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bert Brunnegger(1923~2002) | |
출생 | 1923년 |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 |
사망 | 2002년 (향년 78~79세) |
복무 | 슈트슈타펠 |
1938년 ~ 1945년 | |
최종 계급 | SS 중사 |
신체 | 176c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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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무장친위대에 입대하였으며 최종계급은 SS중사.[1] 보병이자 통신병, 운전병 등 여러 직종을 거쳤다. 전쟁이 끝난직후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귀향하여 이후 회고록 '폭풍 속의 씨앗'을 썼다. 그 후 2002년에 사망했다. 2급 철십자 훈장과 데미얀스크 참전 기장을 수여받았고 베를린 공방전 당시 1급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을 예정이었지만 전쟁이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면서 결국 받지 못했다.독일어권 이외의 언어로 번역 출간된 것은 한국어판이 최초로서, 밀리터리 서적의 출판이 매우 빈약한 한국 출판시장에서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2. 회고록
2.1. 무장친위대 입대
15살에 육군 입대영장이 날아와 그대로 입대했다. 처음엔 착오인 줄 알았으나 착오가 아니었고, 결국 육군 대신 SS에 지원해 15살의 나이에 무장친위대에 입대해 독일군 최연소 병사가 되었다.[2] 그가 배속된 부대는 다름아닌 그 유명한 제3SS기갑사단.처음엔 말단 보병으로 강제수용소의 경비를 서게 되었다. 경비로 서면서 수감자들과 대화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3] 그 외에도 카포에게 폭행당하고 있던 노인을 도와주기도 했다고 한다.[4]
1938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를 합병할때 투입되었다가 다시 강제수용소 경비로 복귀했다. 이때 강제수용소 보초를 서는 동안 여러 일들이 일어났는데 한 수감자가 탈출을 감행하여[5] 영국까지 갔다고 한다. 그 외에도 변호사 출신의 예비역 SS 하사가 술에 잔뜩 취한 상태로 나치를 욕하다가[6] 계급을 박탈당하고 강제수용소에 수감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체코 지역을 점령할때도 투입되었는데, 회고록에 따르면 한 일이라고는 행군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 외 분대원 중 하나가 사슴을 침입자로 오인해 기관총으로 갈겨버린 일도 있었다고. 어찌되었던 매번 청어만 나오던 병영식에 질리던 중대원들에게 별식으로 사슴고기가 나와서 좋았다고.
2.2.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대전이 발발하자 그가 속한 토텐코프 사단도 국경을 넘어 폴란드 영내로 진입한다. 하지만 후방부대여서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않았고, 폴란드 패잔병들을 찾아내서 무장해제하는 임무를 맡았다. 심지어 기관포까지 장비한 멀쩡한 폴란드군이 독일군이 나타나자 전투는 하지않고 겁을 집어먹고 무기도 내팽겨치고 도망치는 모습도 봤다고. 폴란드전이 끝난후엔 서부로 이동하여 1940년 프랑스 침공에 참여한다. 당시 유럽 최강을 자부하던 프랑스군은 어이없게 무너졌지만 영국군은 프랑스군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끈질기고 악랄했다고 회고록에서 소회하고 있다. 당시 국제법상 금지되었던 할로 포인트[7]를 리-엔필드나 보이스 대전차 소총이나 브렌 경기관총에 넣어 쓰거나, 항복하는 척 하다가 기관총 쏘고 수류탄 던지고 도망가는 등 치졸한 짓들을 하여 장병들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한다.[8]르 파라디에서 그는 프리츠 크뇌힐라인 SS 대위가 영국군 포로 89명을 집단총살하는 르 파라디 학살을 보게된다.[9][10]
서부진격이 끝나고 남프랑스 지역에 주둔하게 되었고, 1941년 6월 독소전쟁 준비로 동프로이센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계속 그 곳에만 있게 된다.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자신과 친분이 있던 단처라는 병사가 총살당하는 에피소드를 겪었고[11], 본인은 과속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내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당연히 처벌 대상이었지만, 군의관이었던 에르잠 SS 대위와 짜고 "일시적 시각장애" 판정을 얻어내 군법 재판에는 회부되지 않았다고 한다.[12]
2.3. 동부전선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기 전 당시 병사들 사이엔 온갖 소문이 돌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믿고 있던 소문이 '소련이 독일로부터 각종 공업기술을 제공받는 댓가로 우크라이나를 25년간 분리시켜 독일에게 임대해주게 되었는데 우린 우크라이나에 치안유지군으로 가는 것'이었다. 일부는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곧 전쟁이 벌어질 것 같아서 가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대다수는 '설마 그러겠냐'고 그냥 웃어 넘겼다. 동부전선이 개전되자 모두 당혹스런 분위기에 사기도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소련이 동맹의 뒤통수를 쳤다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13] 만약 그 당시 진실을 알았다면 어떻게 생각했을지... 