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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트 왕국 7대 군주 Heldebadus | 헬데바두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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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헬데바두스 |
라틴어 | Heldebadus | |
생몰 년도 | 미상 ~ 541년 | |
재위 기간 | 540년 ~ 54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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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고트 왕국의 7대 국왕.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시기 수도 라벤나가 함락당하고 비티게스 왕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가자 새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후 포강 이북의 영역을 확보하여 반격의 실마리를 만들었지만 1년만에 살해당했다.2. 생애
스페인 서고트 왕국의 국왕 테우디스의 조카로, 일디바드(Ildibad)로도 불린다. 540년 동고트 왕국의 국왕 비티게스가 잡히고 라벤나가 함락되었을 때, 힐데바두스는 베로나를 다스렸다. 당시 그의 자식 2명이 라벤나에 억류되어 있었기에, 그는 벨리사리우스와 항복 협상을 벌였다. 한편 동고트 귀족들은 동로마 제국에 계속 맞서기로 결의하고, 비티게스의 조카이자 파비아 수비대장인 우라이아스를 새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우라이아스는 이를 거절하고 헬데바두스를 새 왕으로 추대했다.그렇게 왕이 된 헬데바두스는 수도를 파비아로 옮긴 뒤 협상을 이어갔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가 비티게스 일가족과 일디바드의 두 아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데려가자, 그는 협상을 중단하고 전쟁을 재개했다. 당시 동고트 왕국의 영토는 파비아와 베로나에 국한되었고, 군대는 수천 명 밖에 안 되었다. 하지만 벨리사리우스가 떠난 뒤 남아있는 장군들이 서로 협력하길 꺼렸고, 역병의 창궐로 정부의 재정이 악화되면서 군인들의 급료가 밀리자 이탈리아의 동로마군이 토착민에 대한 약탈을 자행하면서 민심마저 떠나버렸다. 그는 이 틈을 타 왕국 재건에 착수했다.
541년, 헬데바두스는 트레비소 외곽에서 비탈리우스의 동로마군과 헤룰리 족 연합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비탈리우스는 가까스로 탈출했고, 헤룰리 족은 지도자를 잃고 패주했다. 헬데바두스는 조카 토틸라를 트레비소의 군사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 후 동고트 왕국은 포 강 이북의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여, 본격적인 반격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힐데바두스는 일찍이 왕으로 추대된 적이 있었고 포강 이북 평정에 큰 기여를 한 우라이아스를 경계하다가 우라리아스의 부인이 왕비와 다퉜다는 이유로 죽여버렸다. 이에 군대는 반감을 품었고, 541년 5월 게피드족 출신의 경호원 벨라스에게 암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