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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31 21:42:14

헤르베르트(은하영웅전설)

헤르베르트
Herbert ・ ヘルベルト
파일:attachment/175712.jpg
OVA
인물 정보
<colbgcolor=#eee,#222> 신체 정보 남성, ???cm, ?형
생몰년 ?
가족 관계 프리드리히 3세(아버지)
슈테판 폰 바르트바펠(숙부)
구스타프(큰형)
막시밀리안 요제프(작은형)
리하르트(동생)
국적 및 소속 은하제국 골덴바움 왕조 은하제국군
최종 계급 은하제국군 제국원수
최종 직책 은하제국군 동맹령 원정함대 사령관
최종 작위 대공
기함 괴팅겐
미디어 믹스 정보
성우 파일:일본 국기.svg 오디오북 이시노 류조
1. 개요2. 생애
2.1. 유력한 제위계승권자2.2.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사2.3. 처참한 패배2.4. 무능한 패배자
3. 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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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은하영웅전설의 등장인물. 본편에서 150년도 더 전의 인물로, 은하제국 20대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삼남이었다. 작위는 대공, 계급은 제국원수, 기함은 괴팅겐.

2. 생애

2.1. 유력한 제위계승권자

헤르베르트는 프리드리히 3세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나름 미남이었고 건강했으며 행동력이 뛰어나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또한 활달하면서도 상황에 따라서는 조심스럽게 행동할 줄도 알았고, 친구나 부하들에게 다소 강압적이었지만 친절함과 인망도 있었다. 특히 헤르베르트는 술을 마실 때마다 "내게 더 높은 지위와 강한 권력이 있다면 자네들에게 훨씬 풍요로운 우정의 증거를 보여줄 텐데."라고 말해서 인망을 더욱 드높였다.

그러나 헤르베르트는 매사에 신중함이 부족하며 자만이 심했고 황실의 일원으로 태어나 살면서 고난을 겪어본 적이 없다보니 성격적인 부분에서 크게 부족한 찌질이였다. 헤르베르트가 살면서 겪어본 힘든 일이라고는 사냥을 나가 노리던 사냥감을 놓친 일, 작은형 막시밀리안 요제프를 모시는 시녀[1]에게 추파를 던지다 퇴짜를 맞은 일 정도밖에 없었다. 황위 계승권을 지닌 황실의 일원으로서 형의 시녀에게 추파나 던지고 다니는 것은 좋은 모습이 아니다.[2]

헤르베르트는 야심이 있었으므로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과 쌍둥이처럼 닮은 동생 리하르트 역시 제위를 노리고 있었고, 두 사람은 형제이면서도 서로를 극렬히 증오했다.

어쨌든 당시 황태자는 장남 구스타프였으므로 헤르베르트가 제위에 오를 일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구스타프는 너무 병약하여 황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고, 결국 프리드리히 3세는 구스타프 대신 헤르베르트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때마침 제국령 변경에서 우연한 군사 충돌을 계기로 대규모 반란군의 존재가 제국 정부에 알려졌고, 프리드리히 3세는 헤르베르트에게 반란군을 토벌하는 원정함대 사령관직을 수여하여 제국 정부과 군부의 고위인사들에게 차기 황위 계승자가 임명되었음을 간접적으로 공표하였다. 그동안 원정계획에 대해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던 중신들은 황제의 의중에 맞추어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사'라고 원정계획을 칭송했다.

그러나 숙부인 슈테판 폰 바르트바펠 후작이 이 결정을 반대했다. 후작은 황제와 헤르베르트 대공의 면전에서 "보급도 어렵고 지리적으로도 불리한 이 원정의 사령관 자리를, 전쟁과 카드놀이도 구분 못 하고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는 교만한 자에게 던져주다니 무슨 망령된 짓이냐"[3]며 그 둘을 동시에 강하게 비판했다. 당연히 헤르베르트는 자신의 원정군 사령관 임명에 반대하는 바르트바펠 후작에게 격한 분노를 터뜨렸으나, "죽기 싫으면 원정 지휘할 생각은 접어라, 황제 자리를 바란다는 자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도 구분 못 하느냐"는 후작의 일침은 정론이었기에 제대로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러나 헤르베르트는 바르트바펠 후작이 우주를 제국령과 반란세력으로 나눈 것을 꼬투리잡았고, 여기에 바르트바펠 후작이 골덴바움 가문의 장래가 기대된다고 비꼬면서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처벌받자 바르트바펠 후작은 몰락한다.

