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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3 00:22:10

허빈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고려인 출신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1912년 12월 30일,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났다. 고중을 졸업하고 블라디보스토크 사범대학교에 진학하여 2학년까지 마쳤으나 1937년에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강제이주되었다. 거기서 사범대학 노어어문학부를 졸업, 크즐오르다주 중학교 교원으로 배치되어 단합경리 당위원장을 겸하였다.

1945년에 스탈린이 북한으로 파견할 고려인 인텔리들을 모으면서 소련군에 징집, 소련군과 함께 북한에 진공하였으며 1946년에 소련 국적을 포기하였다. 1946년부터 1947년까지 문화선전성에서 일하다가 1948년 신의주 국립사범대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1949년, 윤공흠의 뒤를 이어 평안북도 당위원장으로 이동,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1년 허가이의 실각 이후 관문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1951년에 진행된 반탐오, 반낭비, 반관료주의 투쟁 때는 생존하였다. 1953년까지 재임하다가 서춘식에게 물려주고 1953년에 황해북도 당위원장으로 옮겼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당위원장 중 성적이 우수하였기 때문에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 최용건, 리상조, 리효순과 함께 조선로동당 대표단으로 파견되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57년 9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외교위원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1958년 2월 10일, 허국봉의 뒤를 이어 신임 폴란드 대사로 임명되면서 황북 당위원장에서 물러났다. 불과 10개월 후인 1958년 12월 2일, 불가리아 대사 김학인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송환되었다. 1959년 내내 허빈은 김열과 함께 정권기관의 독자성 운운하며 당의 지도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고 혹독한 비판을 받으며 사상검토를 당했고 실종되었다.

3. 참고문헌