브루네거가 속한 토텐코프 사단은 이후 국경을 넘어 동쪽으로 전진해서 7월 스탈린 선에 도착하기 전까진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 스탈린 선에 도착했을 때 비록 공사가 다 끝난 상태가 아니었지만 이 방어선을 뚫기 위해 적지 않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스탈린 선을 돌파한 후 브랸스크까지 진군하지만 겨울이 오면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설상가상으로 소련군에 의해 포위되고 만다.1942년 중순 포위망을 돌파하여 아군과 합류하기까지 토텐코프 사단이 겪은 고난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탄약과 식량, 피복 등 모든 물자가 부족해서 개고생을 해야 했다. 이러한 고난은 회고록에 매우 생생하게 적혀있다. 게다가 소련의 신형 중형(中型)전차인 T-34-76의 출현, 소련군의 끊임없는 압박과 공격으로 포위망을 돌파하여 아군과 합류할때 쯤에는 병력수가 4분의 1로 줄어있었다.[14] 이 기간동안 저자는 식물학자이자 대학교수로 SS에 입대한 그뤼테 SS 소위[15]의 운전병으로 배치되었다.[16] 브랸스크 포위전 동안 브루네거도 여러가지 경험을 겪었다. 크뇌홀라인의 명으로 신병 2명을 데리고 소련군의 수중에 들어간 다리를 폭파하기도 했고 정찰활동 중 소련군과 만났는데 이때 그 소련군들이 같은 소련군들로 착각해서 무사히 넘어갔다.[17] 한가지 특이한 건 이 당시에는 무장친위대도 아인자츠그루펜 같은 개막장 인종말살부대를 빼면 포로로 잡은 소련군을 제대로 된 포로취급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브루네거도 인종말살부대가 포로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목격했다.[18][19]
2.4. 부상과 후방으로 이송
쿠르스크 전투가 벌어지기 전 브루네거는 하사로 진급한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그는 공군 소속의 부사관에게 진지를 안내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가 돌아가고 밤에 독일군으로 위장한 소련군 별동대의 기습을 받으나 격퇴한다. 이때 포로로 잡은 소련군 사관후보생으로부터 놀라운 사실을 접한다. 바로 얼마전에 왔다간 부사관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변절해서 소련군 스파이로 일하고 있었다는 것.[20] 그 부사관은 육군 상사로 위장해서 다른 부대에 나타났다가 체포되어 총살당했다고 한다. 이후 전투가 벌여지고 부상을 입은 브루네거는 이후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폴란드 바르샤바에 주둔하게 된다. 주둔기간 동안 바르샤바는 하루에도 몇번씩 테러가 일어나고 외출나간 독일군 병사들이 하수구나 골목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등 치안이 영 좋지 않았다. 이때도 몇번 죽을 뻔했다.[21]다시 그는 1944년 중후반 이탈리아 무장친위대로 배속받은 뒤 바르샤바에 비해 상대적으로 양호한 북이탈리아에 주둔하면서 중사로 진급한다. 그가 주둔하는 북이탈리아도 바르샤바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처지였지만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여기도 빨치산들이 존재하고 있었고 게다가 폭격이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어졌다. 한번은 미군 폭격기가 병원열차를 폭격해서 안에 탑승했던 부상자들이 죄다 타죽는 일이 있었는데 이때 폭격기가 대공포에 맞고 격추, 안에 탑승했던 조종사가 죽기 직전까지 이탈리아 병사들에게 얻어맞고 증언했는데 다름 아니라 상부에서 독일 병원열차에는 부상자 대신 전선으로 향하는 무기가 실려있다고 가르쳤다고 한다.[22] 1945년 1월 함부르크로 이동하여 소대장으로 부임.[23] 4월 전선에 투입되기까지 어린이와 중장년층들로 이루어진 1개 소대의 훈련을 맡게 된다.
2.5. 종전과 포로
1945년 4월 마침내 다시 전선에 투입된다. 여기서 그의 소대가 속한 중대의 중대장으로 온 사람은 경험많은 장교나 부사관이 아닌 이제 겨우 사관학교를 나온 애송이 소위였다. 결국 그는 경험없는 소위를 대신해서 사실상 중대장을 맡게 되었고[24] 히틀러 유겐트와 국민돌격대원들로 이루어진 중대를 이끌고 소련군과 전투를 치른다. 소련군과 끝없이 전투를 치르면서 서쪽으로 후퇴하지만 이미 사단본부는 와해되었고 소련군 대포진지를 급습하고 퇴각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게 되었다. 결국 그는 중대원들에게 행동의 자유를 주고는 자신도 몇몇 전우들과 개별적으로 후퇴하던 도중 소련군에게 붙은 국방군 병사의 신고로 소련군에게 붙잡힌다. 소련군에 학대 당하면서 뮌헨베르크 근교에 도착한 브루네거는 카민스키 여단을 색출하던 소련 총살대에게 소련인으로 오해받아 살해당할 뻔하지만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독일 군의관이 살려줬다. 그리고 낙오되어서 총살당하기 직전 어느 맘씨 좋은 소련군 병사의 도움으로 포로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게 된다. 포로들이 행군하는 도중에 정말 씁쓸하고 기분이 더러워지는 장면이 있는데, 독일군 포로에게 물을 가져다준 5~7살쯤 되어 보이는 독일의 여자아이가 소련군들에게 근처 헛간으로 끌려갔는데,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포로들이 가보려 하자 소련군들이 못 가게 막았고, 나이 많고 자식이 있는 중년 독일포로만 통과시켜줬는데 피 묻은 속옷을 입에 재갈로 묶은 채로 여자아이를 강간하고 죽인 현장을 보고 아무 말도 못하고 충격먹은 얼굴로 "그들이 죽였어"라고 말했다.
