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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장수 황씨[1] |
출생 | 1913년 11월 16일[2] |
경상북도 상주군 모동면 신천리[3] | |
사망 | 1954년 3월 20일 |
상훈 |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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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황계주는 1913년 11월 16일 경상북도 상주군(현 상주시) 모동면 신천리에서 아버지 황재걸(黃在傑, 1874. 1. 12 ~ 1975. 2. 27)과 어머니 성산 이씨(? ~ ?. 9. 26) 이진영(李震永)의 딸 사이의 5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일찍이 상경하여 양정고등보통학교를 다녔는데, 양정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32년 당시 동아일보사에서 모집하던 제2회 브나로드 계몽대원에 지원하여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일본으로 유학하였으며, 야마구치고등상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9년 2월 내선일체 반대, 조선어 폐지 반대, 창씨개명 및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 반대 등을 목적으로 비밀결사 여우회(麗友會)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한국 민족이 처해 있는 생활 환경을 비판하고, 억압과 착취의 이중고로부터 해방은 조국 독립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고 판단하고, ① 여우회를 단순한 친목회에 초탈하여 민족주의 단체로 만들 것, ② 신입생에 대해 민족의식 계몽에 노력할 것, ③ 동지의 결집을 확대하고 강고히 할 것, ④ 조선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여 독립 쟁취를 확신시킬 것, ⑤ 중일전쟁으로 일본이 국제적 고립을 면치 못하여 결국 패전할 것, ⑥ 해외 독립운동세력과 연계할 것, ⑦ 민족 지도자가 되기 위해 힘쓸 것 등을 투쟁 방침으로 정하였다.
그는 졸업식 송별회 및 신입생 환영회 등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신명을 다할 것을 맹세하며 활동하다가,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1939년 7월 10일 체포되어 1940년 3월 12일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그해 10월 조선으로 추방되었다. # 그 뒤 경기도 경성부 사직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에 거주하면서 동지들과 조선 독립운동의 실행 방법 등을 모색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1944년 10월 22일 동대문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했다.
이후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54년 3월 20일 별세하였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3. 여담
- 2020년 4월, 광복회원 및 독립유공자 후손 1544명이 종합편성채널인 ' TV CHOSUN· 채널A에 대한 재승인 취소 요구' 의견서에 연명하여 방송통신위원회에 전달했다. 이때 황계주의 손녀 황아름(黃娥懍, 1985. 2. 17 ~ )과 황보람(黃寶璼, 1988. 2. 5 ~ )도 의견서 연명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