2.2.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사

바르트바펠 후작을 수도 오딘에서 쫓아낸 프리드리히 3세와 헤르베르트는 원정 준비를 서둘렀다. 함정 5만 2600척, 장병 440만 8000명이 원정함대에 편성되었고, 프리드리히 3세는 여기에 헤르베르트를 보좌할 노련한 제독들을 참모진에 배치시켰다. 그러나 헤르베르트는 여기에 반발했고, 프리드리히 3세는 한발 양보하여 원정군 인사권의 절반을 헤르베르트에게 주었다. 그리고 헤르베르트는 사교실 친구들에게 군 계급을 하사했고, 난생처음 군복을 입는 20대 장성 네 명, 영관장교 8명이 탄생했다. 이 추태에 뜻 있는 중신들과 제독들은 눈살을 찌푸렸다고 한다.[4]

그렇게 사령부 인선을 마친 헤르베르트는 제국원수에 올라 원정을 떠났다. 수도를 출발한 지 25일만에 제국군은 후일 이제르론 회랑으로 불릴 공역에 진입했다. 헤르베르트는 처음에는 긴장감을 유지했지만 두 달[5]이 지나자 긴장의 끈을 놓아버렸다. 한때 충고를 들으면 잠깐 긴장하기도 했지만 하루만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으며, 나중에는 군복도 입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헤르베르트가 임명한 참모, 아니 사교실 친구들은 이 행태를 말리기는 커녕 동참하여 사령부를 사교실로 바꿔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참모들은 헤르베르트가 장식품처럼 있으면 공을 세우기 쉬웠기 때문에 대공의 추태를 묵인했다.[6]

헤르베르트는 이제 긴장감을 완전히 놓아버리고 유흥에 전념했다. 그는 술을 마시고 도박과 사격 연습에 매진했으며 병사들의 격투기 훈련을 관람하고 부하들이 가져온 '수상쩍은' 입체 VTR 영상으로 시간을 때웠다. 몇몇 사람들은 헤르베르트가 미남 소년병을 데려오라고[7] 요구하지 않을까 두려워했지만 헤르베르트는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다.동성애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8]

하지만 참모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건 헤르베르트의 현지 시찰이었다. 함대가 진군하며 이런저런 사고가 생기자 헤르베르트는 거기에 흥미를 보여 기함 스크린으로 사고 소식을 접했고, 나중에는 휘황찬란하게 치장한 전용 셔틀을 타고 사고 현장을 일일이 방문했다. 시찰이 있을 때마다 원정군은 진군을 멈췄기 때문에 참모진은 머리를 짜내 어떻게든 헤르베르트가 전장에 관심을 가지도록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참모로 종군했던 고틀리프 폰 잉골슈타트 중장은 "말하자면 전하께는 모든 것이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사건일 뿐이네."라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르트바펠 후작의 비참한 말로를 모두 알고 있는 데다가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전투에서 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9] 헤르베르트에게 직언을 하려는 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2.3. 처참한 패배

우주력 640년, 제국력 331년 7월 14일, 이제르론 회랑을 빠져나온 제국군은 회랑 출구 방면에 위치한 다곤 성역에서 동맹군과 전투상태에 들어갔다. 첫 전투는 선발 분함대끼리 벌어진 조그만 조우전으로, 양측은 3천만 km 거리에서 서로 찔끔찔끔 포격을 주고받다가 서로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틀 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제국군은 자유행성동맹군 올레빈스키 함대를 종심진 깊숙이 끌여들여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첫 전투에서 작지만 제국군 최초의 승리를 거두자, 장병들을 치하하며 전원의 식사에 포도주를 배급하고 직위와 명예를 약속하여 제국군의 사기를 드높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행동하여 문제가 없을 때에는 과하게 낙천적이고 문제가 발생하면 과하게 비관적인 성격을 가진 탓에, 작은 승리를 거둔 상태에서 자신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 자신하더니 황위계승자로써 자리를 명백하게 굳혔다며 기쁨에 도취되었다. 급기야 큰형은 오래 못 살 사람이니 편안하게 내버려두고 작은형은 자신의 분수를 잘 알고 있으니 영지와 직위를 하사하고 동생 리하르트는 건방지게도 제위를 노리고 자신과 경쟁했으니 가만두지 않겠다[10], 덤으로 작은형의 시녀인 지클린데가 감히 자신을 무시했다며 황제가 될 사람을 무시한 죄가 얼마나 중한지 깨닫게 해주겠다는 식으로 먼 미래의 계획까지 세웠고, 끓어오르는 흥분을 억누르지 못하며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상식을 무시한 공세에 동맹군은 당황했지만 제국군은 동맹군보다 더 당황했다. 그들은 난생처음 발을 디딘 성역에서 적과 아군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전투를 치러야 했다.[11] 7월 18일 정오 헤르베르트 대공이 지휘하는 제국군 본대는 동맹군 본대와 전투를 벌였으며, 헤르베르트 대공은 눈앞에 적의 광선이 날아오는데도 전혀 겁먹지 않았다. 대공의 용감한 태도를 본 제국군의 사기를 크게 올랐고 동맹군을 압도하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하지만 안드라슈 제독이 달려와 제국군의 우측면에 포격을 날렸고, 이를 동맹군의 포위섬멸전법으로 본 제국군 참모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헤르베르트 대공이 전진 중단 명령을 내리면서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7월 19일, 동맹군 사령관 링 파오 중장과 유수프 토패롤 중장은 마침내 제국군의 공세가 별다른 계획 없이 이루어진 것임을 파악하고 적 본대에 대한 총공격을 수행한다. 무능한 대공을 대신하여 함대를 지휘하던 잉골슈타트 중장은 분진합격 전술로 동맹군에 대항하고자 했지만 지리에 무지한데다 연락에도 어려움을 겪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12] 7월 20일에는 제국군 파센하임 중장이 동맹군 외르스테드 함대를 아군으로, 제국군 알렌슈타인 함대를 적으로 착각하여 아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실책을 저질렀고, 그 틈을 이용한 외르스테드의 맹공으로 파센하임 중장이 전사했다.