전쟁에 승리한 소련군의 자의에 내맡겨진 상태라 합법적인 수단으로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양측의 무장을 한 병사들 간의 전투는 끝났다. 이제는 승리자가 칼자루를 쥐고 무엇이 옳은지 결정했다. 패배자는 모든 죄를 짊어진 채 온갖 굴욕과 폭력을 항상 '내가 죄인입니다'하는 자세로 감당해야 했다. 이제 전투 의지와 전우애는 소용없었다. 전우들은 죽었다. 그들은 북부의 늪에서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며 썩어가고 있었고, 남부에서는 그들의 무덤 위에 거리가 만들어지고 도시가 세워질 것이다. 이제는 뻔뻔함, 위장, 미혹시킴, 거짓말, 위험 감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새 무기가 되어야 했다. - 폭풍속의 씨앗. 헤르베르트 브루네거, 512페이지 |
이 말을 쓴 이후에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는 감시역인 독일 육군 장교의 눈길을 피해서 다친 다리의 근육을 불리고 최대한 오래 걷기 위한 훈련을 남몰래 시작하면서 탈출의 시작을 준비했다. 이후 병원에서 근무하던 마틸데 간호사의 도움으로 탈출, 군사분계선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성공한다.
2.6. 도피생활 그 이후
이렇게 전범 재판을 받지 않고 민중 속으로 몰래 잠입한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는 1965년 1월 6일 주현절부터 회고록을 쓰기 시작, 르 파라디 영국군 공동묘지의 방명록에서 주소를 하나 찾아낸다. 그 주소는 당시 크뇌홀라인 대위가 서부전선에서 전범 행위를 할 때 해당 지역에서 전투했던 로열 노퍽 연대 참전군인 모임을 이끌던 영국 육군 장교의 주소였으며, 해당인과 편지를 수년간 주고받으면서 양측의 진상을 규명했다.이 결과 회고록의 123페이지에 나온 사진처럼 1985년 3월 27일자 이스턴 이브닝 뉴스에서 영국 육군에 대한 집단학살을 보도하면서 증인으로 나왔으며 그 결과로 전범 재판을 사실상 면제받았다. 이는 다른 전범의 행위를 입증할 증인 역할을 했으며 이로 인해 영국 내에서도 지지자들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종전 후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는 점도 한 몫 했다.
이를 통해 사실상 사면받은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는 2000년, 2차대전 때 참전했던 장병들과 당시 어린이였던 수녀를 비롯해 많은 이들을 만나고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해서 회고록인 폭풍속의 씨앗을 출간했다.
3. 한계점
위에 언급된 폭풍속의 씨앗 내용만 본다면 헤르베르크 브루네거는 SS대원이지만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선 중립적이며 당시 나치가 행한 홀로코스트와 인종말살부대의 민간인, 포로학살 등에 대해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본문에서도 이를 증언하는 등, 나치 관계자로서는 양심있는 개인처럼 보인다. 그리고 영국군인협회와 함께 르 파라디 학살사건을 밝혀 신문에 난 적도 있다.하지만 보통 좋은 말만 쓰는 추천사에서도 개인차원에서는 몰라도 집단차원에서는 과거를 미화하려는 유혹에 넘어갔다는 언급을 할 정도로 객관적인 책이라고 말하기에는 힘들다.
3.1. 회고록
헤르베르트 브루네거의 폭풍속의 씨앗은 회고록이라는 특성상 객관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회고록 자체가 자신이 겪은 일을 회고하면서 쓰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불확실한 기억에 의존하는 데다가 자신에게 불리한 일은 변조하거나 적어도 옹호하려고 하기 때문에 제3자의 감수를 받지 않으면 자기변호적인 책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회고록인 이상 극복이 불가능하다.따라서 회고록에 나와있다고 해서 그 사실을 100% 신뢰하면 안 된다. 만일 회고록에 나온 내용이 전부 객관적인 사실이라면 나치 독일에서 활동한 수많은 장성들이 낸 책에서 나오는 "나는 나치즘을 몰랐다"는 말이나 "나는 국가에만 충성했다"는 식의 철면피 같은 변명도 그대로 받아줘야 하는데 이게 말이 안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회고록에서는 교차검증이 가능한 내용만 신뢰하는 것이 제일 이롭다.
특히 본인이 소속된 부대원 대부분이 전쟁중 사망하였거나 설사 살아남았더라도 전후 소련으로 압송되었다는걸 생각한다면 교차검증이 상당히 힘든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3.2. 자원입대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는 자신이 15세에 징병영장을 받고 친위대에 지원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렇게 자원입대한 경우랑 나중에 징집된 경우랑은 전후 대우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 일단 그가 지원했는지에 대한 여부는 자세하게 나오지 않지만, 일단 본문에 지원했다란 말이 있긴 있다.1938년 4월 11일 한 식당 홀에서 지원병 신체검사가 이뤄졌다. 나는 지원자 140명 중에서 다른 10명과 함께 'SS 토텐코프 부대' 입대 적합 판정을 받았다. - 폭풍속의 씨앗. 헤르베르트 브루네거, 8페이지 |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의 친위대 전군 구성인원들은, 당시 나치 독일 기조 상 매우 엄격하게 심사해서 뽑는 것이 기본이었다.
