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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 건국대학교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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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대항쟁 당시 사진과 현재 경영대 앞에 조성된 건대항쟁 기림상



1. 개요2. 설명3. 사건 이후4. 관련 자료

1. 개요

10월 28일 건국대학교 항쟁은 '반외세 자주화, 반독재 민주화, 조국통일'의 3대 구호를 내걸고, 1986년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66시간 50분 동안 건국대학교에서 전개된 학생 민주화 운동이다. 건대 사태, 건국대 점거농성 사건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점거농성은 작전명 황소30이라 명명된 경찰의 입체 진압작전에 의해 폭력적으로 강제 해산됐으며, 1,525명이 연행되고 이 중 1,288명이 구속됐다. 연행된 학생들에게는 용공좌경분자라는 죄목이 적용됐다.

1986년 10월 28일, 전국 26개 대학의 2,000여 명의 학생들이 건국대학교에 모였다. 이날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편) 발족식을 하던 중 경찰이 물밀듯이 학내로 진입함에 따라 학생들은 주요 건물로 피했고, 이렇게 피신하며 모이다 보니 자연스레 계획에도 없던 점거농성을 하게 되었다. 경찰과 4일 동안 대치하다 10월 31일 헬리콥터와 최루탄, 물(소방수)을 쏘아대는 대대적인 탄압으로 학생들은 단체로 연행되었다.

당시 이들은 '전두환 정권을 지원하는 미국 대통령 일본 총리 화형식'을 가지고 '반외세 자주화, 반독재 민주화, 조국통일' 구호를 외쳤는데, 보도지침에 의한 언론통제 반공 이데올로기가 겹쳐 제도권 언론사들은 이들을 '좌경용공분자', '건국대공산혁명분자난동사건', ' 빨갱이'로 보도했다. 31일에 '황소30'이라는 작전명으로 경찰력을 투입하여 5개 건물에서 분산 농성 중이었던 학생 1,525명을 연행하고 이 가운데 1,288명을 구속했다. 당시 단일 사건 구속자 수로는 당시 세계 최고의 기록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일어난 해인 1986년에는 상당수의 학생들과 민주화 인사들이 교도소로 들어오면서 교도소 역시 일선 교도관들과 경비교도대를 동원해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통제를 강화하게 된다. 특히 11월 6일에 법무부는 전국의 교도소장들을 모아 회의를 열어 수감 중인 학생들에 대해 순화교육을 시키도록 하여 탄압을 부추겼다.

2. 설명

애학투련 결성식 자체는 군부 독재정권 시절 일상적이었던 민주화 시위였으나, 사전에 정보가 경찰에 새어나갔고 이 기회로 학생운동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경찰이 의도적으로 농성을 유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쉽게 말해, 처음부터 해산이 아닌 전원 연행을 목적으로 학생들을 건물 안에 몰아넣었고 대치 상황을 조성함으로써 언론에 '그림'이 나오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다.

당시 경찰 병력에 쫓긴 학생들은 그 넒은 건국대학교 캠퍼스 안에서도 학생회관, 교양학관, 도서관, 본관, 사회과학관 5개 건물에 흩어져서 농성에 들어갔다. 당시 현장사진 경찰에선 도시 한복판에 해방구를 건설하기 위한 좌경용공분자들의 조직적인 봉기라는 식으로 발표했지만, 정작 이들은 쌀 한 톨, 라면 한 봉지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운동권은 일정한 전술에 의해 움직이고, 농성을 하려면 지휘부를 비롯한 조직원들이 식량이나 물 같은 것을 어느 정도 준비하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당시 농성에 참가한 그 누구도 이러한 준비를 하지 않았고, 결국 학생들은 건물 1층 매점 문을 뜯고 가진 돈을 털어서 적당히 탁상 위에 올려놓은 뒤 과자를 꺼내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이런 농성은 국내외의 관심이 일어날 만한 장소를 선택해서 사전에 감옥행을 각오한[1] 소수의 인원이 기습적으로 점거해서 짦으면 몇십 분 길어야 2, 3일 버티는 게 당시 운동권의 전술이었다. 1984년 민정당사 점거농성[2], 1985년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3] 등이 대표적으로 수십 명 규모의 학생들이 기습적으로 건물에 진입해서, 내·외신기자들이 모이면 플래카드 내걸고 구호 외치다가 경찰에 끌려 나와서[4] 감옥행. 현실적으로 수천 명 규모의 그것도 해방구라고 칭할 정도의 장기 농성을 준비할 역량도 의지도 없던 시절이다.[5] 때문에 도시 해방구, 사전에 조직된 머시기 경찰 발표는 헛소리다. 2002년 MBC <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출연한 애학투련 간부는 '찬바람 부는 10월달에 학생 수천 명 모아놓고, 농성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우린 덫에 걸린 거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 기간 중인 10월 30일 정부가 '북한이 금강산댐을 만들고 있는데, 이거 200억 톤의 물로 서울을 물바다로 만들려는 수공용이다'라는 날조 발표를 하고 당시 방송사에서 금강산댐 수공관련 특집방송까지 했었다. 당시 집권하던 전두환 안기부장이던 장세동이 이것을 이용해서 민주화운동을 막고, 정권유지를 하기 위해서 이것을 주도했다. 이로써 '북한은 수공위협을 하는데 북한 편을 들고 반정부 데모하는 학생을 모조리 잡아들여라'는 분위기를 만들었다.[6]

