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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21:43:09

현창석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호시야마 코키(星山光曦)
족보명 현익주(玄益周)
본관 연주 현씨[1]
출생 1922년[2] 10월 28일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송원리
(현 세종특별자치시 한솔동 첫마을)
사망 1971년 10월 21일[3]
충청남도 공주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214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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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현창석은 1922년 10월 28일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송원리(현 세종특별자치시 한솔동 첫마을)에서 아버지 현광삼(玄光三)과 어머니 경주 최씨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공주 일대에서 자기 땅만 밟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명망높은 부잣집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일본 도쿄 센슈대학에 재학하여 학업에 정진했다. 그러던 1940년 9월, 그는 박인석(朴寅錫)[4]· 채용석 등과 함께 식민통치의 부당성에 항거하기로 뜻을 모으고 투쟁방안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들은 먼저 동지포섭에 힘을 쏟아 전수대학 내 동급생인 정종락(鄭鍾樂)·김원식(金源植)·권오황(權五煌) 등을 동지로 규합하면서 1941년 11월까지 전후 수십차례의 모임을 갖고 조선인의 교육문제와 민족차별 등에 대한 토론을 거쳐 독립의식을 길러갔다. 그리고 이러한 동지결집의 발전으로 동년 11월에는 그의 주도로 항일결사 "우리조선독립그룹"을 결성하였다. 이때 그는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패전기의 혼란을 독립의 기회로 삼아 조선민중을 규합하여 일제히 봉기할 것을 역설하였다.

한편 그는 1941년 6월경 일시 귀국했을 때 고향의 동지들에게 동경(東京)에서의 항일활동 상황을 소개하고 "우리조선독립그룹"과 같은 형식의 공주(公州)그룹을 조직케하였다. 이렇게 국내외에 조직을 결성한 이들의 행동방략은 주요건물의 파괴 및 식량창고의 방화, 수도 및 도로를 파괴함으로써 일본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이었다. 또 회원은 활동구역을 각기 분담하였는데 그는 일본 도쿄 칸다(神田)지역을 맡아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조직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1943년 3월 체포되었고,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3월에 일본형사지방재판소에 기소되어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때 일본 경찰은 현창석이 모진 고문에도 조직원들의 이름을 자백하지 않자 조선에 살던 그의 어머니 경주 최씨를 일본으로 연행해 그가 보는 앞에서 거꾸로 매달아 놓고 모진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8.15 광복 후, 그는 고향에 돌아왔으나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탕진한 터라 가난에 허덕여야 했다. 그는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고, 부인 평산 신씨[5]는 자식들을 건사하기도 어려운 형편에 공주버스터미널 앞에서 포장마차를 하며 번 돈으로 부랑아들과 장애인들을 돌보다 콜레라에 걸려 1969년 8월 16일 사망했다. 1971년 10월 21일 현창석이 사망했을 때, 어린 자식들이 아버지 시신을 우마차에 실어 겨우 장례를 치렀다.

아이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너희 아버지는 바보다"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일본의 대학으로 유학까지 갈 정도의 엘리트였으면 대서방(代書房)이라도 해서 돈을 벌면서 잘살았을 텐데 선택을 잘못해 자식들을 고생시킨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그런 아버지가 창피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정부 도움이라도 받아볼 요량으로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다가 경찰이 찾아와 아버지 얘기를 꼬치꼬치 캐묻자 아버지의 '죄'가 드러날까 잔뜩 겁을 먹었고 그때 아버지가 생전에 고이 간직하고 있던 독립운동 관련 자료 보따리도 태워 버렸다고 한다. #

그러다 1982년에서야 비로소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그리고 1990년 10월 25일에 본래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


[1] 판관공파 25세 주(周) 항렬. [2] 연주현씨8수대동보 3권 895쪽에는 1923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3] 음력 9월 3일. [4]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박인석과 동명이인이다. [5] 신원칠(申元七)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