일단 등 떠밀린 경우라 해도 면접시험 과정 등에서 지원자 태도가 어떻든 면접관의 판단 상 스스로의 명확한 의사로 지원한 자원입대자여야 하고, 신체적합성과 질병여부 및 부위별 건강상태가 양호해야 일단 1차 합격. 이후 나치당에 대한 충성여부를 판별하는 사상검증부터 시작해 지원자네 집안과 주변인들에게 얻어온 사생활 행적 풍문+사회적 평판, 지원자의 가족/지인들의 전과기록여부나 지원자 측과의 관련여부는 물론 학교생활기록부나 특기사항 및 스펙들까지 아예 인성검사나 인적사항 확인조차도 넘어선 인생해부 수준으로 엄격하게 따졌다.
또 그 관문을 거치면 아리안주의 사상 이념 하에서 행해진 순수혈통 아리아인 검증과정이라는 사실상의 최종 관문이 기다렸다. 허점도 알고 보면 많았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이기적이고도 철저한 분류기준으로 합격자가 추려졌다. 그 과정도 살벌했는데, 아예 자기 집안의 전체적인 가계 구성도마저 뽑아와서는 혹시 유대인의 피가 섞이진 않았는지의 유전학적 여부나 외관요소까지도 되려 입증해야 했다.[25]
즉, 무장친위대가 이렇게나 자부하던 깐깐한 순수 아리아인 혈통만을 선발하는 방식의 인원 구성 원칙을 포기한 계기는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진 다음에 동부전선에서 창설멤버를 필두로 한 무장친위대원 베테랑들의 대량손실을 겪은 후다.[26][27]
그런데 1938년은 아직 전쟁이 시작되기 전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는 징병대상자라고 하더라도 해당자가 무장친위대에 입대를 자원하면 군 복무를 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아돌프 히틀러의 허가가 있었으며, 당시의 친위대는 나치당 입당의 지름길로 알려졌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자원자가 폭주했다. 이 때문에 징병권을 행사하던 육군에서 친위대의 크기를 너무 크게까지는 만들지 말란 불만이 쏟아졌고, 친위대를 기존의 돌격대처럼 엄청난 크기의 통제불능급 괴물론 만들기 싫어한 히틀러도 이에 동의했다. 그래서 친위대는 전쟁이 전까지 엄격한 인원구성의 원칙을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도 육군의 징병대상이었지만 징병심사장에서 나치 친위대로 자원입대를 선택했고, 140명의 지원자중 10명 정도라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상당한 나치 지지자였다는 것을 알수있다.
3.3. 토텐코프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는 자서전에서 항상 자신이 속한 조직인 제3SS기갑사단를 자랑스러워 했으며, 특히 그 중에서도 전쟁 초반부터 참전한 고참들을 매우 뛰어난 전사이자 전투원으로 칭송했다.[28] 특히 아인자츠그루펜과 디클레방어 사단과 같은 인종말살을 전문으로 하는 쓰레기 사단과는 전혀 다르다고 선을 긋기까지 했다. 여기에 더해서 앞서 나온 크뇌홀라인 대위같은 전범은 조직과는 무관한 예외중의 예외라고 하기까지 했다.하지만 이 자는 토텐코프란 조직 자체가 전범중의 전범이라는 점은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이들은 해당 문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치가 세운 불법 사설강제노동수용소 경비부대인 토텐코프 연대를 근간으로 확장된 부대다. 강제노동수용소 간수의 표식인 해골이 그대로 부대마크가 되었을 정도.[29][30] 당시 토텐코프가 관리한 강제노동수용소 역시 나치당이 불법으로 세운 사설시설로, 나치당에게 반대한 사람들을 제대로 재판도 받지 않고 강제로 수용한 후 식사와 수면을 제대로 제공하지 않은 채 가혹한 노동과 학대를 한 곳이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면 아우슈비츠의 프로토타입이라고 보면 된다. 나중에 전투전문부대가 되긴 했지만 이런 막장스런 과거를 감출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전쟁때도 각종 학살을 수없이 저질렀다. 그의 입장에선 그래도 아인자츠그루펜같은 부대보단 낫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전후 연합군 입장에선 다 그놈이 그놈이었기 때문.
그나마 전쟁 중반 이후에 친위대로 강제전입되거나 징병된 인원들은 수용소 경비 업무와는 관계가 없고 그냥 명령대로만 싸웠다는 정상참작이 가능하지만 브루네거처럼 전쟁 이전이나 초반에 자원입대한 이들은 그런 경우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즉 헤르베르트 브루네거가 자랑스러워했던 전쟁 초반의 토텐코프 부대의 베테랑들 역시 다 원조 전범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다.