인천 5.3 운동은 그 자체로 소요에 가까운 가두투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역공을 당할 소지가 있었지만, 건대항쟁은 그야말로 경찰과 공안당국이 짜놓은 시나리오에 학생운동가들이 고스란히 딸려들어가서 억울해진 사례가 되었다. 1986년에 있었던 운동권 사건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이기도 하다.

3. 사건 이후

사건이 끝난 5일 뒤인 1986년 11월 5일 당시 부산산업대학교(現 경성대학교) 법정대학 행정학과에 재학 중이던 진성일이 이에 항의하는 유서를 뿌리고 당시 문과대학(현 멀티미디어 대학 시청각관) 옥상에서 분투신하여 사망한다. 건국대에서 학생들이 경찰에 포위되어 전국 대학 대부분에서 항의 시위가 일어나던 와중에도 데모 한 번 안하던 경성대학교는 급반전하여 이후 부산권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대학이 된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부터 부산지역 대학들이 연합집회를 할 경우 대부분 경성대학교 학생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당시 시위 자체도 거의 없었지만, 어쩌다 일어났어도 기껏해야 150명 내외 정도만 모였는데 그 이후로는 시위 자체도 많이 일어났고 모이는 인원도 2000명을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것만 봐도 당시 정권이 목표로 한 학생운동권 일망타진이 이루어지기는커녕, 더 확산되기만 했음을 알 수 있다.

해를 넘긴 1987년 1월 17일에 열린 공판에서 검찰은 최대 징역 7년을 구형했다.

2016년 10월 27일부터 11월 2일까지 제1학생회관 1∼2층에서 '건대항쟁 30주년 기념 사진전'을 통해 미공개 사진을 공개한다. #

2022년 10월 27일 10.28 건대항쟁계승사업회는 건국대항쟁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제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48명이 단체사건으로 진실규명을 신청하며 입장문을 발표하였다. 이튿날인 28일 오후 6시 30분에는 사건 현장인 건국대학교 건대 항쟁 기림상 앞에서 10.28건대 항쟁 36주년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기념식에서는 10·28건대항쟁 진실규명을 위한 청원운동본부를 결성하여 건대항쟁 진실규명 신청 캠페인을 벌여 나가기로 선언하고 진실규명 신청 마감일인 2022년 12월 9일까지 추가 신청자를 모아 진실규명 신청 접수를 하기로 하였다.

<관련기사> '건국대 항쟁’…단군 이래 최대 구속사건 진실 밝힌다 https://www.cnbnews.com/news/article.html?no=572393

4. 관련 자료


[1] 때문에 이들은 사전에 비장한 각오로 구속결의서,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것을 써서 지도부에 맡기고 나가곤 했다. 그리고 이런 결의서를 가지고 '##의 뒤를 잇자' 식으로 또 다른 사람들을 조직하는게 일반적인 패턴이었다. [2] 농성 14시간만에 경찰의 기습적인 진압작전 한 시간 만에 모두 체포됐다. [3] 이때는 미국 문화원이란 특수성 때문에 경찰에서 강제 진압을 망설였고, 결국 72시간 후 맞은편 건물의 롯데백화점에서의 남북적십자 회담으로 해산했다. 북한 관계자가 농성장을 향해 손을 흔들거나 지지 발언 하는 날엔 모두 망하는 것이기 때문. 그 때 대북 적대의식이 높은 걸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4] 투쟁의 결의를 보여준다고 끌려 나오면서도 구호를 외치다 경찰한테 두들겨 맞곤 했다. [5] 사실 우리나라 학생운동사에서 천 명 단위의 장기농성을 사전에 준비한 적은 한번도 없다. 경찰 진압에 쫓겨서 강제 농성이 된 경우는 많지만. 대표적인 게 1996년 연세대 사태다. [6] 종이로 플래카드를 만들고 주변 주민들에게 고래고래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라고 소리쳐 봤자 밖에서는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