제국군 역사상 첫 제독 전사자가 나오자 분노한 헤르베르트는 잉골슈타트 중장을 불러 그를 무능력자라고 매도하면서 계급장을 뜯어내어 바닥에 던져 짖밟았다. 이 사건으로 잉골슈타트를 비롯한 제국군은 무인(武人)의 긍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헤르베르트는 그들을 물리고 자신이 직접 작전을 지휘하려고 했다. 하지만 헤르베르트가 성급히 보낸 집결명령은 동맹군에게 방수되었고, 헤르베르트는 제 손으로 아군의 허점을 적에게 알려준 꼴이 되었다. 적의 명령을 방수한 링 파오 중장은 적의 잔여 병력이 집중될 때 포위공격하라고 명령했다.

7월 21일, 동맹군 네이스미스 위드 중장이 제국군 좌익에 일제포격을 퍼부은 것을 시작으로 동맹군은 제국군을 유린하며 포위망을 완성해 나갔다. 하지만 동맹군의 병력이 적어서 포위망이 얇았기에 제국군이 정신을 차리고 돌파를 시도하면 충분히 뚫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링 파오와 유수프 토패롤은 헤르베르트가 포위망 돌파를 시도하지 못하도록 심리적으로 압박했고, 헤르베르트는 공황에 빠져 돌파는 시도도 하지 못했다. 결국 제국 원정군의 9할이 소멸하고, 헤르베르트는 마지막 순간 돌파를 시도한 부하 덕에 간신히 포위망을 탈출하여 제국령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2.4. 무능한 패배자

패잔병을 이끌고 수도로 돌아온 헤르베르트는 더 이상 유력한 제위계승권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아버지와 황제의 권위, 제국군의 명예를 모조리 짓밟은 패배자로 전락했고, 제위 계승 가능성도 저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원작에서도 돌아오는 모습은 출전할때 그리도 의기양양하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멘붕한 상태였다고 나올 정도. 하지만 아무리 패배자라도 엄연히 '신성불가침'한 황족이었기에, 패전의 책임은 잉골슈타트 중장이 모두 뒤집어썼다. 헤르베르트 대공은 처벌 대신 별궁에 유폐당한 채로 정신과 의사의 치료를 받았다.

그의 몰락과 함께 '검붉은 6년'이라는 대혼란기가 시작되었다. 유력한 제위계승권자가 몰락하자 제위계승경쟁은 매우 격렬해졌고, 제국은 극도로 혼란에 빠졌다. 이 시기에는 황제조차 근위대를 믿지 못해서 근위사단을 견제하는 부대를 따로 창설할 정도였다. 프리드리히 3세가 죽자 그의 이복형 막시밀리안 요제프가 제위에 오르고, 그 다음에는 프리드리히 3세의 장남 구스타프가 제위에 올랐다. 그런데 구스타프는 헤르베르트의 부하에 의해 독살당했고, 죽기 직전 동생 막시밀리안 요제프에게 제위를 넘겨주었다. 그가 바로 골덴바움 왕조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라고 불리는 '청안제'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이다. 이후 행적은 불명이지만 평생을 정신병원에 갇혀져 죽었을 듯 하다.

3. 기함

괴팅겐
Göttingen · ゲッチンゲン
함선 정보
<colbgcolor=#eee,#222> 함명 괴팅겐
식별 번호 없음
함종 표준전함
선적 은하제국 골덴바움 왕조
선주 헤르베르트
크기 전장 710m, 전폭 120m, 전고 149m
무장 함수 광선포 6문
승무원 불명
건조 ?
침몰 생존[13]
함장 불명

괴팅겐은 헤르베르트의 기함이다. 이름의 유래는 독일 니더작센주에 있는 도시 괴팅겐.