3.4. 그 외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는 강제수용소 경비를 지냈던 경력이 있었기에 만약 그가 탈출하지 못하고 그대로 있었다면 최소 굴라그행이었는데다가 심할 경우 사형을 당할수도 있었다. 실제로 전쟁이 끝난 직후 이렇게 강제수용소 경비를 맡았던 일개 말단 병사들까지도 대부분 처벌을 면하지 못했는데 그의 입장에선 매우 운이 좋았던 것.대부분 동부전선에서 복무한 독일군들의 회고록과 비슷하게 적군인 소련군을 꽤나 높게 평가하는 부분도 있다.[31] 그리고 그가 친위대 출신임을 숨기고 도주했다는 것을 비난하는 서술도 있었는데 사실 일단 친위대 출신임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지 너무나도 명확한 상황이었기에 그가 자신이 국방군이었던 것으로 위장한 것도 어쩔 수는 없었을 것이다.[32][33] 실제로 그처럼 나치 친위대 출신자들은 신분을 숨기고 조용히 살아가야만 했는데 이런 헤르베르트의 행보는 생각 외로 독보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유대인 친구 두 명이 있다. 동부전선에서 유대인 친구 어머니들로부터 아우슈비츠 이야기를 들었는데 본인은 도시전설 쯤으로 여겨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답장을 보냈는데 그 후로 소식이 끊겼다가 다행히도 전후, 친구들은 국방군으로 무사히 전역, 어머니들도 살아남았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3.5. 내용상 오류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는 전쟁중에 하급직책만 전전했기 때문에 상급정보를 받아볼 기회가 전혀 없어서 내용상에 오류가 좀 있다.예를 들어서 영국군과 싸웠던 전쟁 초기 부분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이 사용한 적이 없는 덤덤탄을 실제 탄환을 확인해보지도 않고 영국군 저격수가 사용했다고 서술하거나[34] 실제론 존재한 적이 없는 47mm 크루프 포가 나오거나 소련군의 152mm 대포를 172mm로 잘못 표시하는 등의 오류가 존재하며, 공격기인 Il-2를 전투기로 잘못 표기하는 등의 오류도 있다.[35]
4. 결론
심각한 한계점이 있기는 해도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는 나치 친위대원이면서도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선 중립적이며 당시 나치가 행한 홀로코스트와 인종말살부대의 민간인 및 포로 학살 등에 대해서 솔직하게 인정하고 본문에서도 이를 상세히 서술하는 등의 행위를 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영국군인협회와 함께 르 파라디 학살사건을 밝혀 신문에 난 적도 있다. 따라서 "우리도 희생자다, 우린 나치의 만행 따윈 몰랐다"고 주장하는 일반적인 나치 관련자와는 다른 사람으로 볼 수 있다.그러나 상술했듯 헤르베르트 브루네거도 다른 전범의 행위를 증언한 것으로 전범행위를 용서받았을 뿐 전범은 맞으며 자신이 속한 전범조직인 토텐코프를 미화하는 등 나치 관련자들이 공유하는 가장 근본적인 한계점을 벗어던지지는 못했다. 또한 다른 나치 전범들이 아직도 나치즘에 빠져있거나 입으로만 나치를 까는 사람이 많아서 헤르베르트 브루네거가 상대적으로 나아보이는 것 뿐이지 사실 나치 전범이면서 나치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 역시[37]심각한 결점이 되기도 한다.
그가 저술한 책이 미국에서 번역되고 출판되는 것에 제동이 걸린 적이 있다. 당시 미국 여론의 반발도 있었다. 이를 두고 미국에서도 그 이전에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책이 미국에서 출판된 적이 있지 않느냐며 이를 문제삼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수용소 경비로 복무한 적이 있는 전직 친위대 대원이라는 사람이 나치즘과 나치즘 정권에 대하여 '중립'적 입장에서 서술했다는 책이 반발에 부딪히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나치즘 정권이 저지른 구체적 범죄 뿐만 아니라 그 범죄를 촉진한 근원이 되는 나치즘 자체가 잘못되었음은 일부 극우를 제외한 대다수 사람이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명제다. 이렇게 일부 극우를 제외하고는 보편적으로 규탄을 받는 것이 나치즘과 나치즘 정권이다. 그런데 이유야 어찌되었든 친위대에 복무했던 그리고 도중에 수용소 경비로까지 복무했던 사람이 나치즘 정권의 행적에 대해 '중립'적 관점으로 책을 저술한다? 충분히 사람들로부터 의심과 반대를 살 만한 일이다. 객관적으로 나치즘과 나치즘 정권의 행적에 대해서 평가한다면 다른 수많은 연구자의 결론과 같이 비판적으로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런데 다른 수많은 객관적 평가의 결과로써 이미 비판 받고 있는 나치즘과 나치즘 정권의 행적에 대하여 굳이 '중립'적으로 평가하겠다며 글을 쓰고 이를 책으로 출판하는 행동은 그 동기가 불순하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한 것이다. 더군다나 본인 스스로 나치의 범죄를 목격하기까지 했던 사람 아닌가?
책 내용에서 일부 내용을 뺀다면 나머지는 약간의 내용상 오류는 있으나 실제 참전자답게 현실감 넘치는 전투묘사와 당시 독일군의 모습을 자세하게 써놓았다.
[1]
반지도자
[2]
바르샤바의 도살자로 유명한
에리히 폰 뎀 바흐 첼레프스키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그와 같은 나이에 독일군에 입대했다.
