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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 왕국 8대 군주 Hilderic | 힐데리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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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힐데리크 |
라틴어 | Hilderic | |
그리스어 | Ἱλδέριχος | |
생몰 년도 | 미상 ~ 533년 | |
재위 기간 | 523년 ~ 53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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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달 왕국 8대 군주. 동로마 제국과 친선 관계를 맺고 정교를 공인했지만 겔리메르의 정변으로 폐위된 뒤 3년 후 처형당했다.2. 행적
반달 왕국 5대 군주 후네리크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와 리키니아 에우독시아의 딸 에우도키아의 아들로, 523년 트라사문드 왕이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다. 그는 트라사문드 왕의 과부이자 테오도리크 대왕의 여동생인 아말라프리다를 억류했다가 526년 동고트 왕국의 새 군주가 된 아탈라리쿠스의 요청에 따라 돌려보냈다.프로코피우스는 그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훌륭한 선물을 주고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굳건히 다지고자 칼케돈 공의회를 따르는 주교가 카르타고 주교로 취임하는 것을 허용하고 정교 신자들이 왕국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용인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정교로 개종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렇듯 정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자, 카르타고 시민들은 반달 왕국에 지지를 보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그는 전쟁을 기피해 해안 도시들에 대한 약탈을 지속하던 베르베르인들에 대한 전쟁을 사촌인 호아메르에게 일임했다. 이에 반달 귀족들은 왕이 왕으로서 직무를 수행하지 않고 겁쟁이처럼 굴고 있다며 반감을 품었다고 한다. 530년 호아메르가 이끄는 반달군이 아탈라스가 이끄는 베르베르군을 상대로 참패하자, 귀족들은 더 이상 놔둬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힐데리크의 사촌 겔리메르를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반란군에 패해 사로잡힌 후 사촌 호아메르, 형제 에바게스와 함께 투옥되었고, 겔리메르는 아리우스파를 왕국의 공식 종교로 복원하고 정교 신자들을 탄압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힐데리크를 복위시키라고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으나 접견 조차 허용받지 못했고, 겔리메르는 호아메르의 눈을 뽑아 몇 주안에 사망하게 만들고 힐데리크, 에바게스 형제를 더욱 깊숙한 감옥에 가둬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치려는 시도를 못하게 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2번째 사절을 보내 책망하자, 겔리메르는 "당신은 내게 이러한 요구를 할 권한이 없다"고 답했다. 이에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3년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를 앞세워 아프리카 원정을 단행했다. 겔리메르는 동로마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힐데리크와 에바게스, 두 사람의 친척과 추종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