괴팅겐의 형상은 현대 제국 표준전함과 비슷하다. 헤르베르트가 살던 때까지만 해도 함대의 규모가 수천 척에 불과했기 때문에 후대와 달리 따로 함대 기함을 만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괴팅겐도 함선 자체는 평범한 표준전함이었다. 괴팅겐이 속한 제국군 표준전함은 당시 제국군의 주력 함선으로 운용되었으며, 과거 은하연방 시기의 전함을 발전시킨 전함이다. 함수에는 6문의 대구경 광선포를 탑재했다. 이는 100년 뒤인 제2차 티아마트 회전에서 투입된 제국군 표준전함에 계승되었다.

다곤 성역 회전에 제국군 총기함으로 참전했으며, 제국군이 몰살당하는 와중에도 어찌어찌 탈출하여 오딘으로 귀환했다.


[1] 이 시녀가 바로 훗날 막시밀리안 요제프 2세의 황후가 되는 지클린데이다. [2] 그러나 이런 행실불량은 넘어가질 수 있는 문제다. 어차피 그 형이라는 작자가 말만 형이지 서자에 불과한지라 진짜 지지가 필요한 문벌귀족에게는 넘어가질 수 있는 문제고 어차피 골덴바움 황제들은 대부분 사생활이 좋지 않았다. 진짜 문제는 살면서 겪어본 고난이라는게 사냥 실패와 퇴짜당한 것일 정도로 너무 온실 속의 화초로 살았다는 것으로 이런 경우 진짜 고난을 겪으면 이겨내기 어렵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3] 앞서 말했듯 헤르베르트는 힘든 일을 너무 안 겪어봤다. 이런 사람이 위기상황에서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리 없고 전쟁은 언제나 위기상황이 닥칠 수 있다. 애초에 원정 자체에도 부정적으로 보며 반대한 바르트바펠 후작이었으니 위기상황은 상정해두었을텐데 그러면 당연히 반대하는게 맞다. [4] 문벌귀족이라면 아무 능력이 없어도 장성, 영관은 자동 가능한게 제국군이지만 처음부터 장성급을 달아주지는 않았다. 또 그들이 무능하다는 것도 알기에 이처럼 중요한 자리에는 본인이 강력 희망하지 않는 이상 넣어주지도 않았다. 생각이 있다면 불쾌한 것도 당연한 일. 심지어 군 수뇌부는 문벌귀족 출신들이 장악했는데 이들은 그냥 명예욕 수준으로 군계급을 달고 있는 장식들과는 달리 나름 실력 쌓고 올라온 진짜 군인들이다. 예시로 작중에서 우주함대 사령장관으로 나온 뮈켄베르거 원수도 사관학교 수석 경력이 있다. 문벌귀족이니 특혜는 받았겠지만 그래도 '처음 군복입는 20대 장성' 따위랑은 격이 다르다. [5] 사실 작중 시점에서는 두 달까지 걸릴 거리는 아니다. 제8차 이제르론 공방전 당시에 오딘에서 출발한 가이에스부르크 요새가 이제르론 요새에 닿는데 1달 정도 걸렸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시엔 기술력 문제로 시간이 더 오래 걸렸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160년 전 이야기라서 말이 되는 설정이기도 하고. 이보다 다시 100여년 전인 장정 1만 광년 시기에는 조잡한 우주선과 항로를 모른다는 설정 때문인진 몰라도 제국 변경에서 하이네센까지 가는데 반세기나 걸렸다. [6] 보통같으면 말도 안 되지만 다행히 프리드리히 3세는 헤르베르트에게 넘긴 절반을 빼면 꽤나 신경을 써서 배치했으므로 이 절반으로도 감당할 수 있었고 이 상황에서는 괜히 아무것도 모르면서 간섭하기보다는 알아서 하게 넘기고 있는게 나았다. 실제로도 다곤 성역 회전 중후반부에 헤르베르트가 본격적으로 간섭하면서 제국군에게 재앙이 열린걸 감안하면 이 말은 맞는 셈이다. [7] 제국군에는 여군이 없기 때문이다. [8] 루돌프 폰 골덴바움이 군인 시절 동성애를 근절했다고 묘사된 것을 보면 제국에서도 동성애는 굉장히 금기시된다고 유추해볼 수는 있다. [9] 이건 경계심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것도 아닌 것도 한 몫을 했다. 애초에 원정 시작 전부터 '대규모 수렵' 이라고 했을 정도니... [10] 리하르트는 경쟁 상대인 헤르베르트가 사령관이 되었다는 것에 겁을 먹었다고 한다. [11] 이와 관련하여 제국군 슈미틀리 제독이 "적이 어디에 있냐"고 묻자 오퍼레이터가 "지금은 그보다도 우리가 어디에 있냐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급선무입니다." 라고 대답한 것이 있다. [12] 이는 헤르베르트에 의해서 워낙 제국군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13] OVA 한정으로는 침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