[3]
당시 경비병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수감자들과 사적으로 대화를 나누면 안된다는 규칙이 있었다. 이를 어기면 큰 처벌을 받았으며, 처벌에 앞서 SD 보안방첩관들 같은 인간 말종에게 걸리면 처벌 전에 주먹질에 발길질 세례를 피가 터지도록 받으며 잘나신 아리아인의 체면을 모조리 구겨버린 채로 동족에게 학대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4]
카포들은 일부러 SS 경비병들에게 잘 보이려고 수감자들을 필요 이상으로 괴롭혔는데, 이를 보다 못한 브루네거 (당시) 이병은 결국 한여름에 고된 노동으로 탈진해 쓰러진 노인 수감자를 마구 구타하던 카포 1명을 고의적으로 노동력을 저하시켰다는 죄목으로 윗선에 보고하기 위해 카포의 수감 번호를 적어갔다. 심지어 이 카포는 대놓고 자신이 잘 보이고 싶어하며 SS 경비병들의 눈치를 보고 있어서 그의 어그로를 제대로 끌었다.
[5]
외부조직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한다. 그전에도 두번의 탈옥이 있었는데 한 번은 군견부대가 소나무위에 숨어있는 수감자를 발견하고 한 번은 수용소 부지를 샅샅이 뒤져도 안나오자 상급부대에서 설계도를 확인하고 설계와 미묘하게 다른 벽난로를 허물어서 발견한다. 유일하게 탈출한 사례가 이것뿐.
[6]
저서엔 상당히 위험한 정치적 발언이라고만 적혀있다. 이쯤되도 상상이 갈거다.
[7]
책에선 덤덤탄이라 나왔다.
[8]
2차 대전 도중 이러한 일은 죽이지 않으면 죽는 동부전선에서는 꽤 자주 발생했지만 서부전선의 경우 드문 편이었다. 1943년 항복한다고 나온 이탈리아 왕국군이 미군에게 사격을 가해 피해를 입히자 패튼과 그의 부하들은 사로잡은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수백명을 홧김에 총살시켜버려 비난받기도 하였다.
[9]
영국군 포로들을 광장에 모아 귀한 기관총 2정을 겨누면서 감시하는 모양새에 뭔가 기시감을 느꼈다고.(저자의 말로는 이런 개방된 장소가 아니라 헛간으로 돌아가게 하면 소수로도 충분했다고.) 그래서 기관총 사수에게 뭔 일이냐고 묻자 사수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저놈들 오늘 총살된다."라고 답한다. 그래서 장난인줄 알고 누가 시켰는데? 라고 묻자 크뇌힐라인 SS대위의 명령이라 하자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다.
[10]
그 전에 전투가 한창일때 크뇌홀라인이 피신해있던 프랑스 여자들을 권총으로 사격하는 것을 보고 "저들은 그냥 여자잖아요!"라고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는데 이때의 일로 크뇌힐라인의 눈밖에 났고 고생길이 시작되었다. 크뇌힐라인은 이후 브루네거를 죽이기 위해 온갖 위험한 일을 다 시킨다.
[11]
오토바이 전령 탄처로, 전투 당시 공로를 세워 훈장까지 받은 병사였다고 한다. 허나 취중 한 프랑스 여성을 성폭행하려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SS 순찰대에 체포되었다. 여기서 끝났으면 계급 박탈 및 불명예 전역, 덤으로 부대 옆 노동수용소에 보내지는 정도로 끝났겠지만 체포 다음 날 탈영하여 오토바이를 타고 도주하다 국경 근처에서 다시 검거되는 바람에 총살로 처벌 수위가 올라갔다고 한다.
[12]
회고록에 따르면 에르잠 대위는 "독토르 그라우잠"(Doktor Grausam, 참혹한 의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한테 그렇게 했다면 넌 심장에 총알 박히는 줄 알아. 알아들었어? 이 멍청아!" 등 욕은 좀 얻어먹었다고 한다.
[13]
당시 히틀러는 독소전쟁을 시작한 이유를 소련이 지속적으로 독일의 동맹국과 독일의 동부 국경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선전했었다.
[14]
국방군 장교가 그들을 보고는 "여기 소대의 지휘관이 누군가?"라고 말하자 "소대가 아니라 대대병력입니다."라고 말하자 그 장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15]
나중에 중위로 진급
[16]
브루네거는 그뤼테를 가리켜 자기가 만나본 군인들 중 최고의 군인라고 극찬했다. 게다가 그뤼테 자체가 회고록에서 적지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다. 처음 만났을때 그뤼테가 짬밥 퍼오라고 시켜서 이에 브루네거는 그뤼테 소위를 골탕 먹이려고 밥을 뒤섞어서 가져왔는데 화를 내기는 커녕 '꼭 이랬어야 했나' 라고만 말했다고 한다. 포로에게도 너그러웠을 정도로 온화한 성품에 탁월한 지휘로 부지런하고 머리좋은, 즉 한마디로 유능하고 인기가 많은 장교이다. 하지만 브루네거가
쿠르스크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후송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르코프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17]
당시 소련군은 포로로 잡은 친위대원을 고문살해하는게 일상이었고, 전쟁 중에나 전후에나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힌 친위대원들은 거의 곱게 죽지 못했다.
