다. 방데 지역에서 반혁명 봉기가 발생했고, 혁명군을 지휘하던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1]의 배신, 프랑스 혁명전쟁에서의 패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파리 시민들과 공화파들은 자코뱅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주도권을 지키고자, 지롱드당은 '12인 위원회'를 만들어 자코뱅과 파리 코뮌의 인사들을 공격했다.[2]이에 분노한 자코뱅과 상퀼로트들은 지롱드당을 몰아내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1793년 5월 말에는 비밀리에 봉기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3]는 자코뱅 당원들과 파리 시민들에게 무장 봉기가 필요성을 설파하며 지롱드당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민중이 억압당할 때, 민중에게 자기 자신 밖에 남아 있지 않을 때, 민중에게 일어나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겁쟁이입니다. 그 순간이 왔습니다. 나는 민중에게 타락한 의원들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촉구합니다. 나는 나 홀로 의장과 국민공회에 의석을 가지고 있는 모든 지롱드파 의원들에 대항해 반란을 시작함을 선언합니다. 사람들이 상퀼로트에 대해 온당치 않은 경멸을 나타낼 때, 나는 부패한 의원들에 맞서 반란을 시작함을 선언합니다."
마침내 5월 31일 파리 시민들과 국민방위군 수만여 명이 국민공회를 포위했다. 지휘관 앙리오를 따라 국민공회에 난입한 군중은 '12인 위원회의 폐지', '지롱드당 의원들의 체포 및 조사'를 요구하였다. 로베스피에르는 군중을 두둔하며 지롱드당을 비난했다. 지롱드당 의원들이 항의하자 그는 "그것은 당신들에게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8월 10일의 혁명 후 그 혁명을 수행한 사람들을 단두대로 끌고 가려 했던 당신들에게 반대합니다! 끊임없이 파리의 파괴를 선동했던 당신들에게 반대합니다. 전제군주를 구하고자 했던 당신들에게 반대합니다. 뒤무리에와 공모했던 당신들에게 반대합니다."라고 일갈했다. 지롱드당 의원들은 그의 질타에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공회 내의 중도파의 방해로 12인 위원회는 폐지되었으나 지롱드당 의원의 체포는 불발되었다.
이렇게 되자, 파리 코뮌과 장폴 마라의 주도로 6월 2일 군중은 재차 실력행사에 들어갔다. 다시 군인들과 시민들이 국민공회를 포위하고 의원들을 겁박했다. 국민군 사령관 앙리오는 칼을 빼들고 의회에 난입하여 "시민들이 요구하는 지롱드 파 의원들의 제명이 이뤄지지 않으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살벌한 상황 속에서 끝내 체포 명단이 발표되었고, 명단에 있던 지롱드당 의원 29명이 체포되었다.[4] 그와 함께 지롱드당은 실각했다.
3. 영향
이 일로 국민공회에서 지롱드당은 완전히 쫓겨났으며 자크 피에르 브리소 등의 주요 인물들은 나중에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 로베스피에르와 조르주 당통, 자크 르네 에베르가 이끄는 자코뱅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하며 공포 정치를 하게 된다.
[1]
라파예트가 혁명군에서 이탈한 후에 사령관으로 부임한 인물. 발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프랑스 혁명 전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그 후에는 실적이 미미하더니 패전이 이어지자 1793년
쿠데타를 시도하려다 실패해 도주하고 말았다. 그는
지롱드당과 가까워 지롱드당은 그의 배신으로 인한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다.
[2]
이 일로
장폴 마라가 붙잡혀 재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3]
당시 그는 병에 걸려 몸이 편찮은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봉기를 이끄는데 기여했다.
[4]
참고로 이 중 21명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