[18]
회고록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아인자츠그루펜과 디클레방어 사단과 같은 인종말살을 전문으로 하는 소위 쓰레기 사단들은 같은 친위대 내에서도 SS의 수치란 소릴 들을 정도로 사람 취급을 못 받는 패들이었다.
[19]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만화 장갑척탄병과 해피 타이거에서도 이와 같은 장면이 나온다.
[20]
독소전 당시 독일군 포로들은 혹독한 처우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향하여 스파이로 투입됐는데 스파이를 핑계삼아 아군기지로 복귀하거나 진짜로 스파이 행위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이런 자들 때문에 브루네거 역시 전쟁 막바지에 꼬임에 넘어가 포로가 된 것이다.
[21]
가령 간발의 차로 놓친 전차가 얼마 안 가 폭탄테러를 당했다던가.
[22]
그런데 미군 조종사도 억울할 만한게, 당대 최고의 수준을 자랑한 영국 공군/미 육군항공대도 기술력 부족으로 민간 시설과 의료 시설, 심지어 아군한테도 오폭을 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노르망디 전투의 토털라이즈 작전에 영국군 소속으로 참전한 폴란드 제 1기갑사단은 독일군의 저항보다 아군인 영국 공군의 공습으로 두 배나 더 많은 피해를 보기도 했을 정도로.
[23]
회고록에 의하면 차출당하기 전에 자신이 자원했다고 한다.
[24]
소위도 권위적이지 않던 사람이었는지, 저자보고 경험 없는 자신을 많이 도와달라며 서슴 없이 부탁했다고.
[25]
그러나
전쟁 전 시점으로부터 나치가 그리도 자부하던 '자칭 검증기준' 이란 걸 보면 알겠지만, 절로 뒷목에 손이 갈 만큼 그 전문성 면이 의심스럽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었다. 이 골때리는 사례들을 보면, 아마 아마도 친위대라고 한들 역시나 이러한 쪽의 레퍼토리에서는 예외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즉, 저따위로 모호하고 제멋대로인 판별 기준+당대의 기술력 부족까지도 더해져 그야말로 환장의 콜라보(...)가 벌어졌다. 검사를 가라로 하는 건 예삿일에 전문인력마저 오진하면 그대로 아리아인 판정받고 합격, 가계도 상의 고조부 너머 조상들마저 유대인 혼혈 비중 쪽이 사실상 소수점 대 수준이라 판단 상 유대인이 아니면 아리아인으로 판단해 합격, 외견 위주의 소견 상에서 아리아인이라 봐도 합격시키는 등의 사례부터 다름아닌 히틀러의 총애만 받으면 아예 유대계나 순수 유대인도 명예 아리아인 or 아예 아리아인으로 편입한 탓에 정말로 지지리도 운 없이 들키거나, 숨기다 말해도 프리패스로 합격에 인맥 없이도 히틀러 필두로 나치 고위층이 손수 가계조작+혈통조작+통계조작 등 친절히
눈 가리고 아웅까지 해 줬으니, 혹시 나치가 파기했거나 아직 묻힌 자료 중에는 이러한 온갖
병림픽 모음집이 들어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26]
실제로도 무슨 공교로운 일인지, 나치 독일의 인종법 개정 전과 후를 모두 합산한 기준으로 공식 집계된 나치 독일 국방군과 심지어는 일반친위대/무장친위대 출신까지도 모두 합치면 국적 불문 연합군에 포로로 잡힌 나치군 소속 유대인 및 유대계 혼혈으로 파악된 병력이 무려 1만 5,000여명 내지 그 이상에 이른다(!!!). 그러나 해당 포로들 중 특정 출신자는 전범자란 얘긴데, 그럼에도 그들이 재판에 불린 기록이나 자료 등이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아마 재판과 린치 위험도 있는데다 자기 출신이 알려지는 걸 피해 은둔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본보기로 간 경우를 빼면 사실상 사면된 전범이 많듯 얼굴사진만 없지 통계 속에 있건 없건 다들 유대계 사회와 국제적인 여론과 무관하게 조용히 사면되었을 확률도 높다. 어쨌든, 그들은 동/서부전선의 연합군과 파르티잔들에게 달려들면서 너 죽고 나 살자며 아무 것도 모르고 아득바득 싸웠다.
[27]
다만, 반대로 생각하면 살아남아서 포로로 잡힌 인원이 저 정도면 실수나 판단 상으로 통계에서 제외되었거나 전사 혹은 은둔한 이들의 상황은 어땠을지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국방군과 친위대는 모두 똑같은 전범집단이지만, 가뜩이나 친위대 쪽은 국방군보다 더했다면 더했지 덜할 게 없던 덕분에
전쟁 초부터 쌓아오던 업보가 모조리 터지며 국제법상 지위가 전쟁범죄단체/테러조직으로 분류되어
제네바 협약을 위시한 국제법 비보호대상으로 지정 후 영구제명되며 교전권도 영구박탈된 친위대원들은 이후 동-서방을 막론한 연합군들은 물론 파르티잔들에겐 더욱이 적 상이군인에 대한 치료는커녕 포로 취급조차도 못 받고 잡혀도 고문당하거나 포로로도 잡지를 않고 집단처형당하며 산 채로 갈려나갔고, 그나마 호송 혹은 구출되어 의병 제대하면 럭키였다. 거기에 시간이 지나자, 탈출해서 원대복귀했던 국방군과 친위대 병사들조차
상관 잘못 만나면 후퇴 중이나 포로 송환 이후
아리아인의 수치이자 겁쟁이 패배주의자 운운하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저잣거리에서 흠씬 얻어맞다 항명죄+반역죄로 누명까지 쓰고서 억울하게 처형당하기도 했고, 만약 학대를 못 견뎌 탈영하다 발각되거나 더 운 없이 연합군들을 마주치면 그보다 더 험한 꼴을 다 당하다 유대인 혈통의 증표를 보이고 살려달라고 말해도 처형됐다. 그게 아니어도 동료들 사이에 끼여서 연합군이나 파르티잔들과 싸우다 전사하는 건 물론 수용소 근무자들은 수용소 해방 때 꼭지가 돌아버렸던 피해자들과 연합군 손에 린치, 고문당하다 집단처형당하는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는 등 온갖 비극적이기 그지없는 실화가 존재한다. 이 웃을 수 없는 일화는 무려 저서로까지 편찬되었을 정도로 유명했다.
[28]
사실 브루네거도 나이가 어려서 그렇지 전쟁의 시작부터 참전한 고참이다.
[29]
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 12대 정예부대 중에서 독소전당시 무자비한 학살, 약탈을 비일비재하게 저지른 천인공노할 개쌍놈 집단이며 얼마나 심했는지 무장친위대 중에서도 전쟁 범죄에 가장 깊이 관여한 사단이다. 그래서 악명이 다른 사단에 비할 수 없다. 보통의 학살부대는 학살만 하지 전투에는 젬병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놈들은 싸움질에도 유능한 군인들이자 동시에 학살자였다.
[30]
오토 카리우스도 이것 때문에 곤혹을 치렀는데 미군과 협상을 하기 위해 찾아간 중위에게 토텐코프로 오해받는다. 다만 오토 카리우스가 기갑부대원들은 토텐코프보다 더 오래전부터 해골 마크를 사용했다고 설명해서 넘어간다. 해골 마크는 프로이센 기병대의 상징이었고, 당시 기갑은 기병의 후예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전차병들이 이어받은 것 뿐이다. 오히려 토텐코프 부대원들이 슈츠슈타펠 마크를 역사가 오래된 상징마냥 멋대로 갖다 쓴 것이다. 당장 국방군 전차병들이 이랬는데, 아예 딱 봐도 식별되는 친위대 상징물들이 덕지덕지인 무장친위대 전차부대원들은(...).
묵념.
[31]
오토 카리우스, 구데리안, 만슈타인을 비롯한 동부전선 참전 경험이 있는 대부분 독일군 참전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으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을 둘다 복무해본 참전자들은 대부분 '물불가리지 않고 용맹하고 자비없는 소련군', '껄렁껄렁하고 좀만 공격 받으면 공군!, 포병! 을 외치는 미군'으로 평가가 귀결된다.
[32]
영화
퓨리에서 주인공 일행을 비롯한 미군들이 친위대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쳐죽여야 될 악마들로 보며 작중 등장한 친위대 중에서 주인공 일행에게 항복한 친위대 중 살아남은 자는 없다.
[33]
픽션이지만 만화
흑기사 이야기를 보면 SS 수리중대에게 낡은 국방군 군복 몇 벌하고
티거 2 한 대하고 바꾸었다고 언급 된다.
[34]
일반적인 군용소총탄인 FMJ의 위력강화로 인해 벌어진 오해. 총탄이 무연화약을 사용하면서 탄속이 엄청나게 빨라졌고, 당시 제식소총탄은 죄다 강력한
7.62 mm급 탄이어서 굳이 국제법을 어기면서까지 명중률과 관통력을 떨어뜨리는
덤덤탄 따위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전장에서 상대의 보급사정이나 상대가 쏜 탄이 뭔지 알 길이 없으니 맞은 사람의 몰골이 영 아니면 연합군이건 추축군이건 서로 상대방이 덤덤탄을 쓴다고 욕하고 다녔다. 브루네거도 여기에 낚인 셈.
[35]
다만 이건 당시 보병으로 복무한 브루네거 입장에서는 적 중화기나 비행체의 이력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방도가 없고 부사관으로 진급해서 이러한 무기 이력에 대해 교육을 받았어도 전투중에 사소한 이력에 신경쓸 상황이 없거나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먹을수도 있다.
[36]
당시 상황을 설명을 참고하면 부비가 가져온 신제품은
2.8cm sPzB 41 중대전차 소총(경대전차포)이다. 실제로 독소전쟁 초기에 테스트용으로 배치되었다고
[37]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 무신경한 태도를 가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인도적인 관점에서 보면 회고록에서 무신경한 자세를 보인 것은 나치를 찬양하지만 않은 것이지 결코 양식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얼마든지 문제삼을 수 있게 된다.
[38]
비슷한 작품으로 독일계 프랑스인
기 사예르의 <잊혀진 병사>가 있는데 여긴 1942년부터 3년 복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